2.
산동성 청주부(靑州府) 서쪽 성문은 대정문(大定門)이다. 세로로
쓰여진 현판이 성문 높이 걸려있는 그 아래로 두터운 성벽을 통과해
들어가 성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 분명한 대정대로(大定大路)를
따라 걷다가 검은 벽돌로 높이 쌓은 종루(鐘樓)를 보게되면 그 종루
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서면 부호들의 저택이 분명해 보이는 높은 담
장을 좌우로 낀 호동(胡同 ; 골목)이 나온다. 이 길로 다시 오백여
보를 걸어가면 담장이 잠시 끊기고, 두 마리 돌사자가 지키고 있지
만 항상 열려있는 솟을대문을 만나게 된다. 대문 좌우 기둥에 붙어
있는 대련은 이미 글씨도 흐릿해진 데다 바람에 반쯤 뜯겼으니 보지
도 말고, 문턱까지 연결된 계단의 초입에 서서 고개를 들어보면 거
기 위압적이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튀어나온 처마 아래, 문미(門楣)
바로 위에 현판이 있고, 비룡표국(飛龍 局)이라는 네 글자가 붉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쓰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무에 글자를 돋
음으로 새기고 매년 길일을 잡아 새로 칠한 것일 게다.
그러나 오늘 현판은 한쪽이 뜯겨 기울어진 채 매달려있고, 항상
깨끗이 쓸어 물을 뿌려놓았던 대문 앞은 찢겨진 천과 부서진 그릇
같은 것들로 어지럽혀져 있다.
평소처럼 바쁘게, 아니 평소보다도 오히려 더욱 바쁘게 많은 사람
들이 오가고 있지만 현판이나 청소 따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
도 없다. 그들은 비룡표국의 가재도구와 재물들을 실어 나르는데 바
빠 현판이나 돌사자 정도의 돈 안되는 물건들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다.
표물을 싣고 다니던 수레와 말들은 이미 한참 전에 끌려나갔고,
돈이 될 듯한 족자나 도자기, 그림이 그려진 침상과 의자들은 그보
다도 먼저 실려나갔다. 표사들이 들고 휘두르던 병장기들도 한웅큼
씩 사라지고, 모양 좋은 정원석과 화초까지 뿌리째 뽑혀나가고 있는
지금, 주인이라 할 사람은 텅빈 대청 한 가운데에 의자를 놓고 앉아
그 모양을 바라보고만 있다. 용유진이다.
용유진은 팔짱을 끼고 지긋이 눈을 감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한
낮의 양광을 받으며 조는 것같지만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과 가볍
게 떨리고 있는 입술을 보면 사실은 고통을 참고있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팔짱 낀 양손은 사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흰 천을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러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또 지금 가재도구들을 실
어 나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서 배려를 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 가책 없이 마음껏 물건
들을 집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물건을 집어가고 있는 사람
들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표행을 나갔다가 풍도십삼호에게 죽은 표
사들과 친구들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표물을 운송하고 받은 보수는 빚을 갚는데 거의 다 들어가고, 남
은 재산이라곤 표국과 그 부속의 집기들밖에 없는 그로서는 죽은 자
들에 대한 보상금으로 그것들을 다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충분히 보상하지 못하는 데에 지금 그가 느끼는 고통의 가장 큰 부
분이 있었다.
용유진은 문득 눈을 떴다. 혹시 남은 물건이 없나 해서 대청 안을
둘러보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에
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 의자도 가져 가세요. 경사에서도 유명한 장인이 만든 홍매괴
(紅梅槐) 의자랍니다. 물건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이면 꽤 괜찮게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아닐세. 용공자 그냥 앉아있게나. 어찌 그것까지…."
그를 보던 사내가 무안한 얼굴로 급히 손을 저었지만 용유진은 천
을 동인 손으로 그 의자를 밀어주었다.
"이제 제게는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괜찮으니 가져가세요."
사내가 손은 저으면서도 혹여 다른 사람이 차지하기 전에 맡아두
려고 의자에 다가가는 것을 보며 용유진은 천천히 대청을 나갔다.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저 홍매괴 의자는 남을 돕는 일 이외에는 극도로 검소했던 생전의
아버지가 유일하게 사치를 부려 구한 것이었다. 젊은 시절 표사로
지낼 때 당시 그를 부리던 표국의 국주가 저런 의자에 앉아 지시를
하는 것을 그렇게도 부러워했었다고, 그래서 당신의 인생이 성취했
던 모든 것에 대한 증거로 저 의자를 아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아버지의 인생이 성취했던 모든 것은 한 번의 실패로 사라져 버렸
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를 귀여워했던 표사들과 아버지가 그렇게
공을 들인 친구들, 이웃들을 데리고 그렇게 아버지는 남긴 것 하나
없이 가버렸다.
