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21화 (21/37)

2.

용유진이 혼절했다가 꺠어났을 때, 조비홍은 탁자에 앉아 술을 마

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깨어나자 술 한 잔을  권했다. 용유진은

받아 마시려 손을 내밀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가슴을  움켜 쥐었다.

격렬한 통증이 가슴에서 시작해서 온 몸을 휘감고 퍼졌다.

"역시 무리겠지. 죽지 않은게 신기한데, 술까지 먹을 수야…."

용유진은 조비홍을 다시 보았다. 조비홍의 말투는  너무 평온해서

한 대 얻어맞고 기절하기 전의 그 미친듯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

다. 용유진은 가슴을 문지르고는 다시 손을 내 밀었다.

"그러니 더욱 마셔야겠군요. 혹시 곧 죽을지도 모르니 그 전에 한

잔이라도 더 마셔야겠지요."

"못 보던 사이에 술꾼이 다됐군. 고생이 심한줄 알았더니 술만 마

시고 다녔나?"

용유진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삭발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더벅

머리를 두건으로 감싸고 다녔는데 아까의 일장  드잡이 질로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고생도 했고, 술도 마셨죠. 술이나 주십시오."

"술은 나중에 마시고…."

조비홍은 다가와 침상 끝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가슴이나 보여봐."

용유진은 조비홍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 보았다. 맑은  눈이었다.

적어도 음란한 빛은 없어 보였다.

펼쳐진 가슴에는 어린아이 손바닥처럼  작고 하얀 자국이  먹으로

그린 것처럼 또렷한 윤곽선을 갖고 찍혀 있었다.

"백옥수(白玉手)에 정확하게 맞았군. 그런데도 죽지  않았으니 정

말 신기한 일이야. 게다가  그렇게 일찍 깨어나다니….  무공, 특히

무슨 기공같은 걸 익힌 적이 있나?"

"옥로진기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조비홍은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들어봤지. 그 옥로진기를 익혔단 말인가?"

"저희 선친께서는 하급 표사에서 시작하신 분이라 제대로 된 내공

심법같은 건 익힌 적이 없었죠. 그래서 어느정도  선 이상으로는 무

공이 증진되지 않으셨고,  마흔이 넘어가면서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저하되셔서 표국 일을  하기 힘들 정도였죠.  저한테는 그런

한계를 주고싶지 않으셨든지 어느날 책 한 권을 사와서 주시더군요.

옥방심결(玉房心訣)이라는 것이었는데, 방중술에 대해  나온 것이었

지만 거기 내공심법도 적혀 있었습니다. 그걸 익혔지요."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방중술을 익힌 것은 아닙니다.  엉터리일 가능성도 생각  않은게

아니지요. 하지만 제대로 된 내공심법 같은 건  명문 정파에서 철저

히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니 달리 어쩔 수도 없었습니다."

거짓말을 할 때는 구 할을 진실로, 나머지 일 할만 거짓으로 꾸며

넣는 법이다. 용유진이 지금 그래서 신세 내력과  아버지에 관한 이

야기는 전부 사실로 고한  것이었다. 단지 옥로진기를  익힌 경과를

그 사실의 그늘 뒤로 가린 것이었다. 이 거짓말은 사부와 함께 꾸민

것이었고, 몇번 연습도 해본 것이었다. 조비홍을  완벽히 속여 넘기

기 위해서였다. 아예 다른 것을 익혔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랬다간 오히려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옥로

진기의 운용법을 얻어낸다는 것은  꿈에도 못 바랠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조비홍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게 방중술과 양생술로 시작된 것이라서 그런 식으로 흘러

나간 게 많지. 그중에는 상당부분 누락되거나  왜곡된 것도 있는데,

그런 걸 익히면 양생은커녕 젊은 나이에 골병  들기 십상이야. 다행

히 내가 좀 알고있으니 네가 알고있는대로 말해봐. 틀렸으면 교정을

해주지."

