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31화 (31/37)

2.

문제의 계집애, 공손영령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칠흑같이 어

두운 그믐밤의 숲을 여러 구의 강시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십이천

강시(十二天 屍), 강시당을 수호하는 열두 호법중 살아남은 일곱과

함께, 그들이 결코 빼앗겨서는 안될 한 가지 물건을 짊어지고 온 밤

내내 도주하고 있는 것이다.

강시가 두 발을 모아 겅중겅중  뛰는 것과 같은 모양을  연출하는

개로보는 원래 속도를 내기 위해서, 혹은 예측불가의 방향으로 움직

여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보법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실

공격형의 보법이었다.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적의 기세를 꺾고,

적과의 거리를 한 달음에 좁혀 버림으로서  생각하지 못하는 방향에

서 예측하지 못하는 공격을 가해 일격에 적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보

법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보법으로 도주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피곤

한 일이었다. 한 걸음을 뛸 때마다 대단히 큰 동작을 취하기 때문에

은밀한 행동을 하기 어려울뿐 아니라 소모되는 공력 또한 적지 않았

다. 게다가 그중 한 사람, 바로 공손영령의 등에는 흔들려서는 안되

는 물건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두 발을 거의 땅에 붙이지 않

고 육지비행(陸地飛行)에 가까운 동작으로 날 듯이 달려야 했다. 일

부이긴 하지만 고루마공의 정통을 이어 가장  공력이 뛰어난 그녀였

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뛸 순 없었다. 자연 자주 쉬어야 했고, 그래

서 추적자들은 매번 그들을 놓칠 듯하면서도 끝끝내 따라붙었다.

허공에 독수리가 홰를 치듯  요란한 소리가 퍼지더니  공손영령과

일곱 강시의 앞으로 세 사내가,  아니 세 개의 사람  모양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사내인지 혹은 여자인지, 심지어 사람인지조

차 못 알아볼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은빛 번뜩이는 해골 바가지를 얼

굴에 뒤집어 쓰고 검은 옷을 입었는데, 그  옷에조차 앙상한 늑골들

과 척추를 그려 놓았다. 심지어 팔과 다리에도  뼈다귀 하나씩 달랑

그려놓아서 어두운 숲에서 보면 뼈만 남은 시체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들의 가슴에는  숫자가 적혀있었고, 들고있는  무기 또한

제각각이라 그나마 서로를 구별할 수 있었다.  가장 왼쪽부터 도끼,

창, 낫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손영령과 일곱 강시는 그들을 보고서도 멈추지 않았다. 일곱 강

시중 세 강시가 각각 하나의 은고루(銀 ?)를  향해 달려나가는 것

과 동시에 공손영령과 나머지 네 강시는 옆으로  퍼져 우회했다. 그

들이 여태 포위망을 돌파한 전략이 그것이었다. 한  무리의 적을 만

날 때마다 하나씩, 둘씩 천강시를 떨어뜨려 놓고 달려온 것이다. 뒤

에 남은 강시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확인하지도 않았다. 운이 좋은

자들은 살아남았을 것이다. 살아남아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려오다가,

다시 새로운 적을 맞아 싸우고, 그러다가 쓰러졌을 것이다. 이 자리

에 없는 다섯 천강시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은 남은 강시들과 공손영

령이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강력한 증거였다. 그렇지 않

았다면 근 한 달여를 이렇게 쫓겨 다닐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어제까지, 그리고 아까까지 그들을

막은 고루들은 붉은 빛 해골들, 즉 혈고루(血 ?)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은고루, 올해 갑자기 나타나 강시당을  괴롭히고, 결국엔 본

거지를 떠나 도망다니게 만든 고루방( ? )의 고수들이었다.

세 은고루와 천강시들이 정면으로 격돌했다. 강철처럼, 아니 강철

보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단련된 천강시들의  팔이 은고루들의 무기

와 격돌했다. 그리고 쇳소리를 내며 퉁겨졌다.  강시들이 동시에 뒤

로 몇 걸음씩 통통 튀며 물러났다. 은고루들이 혹은 주춤거리고, 혹

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듯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꼴같지

않게 멋을 부려 묶은 피풍들이 바람에 날리고,  허공에서 독수리 날

개짓 하는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서슬 퍼런 도끼날이 제 칠(七) 천강시의 머리를  찍었다. 칠 천강

시의 팔뚝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도끼는 그 팔뚝과 칠 천강시의 머

리를 같이 바스러뜨리며 떨어져서 어깨 깊숙히 꽂혀들어갔다.

피가 튀었다. 분수처럼 솟구쳤다. 겉은 강시였지만 속은  전혀 강

시가 아닌, 숨을 쉬고,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때로는 손주의 재롱

을 보며 웃기도 하던,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강시당의  한 식솔이 완

전한 시체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아아악-!"

비명은 공손영령의 입에서 나왔다. 그녀는 나무가지를  밟고 뛰어

오르다가 제 칠 천강시의 죽음을 보고  공중에서 반전(反轉)하여 도

끼의 은고루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제  일, 제 이 천강시의

동작이 더욱 빨랐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팔을 뻗어 공

손영령의 옆구리를 움켜 쥐고 공중으로 던졌다. 제  삼, 제 사의 천

강시가 그 뒤를 따랐다. 제 일, 제 이의 천강시는 도끼를 든 은고루

를 향해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고, 공손영령과 두 천강시는 나뭇가지

를 밟고 뛰었다. 어미 잃은 새처럼 슬프게  날아 올랐다. 하지만 새

들도 멀리 가진 못했다. 그들의 앞에는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누구

보다도 무서운 적, 생명을 아끼지 않는 적들이었다.