이 표국의 토지와 건물조차도 이미 팔아서 보상금으로 나눠주고
난 지금 용유진은 여기 살 수도 없었다. 가재도구 하나 가지지 못한
채, 돈이 될만한 물건 하나 지니지 못한 채 그대로 나가야 하는 것
이다.
'아니, 하나는 있군!'
용유진은 대문에 늘어져있는 현판을 당겨 옆구리에 꼈다. 아무도
돈을 쳐주지 않아도 그에게만은 가장 소중한 물건이 그에게 남은 셈
이었다. 그렇게 그대로 대문을 나서려다가 그는 문득 그 자리에 서
서 현판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양손을 들었다. 바쁘게 물건을 나르던
사람들이 모두 멈추어 그를 쳐다보았다.
용유진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었다. 품속에 넣어두었던
위패 두 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위패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겹저고
리와 속저고리, 천으로 된 신발과 얇은 바지를 벗고, 그 안에 속옷
까지 마저 벗어서 손에 들고 흔들었다.
"흉한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이 제 마음입
니다."
용유진은 벌거벗고 서서 얼굴도 붉히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입은 이 옷과 여기 이 현판을 제외한 아무 것도 이 집
에서 가지고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남아있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혹시 의심하시는 분이 있다면 뒤져보시기 바
랍니다."
그의 돌연한 행동에 얼이 빠져있던 사람들 중에 한 노인이 앞으로
나와서 겉저고리를 걸쳐주며 말했다.
"되었네, 용공자. 자네 마음이야 우리가 알지. 그걸 왜 모르겠나.
마음에 한 톨 거짓이 없다는 걸 우리도 잘 알지."
용유진은 그 손을 밀치고는 손을 모아 그 자리에서 깊이 읍을 했
다.
"하찮은 물건들로 가족과 친지를 잃은 어르신네들의 마음을 어찌
위로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만 지금은 가진 것이 없으니 이걸로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제가 나머지 빚을 갚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손을 저었다. 그들 중에는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
도 있었다.
"아닐세, 용공자. 우리가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군. 원래 이런 일
에 보상금이란 당치도 않은 것이지만, 우리도 가족을 잃고 살아갈
길이 막막하니 이럴 수밖에 없음을 용서해 주게나."
용유진은 옷을 입고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반드시 이 빚을 갚겠습니다."
그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서문을 빠져나가 성 외곽을 감
싸고 흐르는 해자를 따라 걸어서 북문 밖으로 갔다. 거기에서 큰길
을 따라 한 시진이나 걸어서야 산에 접어들 수 있었다. 요산(堯山).
용유진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용유진은 무덤 가에 현판을 기대놓고는 앉아 멀리 흐르는 북양수
(北陽水)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강이지만 저 강을
따라가면 곧 바다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를 따라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바다. 그 해안 가를 따라 말을 달려
보름을 가면 이번에는 드넓은 황야를 보게 된다. 요동(遼東) 벌판이
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 남쪽으로 내려가면 진정한 세계, 사람의 바
다, 중원(中原)이 나타난다.
정말 세상은 다 가볼 수도 없이 넓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였다.
이 막막한 세상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이 완벽히 혼
자인 것이다.
용유진은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또 하나의 가없는 공간이 눈앞
에 펼쳐졌다. 붉은 구름과 보라색 하늘.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에 가장 넓은 것은 밖이 없는 것이고, 세상에 가장 작은 것은
안이 없는 것이라고 했던가. 용유진은 지금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하
늘과 그가 그 말에 꼭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은 바깥이 없
이 크고,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작았다.
"심지어는 땅을 긁을 손톱도 없군."
용유진은 혼자 중얼거리고는 하늘을 보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
러다가, 점점 나직하게 소리내어 웃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의 앞에는 한없이 펼쳐진 자유(自由)가 있었지만 대신 감싸줄 그 무
엇도 없었다.
완벽히 혼자임을 느끼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