용유진은 허신에게 배운 옥로진기의 구결을 외어  보였다. 조비홍

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제대로 된 것을 배웠군.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백 년

을 익혀도 몸이나 좀  건강해질까 무공을 익히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되지. 그래도 이 백옥수에는 효과가 있었으니  다행이군. 내가 사

용한 무공이 바로 옥로진기에서 나온거라 불완전한 옥로진기를 익힌

네게도 방어효과는 있었던 모양이야. 정말 다행이다."

용유진은 조비홍을 보며 웃었다.

"절 죽이려 했던 걸 생각하면 다행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시는

군요."

조비홍도 웃었다. 어딘지 계면쩍어하는 웃음이었다.

"일단 다 고쳐놓은 다음에 다시 죽여주지. 기다려. 일단은 고치는

게 먼저다."

그는 백옥수에 맞아 생긴 장인(掌印)위에 손바닥을 덮었다.

"치료를 할 때 쓰는 구결을 말해주지. 아니, 그 전에 진기를 움직

이는 법부터 배워야 겠군. 어느 기공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옥로진

기도 조신(調身), 조심(調心),  조식(調息)의 수련법으로  이루어져

있지. 팔자결(八字訣)은 알고 있나?"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하게(悠), 가늘게(細),  천천히(緩), 고르게(均),  조용하게

(靜)가볍고 부드럽게(綿), 깊게(深), 길게(長) 하라는 말씀이시죠?"

"잘 알고있군. 일단 운기해 봐."

용유진은 옥로진기의 수련법대로 조식을 시작했다. 조비홍은 용유

진의 명문에서 손을 떼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가볍게 문지르기 시

작했다.

"단전에 기가 모이는 신기상주(神氣相住)의 단계는  이루었군. 그

럼 그걸 한 번 움직여 보자. 간단한 거야."

조비홍은 손바닥을 떼고 손가락으로 단전을 짚었다.  심상치 않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위였지만 용유진은 몸을  움찔했을뿐 피하려

하지는 않았다. 조비홍의 손끝에서 욕정의  끈끈함이나 살기어린 차

가움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비홍은  과연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갔다.

"자, 내 손끝이 느껴지지? 기가 그걸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이 들지?"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의 촉감 아래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젠 미동도 말고 기의 움직임만 느껴봐. 그리고 그 기분을 간직

하는 거야. 아주 쉽지?"

조비홍의 말대로 첫 운기는 극히 쉬웠다. '산길을  다니려면 아는

사람에게 물어라'라는 사부의 말은 진리였다. 조비홍의 친절한 안내

는 여태 그가 생각만 할뿐 몸으로  구현하지는 못했던 내가(內家)의

도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몇 번 운기를 하고 난 후 용유진은

길게 숨을 토하며 눈을  떴다. 온 몸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미 탁자에 돌아가 앉아 있던 조비홍이 수건을  던져 주었다. 용유

진은 그걸로 몸을 닦고 일어났다. 숨쉬기도,  움직이기도 한결 편했

다. 전혀 부담이 가지 않았다.

"너, 의외로 무공에 소질이 있구나. 처음 운기를  하는데 그 정도

면 정말 대단한 거야. 상처도 벌써 거의 나았고."

과연 가슴팍의 손자국은 희미해져 있었다. 용유진은  탁자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상처를 낸 사람도 난데 뭐가 감사하다는거냐? 넌 병  주고 약 주

는 사람에게도 감사를 할 놈이구나."

"치료해줘서 고맙다는게 아니라 옥로진기를  전해주셔서 감사하다

는 겁니다."

"그게 왜 감사하지?"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울 기회를 얻은 거니까요."

"제대로 된 무공은 배워서 뭐하려고?"

"제대로 된 표사가 될 기회를 얻은 셈이죠."

"표사라…, 너 아직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느냐?"

조비홍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아름다워  보여

용유진은 넋을 잃고 보았다. 환관의  복장을 하고있는 그대로인데도

지금의 모습은 마치 절세가인의 교태와 비슷해 보였다. 조비홍이 용

유진의 눈길을 의식하고 손을 내 밀어 코를 튀겼다.

"뭘 그렇게 보는거야?"

용유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갑자기 조 부내관령님이 아름다워 보여서요."

솔직한 마음 그대로를 이야기 한 것인데 조비홍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날 더 이상 놀릴 필요는 없다. 이제 널 건드리지 않을테니까."

"놀리는게 아닙니다. 뭐랄까…,  잘못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기분입니다."

조비홍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그린  듯이 앉아

서 손등으로 이슬을 떨구고 있었다.  용유진은 어색해져서 굳어있다

가 탁자 위의 술잔을 들었다.

"마셔도 될까요?"

대답이 없었다. 용유진은 그냥 마셨다. 맛이 있었다. 전날과 같은

산해진미는 없고, 무를 잘라놓은 안주 뿐이었지만 그  안주도 맛 잇

었다. 조비홍이 술병을 들어 한잔을 더  따라주었다. 용유진은 그것

도 마셨다. 조비홍이 고개를 들고 빙긋이 웃었다. 그 눈꼬리의 젖은

자국을 용유진은 애써 못 본척 했다.

"더 마실 수 있나?"

"주시면 더 먹지요."

"그럼 마셔라."

두 사람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동창이 어슴프레하게 밝아올 때까

지. 조비홍이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새벽공기가 안개와 함

께 방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조비홍은 돌아선채 말했다.

"그만 돌아가라. 다시는 널 부르지 않겠다."

"이 맛있는 술을 더 대접해주실 용의는 없으십니까?"

"싸구려 술이야. 아무데서나 마실 수 있을거다."

"술에는 장소와 상대가 중요하다지요.  여기에서 마신 술은  정말

맛 있었습니다."

"허튼 소리!"

"안 믿으셔도 상관없지만 오늘 술맛은 못 잊을겁니다.  조 부내관

령님의 진정한 모습도요."

용유진은 꾸벅 인사하고 문을 나섰다. 뒤에서 조비홍이 불렀다.

"술 생각이 나면 또 오너라. 다음에 또 한 잔 하자."

용유진은 웃었다.

"언제든 오지요."

"그리고…."

조비홍은 그에게 철패(鐵牌) 하나를 던져 주었다.

"허주사에게 말해두지. 지장전(地藏殿)으로 가도 좋아."

용유진은 그가 받은 철패가 무엇인지, 지장전으로 가라는 말은 무

엇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조비홍이 손을 저어  나가라는 신호를 보

내는 바람에 그냥 나왔다. 그러나 조비홍의 방이 보이지 않게 될 무

렵 그 의문에 대신 답해줄 사람이 나타났다. 허신이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음…. 별 일은 없었느냐?"

"예…, 사부님이야 말로…."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물으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젖

은 어깨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사부님…."

허신은 밤 새 그를  기다렸던 것이다. 용유진이 눈시울을  붉히자

허신은 보기 흉한 듯 손을 저었다.

"겉모습이 멀쩡한 걸 보니 크게 당하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잘 해주더군요. 다음에 또 만나기로 했습니다."

"다음에 또?"

"술을 대접하겠다는군요."

허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옥로진기는 배웠나?"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배웠습니다."

"좋아, 그게 시작이야. 그게 모든 것의 기본이다.  나머지는 차차

배워도 좋고, 안 배워도 좋아."

하나의 기공이 있으면 그건 기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법, 권

장지각의 수법들과 검, 도의 사용법, 심지어  방사를 치루는 방법까

지 하나의 기공으로부터  파생되어 만들어지고, 그것들로부터  다시

기공이 서는 것이다. 하나의  기공을 익힌다는 것은  걷고, 숨쉬고,

자고, 생각하는 것까지 그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  비로소 제대로

배웠다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루마공만  해도 문제의 고루

제맥술과 개로보 같은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왔고, 옥로진기도 그래

서 백옥수와 여타 알려지지  않은 무공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었

다. 그런 것까지 익혀야 완전히 배웠다 할  수 있는 것인데, 허신은

그것들은 없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게 생겼거든."

허신이 히죽 웃으며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었다. 한 손으로 간신

히 들 수 있을만큼 두꺼운 책인데, 겉 표지에는 '태청수단진결'이라

고 쓰여 있었다.

"그게 뭡니까?"

"태청수단진결, 태청강기가 수록되어 있는 책이다."

"태청강기요? 그건 상관대부의 무공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구하

셨나요?"

"훔쳤지."

"상관대부에게서요? 그런 위험한 일을…?"

"아니, 그보다는 쉬운 곳에서 훔쳤다. 바로 네놈에게서!"

용유진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피식 웃었다.

"재미 없는 농담을 다 하시는군요. 제가 언제 그런  걸 가지고 있

었다고."

"에라, 이 멍청한 놈아!"

허신이 용유진의 뒤통수를 때렸다.

"이런 보물을 방바닥에 굴려놓다니. 하마터면 엉뚱한 놈들에게 빼

앗길뻔 했다."

용유진은 불시에 뒤통수를 얻어 맞고는 사부가 무슨 일로 화가 났

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허신은 시종 싱글거리기만  할뿐 화난 기

색은 없었다. 오히려 매우 즐거워 하고 있었다.

"너는 정말 복이 있는 놈이다. 복 있는 제자를 둔 사부인 나도 복

이 있는 셈이지. 자, 말해봐라. 이건 어디서 구했냐?"

"제가 그걸 어디서 구해요? 전 정말 오늘 처음 보는…. 아, 제 방

에 있는 책상자에…?"

"그래, 거기 있었다."

"그게 왜 거기에 있었을까요?"

"멍청한 녀석, 네가 모르면 그걸 내가 어찌  알아. 책상자는 어디

서 났느냐?"

"그게…."

용유진은 책상자를 구한 경위에  대해 이야기 했다. 허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한편 희희낙락 제자의 행운에 즐거워 하며 이야기

를 들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깊은 상념에 잠

겨 들었다.

"아무래도 일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생각했던 것만큼

의 시간이 허용되지 않겠는걸."

"무슨 조짐이라도…?"

"어젯밤 네 방에 도둑이 들었다는 걸 아느냐?"

"동창에 도둑이 들어요? 그런…."

"물론 위사들이 격퇴를 했지. 사실은 다 죽여 버렸지만 진짜 도둑

은 따로 있었다는 걸 네 말을 듣고야 알겠다."

"진짜 도둑이라뇨?"

"도둑을 격퇴한 위사들, 특히 어제 갑자기 돌아온  일급 당두 둘,

적중산과 천옥낭이다. 그들은 아마 널 오래 전부터 감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야 네가 책을 구하자마자 도둑이 들고, 그 시간

에 꼭 맞춰서 경계를 할 일이 없지. 다행히  내가 먼저 책을 빼돌렸

지만…."

용유진이 정말로 궁금해 하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사부님은 어떻게 그걸 아시고 미리 빼돌렸습니까?"

허신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혹시 네가 도망갈 일이 있을까봐 미리 짐을 챙겼지."

용유진의 말문이 막혔다. 조비홍에게 당하다 못해  도망가기로 결

정을 할 경우를 대비한 준비였던 것이다. 사부의  세심한 배려에 코

끝까지 찡해지는 용유진이었다.

"몸만 빠져나가면 되는데 짐까지…."

허신은 용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난뱅이에겐 옷가지 하나도 중요하지. 덕분에 이 책을  미리 빼

오지 않았겠니. 다른 책들도 귀중한 것이었지만 이 책만은 못하지."

"다른 책들요?"

"그래, 하나같이 각파의 비전검법도록(秘傳劍法圖錄)들이었다. 그

것까지 챙기면 이 책에서 관심을 떼게 하지  못할 것같아 내버려 두

고 왔지만 다행히 요건 또 챙겼지."

허신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꺼내 보여준  책은 '천도책(天道策)'

이라는 표지 아래 '검법요결(劍法要訣)'이 수록된 것이었다.

"책 말미(末尾)에  화산노인(華山老人) 서(書)라고  발문(跋文)이

적혀 있더구나. 내 추측으로는 전대에  천하제일검이라고 불렸던 화

산검성(華山劍聖) 엽장청(葉長靑)이 화산노인이라 자청한 것이 아닌

가 한다. '형은 성(姓)을 고쳐 엽(葉)씨가  되고, 동생은 이름을 고

쳐 광생(狂生)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무림에 유명하지. 원래 엽장청

과 검치 섭광생은 형제라는 이야기다. 하여간 지금  그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니고…, 두 사람이 한 번 싸운  적이 있는데, 형인 엽장청이

졌지. 그 후 화산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

는데, 아마 이 책은 그때 쓴 것일게야.  그럼 이 책도 태청수단진결

에 비해 결코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책인 셈이다. 특히  네게는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해. 바라기로는 네 방에 있는 나머지 책들이 그냥

있었으면 하는데 말이다. 그럼 우리 일도 한결 쉬워질거고…."

나중 말은 거의 혼잣말처럼 입속으로 했기 때문에  용유진은 듣기

가 매우 어려웠다. 들었어도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겠지만. 허신은

하늘을 보았다. 새벽기운은 스러지고 동쪽  하늘부터 환하게 밝아오

고 있었다. 허신은 고민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투덜거렸다.

"시간이 너무 없군. 간단한 이야기밖에 못하겠다. 자,  여기 앉아

라."

용유진은 허신이 가리킨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허신은 검법요

결을 소매에 다시 집어넣고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전에도 말했듯이 난 무공이라고는 조금도 익혀본 적이 없는 사람

이다. 이런 내가 네게 무공을 전해주겠다고 했을  때는 나름대로 계

산이 있었지. 그 계산의 첫  번째 부분은 바로 몸을  만드는 것이었

다. 최고의 무공을 익힐 수 있는 몸, 최강의 인간이  될 수 있는 몸

을 만드는 것이지. 그걸 나는 옥로진기로 해결하려 했다. 그런데 너

는 계획대로 옥로진기를  전수받았을 뿐 아니라  이제 태청강기까지

얻은거야. 어쩌면 고루마공도 네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세 가지면

몸을 만들기엔 충분하고도 넘치는 것이지."

허신은 나뭇가지를 주워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옥로진기가 방중술에서 나왔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된다. 내가 알

기로는, 그리고 여태 조사한 바로는 몸을 보호하고 정(精)을 기르는

데에는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어. 이른바 '향기를 먹  속에 가두니

그 향기 천년이 가도 변치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옥로진기를 이르

는 말이야. 원래는 채음보양(採陰補陽), 채양보음(採陽補陰)을 통해

진기를 모은 다음에 이것을  몸 속에 깊이 가라앉혀  자신의 힘으로

만든다는 식으로 속성하는 것이 옥로진기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

왔겠지만, 굳이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본신의  진기를 모으고 관

리하는 데에 탁월한 효용이 있다는 거다. 거기에 태청진기가 덧붙여

지면 어떻게 될지 보자."

그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그 안에 하나의 원을 그려 넣었다. 옥

로진기로 생성된 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태청강기를 수련하는 단계는 '연정화기(練精化氣),  연기화신(練

氣化神), 연신환허(練神還虛)'로 이루어진 모양인데, 옥로진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중에서도 연정화기의 부분이다. 정을 단련하여 기를

쌓는 부분에 대해서는 옥로진기 따라갈만한 것이 없지. 하지만 나머

지 부분, 즉 기를 쌓아 신을 양성하고,  신을 단련하여 궁극의 경지

로 돌아가는 것은 옥로진기로는 어렵지. 정(精), 기(氣), 신(神) 삼

보(三寶)를 강화하고 서로 조화시키는 것에는 이 태청강기만한 것이

또 없다는 것이다. 옥로진기로 기를 모으고,  태청강기로 조화를 이

룩한 다음 하늘 아래 가장 강하다는 천강의 힘을 고루마공으로 발휘

하는 것이다. 어떠냐?"

"말씀은 좋지만 그게 과연 제 힘으로 될까요?"

허신은 나뭇가지로 그리던 그림을 그어 지운 다음 발로 완전히 뭉

개며 히죽 웃었다.

"나도 모르지. 이론 상  그렇다는 얘기다. 그걸 실제로  구현하는

게 네 일이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되도록 빨리 해야 한

다는 거다. 여태까지 여기 동창 안은 네게 좋은 피신처가 되어 주었

다. 다른 세력의 감시자들이 들어올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달라졌다. 동창을 집으로 하는 감시자들이 이제 네게서  한 시도 눈

을 떼지 않을거야. 우리가 만나는 것도 앞으로는 극도로 조심해야겠

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공수련이다."

그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어가며 말을 이었다.

"기공을 수련하면 일정 단계에  들어가서 반드시 그 표시가  나기

마련이다. 태양혈(太陽穴)이 솟는다거나 단전에서  무언가가 만져진

다거나 하는 것이지. 이게 놈들의 눈에 띄면 끝장이야. 놈들은 반드

시 너를 방해하려고 할거다. 그러니 놈들의 눈에 띄기 전에, 속성으

로 그 단계를 뛰어넘어 겉으로 기공을 익힌  흔적이 안 나타나는 반

박귀진(返撲歸眞)의 단계로 들어가야 하는거다.  옥로진기만 익혀선

이게 안되지. 태청강기로도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고루마공의 비

밀까지 푼다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단번에 너를 끌어올려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허신은 다시 웃었다.

"어디까지나 짐작이고, 기대지만  말이야. 일단 시도는  해봐야겠

지?"

용유진으로서는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길이 그것

이라면 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신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용

유진이 따라 일어섰다. 허신이 말했다.

"태청수단진결은 읽고 외워라. 그리고 태워버려. 그걸  익히는 건

…, 음… 조만간 기회를 만들어서 하기로 하자. 어쨌든 계획대로 되

면 일단 몸을 만들 기본은 되는 셈이다. 그  다음엔 제대로 몸을 만

들어야지."

"그러고도 계속 몸을 만들어야 합니까?"

"물론이지. 내외겸수(內外兼修)라는 말이 있지.  무공을 익히는데

내가만, 혹은 외공만 들입다 익히는 것은 반쪽짜리 몸을 만들겠다는

거나 다름없는 어리석은 일이야. 내가를 익히면서 한 편으로는 외적

인 단련도 하는거다. 그런데 너 손가락 단련은 끝났나?"

"취타십팔방을 마저 익혀야겠지만, 일단 기본은 한 것 같습니다."

"착각하면 안된다. 네가 여태 손가락을 단련한 것은  약점을 보충

한거지, 아직 제대로 단련한 게 아니야."

"제대로 단련하는 건 뭡니까?"

"권각술을 익혀야지. 권각술과 보법, 경신술까지 익히면  그때 비

로소 몸을 만들었다 할 수 있겠지."

허신은 용유진의 발을 보며 물었다.

"근데 너 그 발로 보법은 밟을 수 있겠느냐?  원래 발톱을 뽑히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것이 상례인데, 너는 씩씩하게  잘 돌아 다니

는 걸 보니 조금 신기하다만, 보법까진 무리 아닐까?"

용유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제 발톱은 멀쩡합니다. 사부님."

허신은 눈을 크게 떴다.

"전에 분명히 발톱을 뽑혔다고…?"

"뽑혔다고 한 적은 없지요. 손톱을 뽑는 놈들이 발톱은 그냥 뒀겠

느냐고 물었을 뿐이지 뽑혔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 멀쩡하단 말이냐?"

"바빴는지 그냥 두더군요."

허신은 쓴 웃음을 지었다.

"교활한 녀석, 나까지 속이다니…, 하여간 다행한 일이다. 시간이

절약되겠구나."

허신은 다시 용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정말 운이 좋은 녀석이다. 마침 필요한 것을 배울 수 있게 되

었어. 조비홍이 지장전으로 가도 좋다고 했다면서?"

"지장전은 뭡니까? 그리고 이 철패는 뭐고요?"

조비홍에게서 받은 철패는 둥근  바탕에 표범 한 마리가  양각(陽

刻)된 것이었다. 뒷면에는 '구백구십구(九百九十九)'라는 숫자가 새

겨져 있었다.

허신은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려주고는 말했다.

"가보면 알지."

철패는 동창의 정식 위사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정확하게는 일천

명의 번역 중 하나가 되었다는 자격을 증명해주는 신표였다. 그것이

있어야 지장전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유진에게는

지장전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지장전은 바로 동창의 무공수

련장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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