그들은 고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무 위로 솟구치듯 올라와서 공손영령

과 두 천강시의 품으로 뛰어들 듯이 그렇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손

에 칼 한자루씩을 쥐고 있었지만 공중에서 자세를 잡고 휘두를 능력

도 없었기 때문에 단지 몸과 함께 내뻗은  것뿐이었다. 마치 누군가

가 그들을 잡아 던진 것럼 칼을 앞으로  내밀고 날아들었다. 공손영

령과 두 천강시는 팔다리를  휘둘러 그들을 향해 달려든  이 무모한

날파리들을 터뜨려 버렸다. 그러나  공중에서 길을 막힌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날개  꺾인 새처럼 다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앞에 수십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방금까지  풀숲에 엎드려 있

던 자들이었다.

놀란 것은 그 그림자들 사이에 엎드려있던  중주사견이었다. 그들

은 주위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주의를 기울인다고

했는데, 귀까지 쫑긋거려가며 주변을 탐색했는데, 물경 수십에 달하

는 그림자들이 그들의 바로 옆에, 발치에, 머리 언저리에 숨어 있었

던 것이다.

"니미, 이것들이 누구 놀리나!"

놀림을 당한 기분에 황구이가 성질을  못참고 걸게 한 마디  뱉었

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두들겼다.  감촉으로 보아 강철

막대기임에 분명한 무엇인가로 머리가 빠개지도록 강하게 두들긴 것

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시끄러!"

황구이는 정수리에서 이마로, 이마에서 다시 뺨을  통해서 입가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를 혀를  내밀어 핥았다. 짭짤한  것은 땀과

같지만 그보다는 진한 액체, 피였다. 그것도  고귀하신 마교 이교주

인 자신의 피였다. 그는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치워!"

"뭐?"

"그 막대기 치우라고!"

뒤에 있는 사내는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딱딱한 어조로  말을 받

았다.

"못 치우겠다면?"

"치우라고 했잖아! 니미!"

황구이가 몸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외팔로

는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서있던 강철 막대의

사내는 그의 생각보다도 훨씬 고수였다. 그는 돌아서는 황구이의 입

을 발로 걷어차 부숴버리면서 강철막대, 사실은 강철의 창으로 황구

이의 도끼든 손을 꿰뚫어 버렸다. 황구이는 땅바닥에 납작 박혀버린

신세가 되었다. 강철 창을 든 사내, 생사교  제 사 호교령인 독각토

(獨角兎)는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창을  빼서 황구이의 머리통을

후려 갈겼다.

"치우라고? 그래 치워주마, 치워줘!"

한 대, 두 대, 세 대, 그리고 다섯 대가 되자 황구이의 머리는 박

살이 나버렸다. 눈알이 튀어 나오고, 두  개골은 부숴진 바가지처럼

되어 그 속에서 뇌수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그제야 독각토, 이 흉

악한 토끼는 물러서서 중얼거렸다.

"개들은 가끔 이렇게 패줘야 정신을 차리지."

"좀 심하게 팼군요. 물어볼 게 많은데…."

무면호였다. 그는 예전과 달리 시꺼먼 안색을 해서는 그림자 사이

에서 나타났다. 언젠가 한  번 적중산과 위류향에게  당해 죽었다가

살아난 대가로 얼굴이 그 모양이 된 것이었다.

"아냐, 이 정도로 패야 다른 개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그러나 본보기를 본 개들은 형제의 무참한 주검을 보고도 별로 배

운 게 없는 모양, 인상만 쓸뿐 두려워  하는 빛이 없었다. 독각토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간이 입밖으로 튀어나왔나…."

그때 공손영령이 말했다.

"바쁘신 모양인데 우린 이만 가도 좋을까요?"

누군가가 혀를 찼다.

"봐라, 너희들이 엉뚱한 짓을 하니 손님이 화를 내시잖으냐."

그는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낡은

피풍에 손을 감싼 천, 작대기처럼 땅에 그림이나  그리고 있지만 기

실 무림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 중의 하나로  분류되는 귀왕자. 그는

생사판이었다.

중주사견의 검둥이, 점박이가 단번에 창백해져서 흰둥이와  한 배

에서 나온 새끼처럼 되어 버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

생사판은 그들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희 네 마리와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지."

그는 공손영령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뒤쪽을 가리켰다.

"무거울 텐데 내려놓고 이야기 하지?"

공손영령은 아무 말없이 등에 진 물건, 검게  칠해진 관(棺)을 내

려놓았다.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되는 물건, 추적자들이 꼭 빼앗으려

고 달려드는 물건이 바로 그 관이었던 것이다.  생사판은 다시 공손

영령의 뒤를 가리켰다.

"저 친구들을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길을 막았지."

공손영령은 뒤를 돌아 보았다. 나무로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병장기 부딪는 소리가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어느쪽인가가 점점 밀

리고 있는 것이다. 공손영령은 설마 제 일, 제 이의 천강시 마저 당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들마저 당한다면 강시당에

는 더 이상 희망이 남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제

일 천강시와 제 이 천강시의 시체를 보지않기  위해 지금 그녀는 세

명을 제외한 누구와도 타협을 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지금 그녀의

앞에 선 이 사람은 그 세명 중 하나였다.

"요구하는 게 있겠죠?"

"저걸 주거나, 아니면 그 속에 있는 분과 이야기를 하고싶군."

"단지 이야기만?"

"아니라는 건 공손소저가 더 잘 알지 않는가."

"물론 알죠. 그래서 안되는거죠."

생사판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별로 실망한 기색이 없었다. 그러

나 포기도 하지 않았다.

"소저가 거부할 처지는 아닌 듯한데…."

거부할 처지가 아니다. 공손영령은 지금 이 순간 그렇게  되어 버

렸다. 그녀의 뒤쪽으로부터 나뭇잎들이 폭발하듯  날려오더니 그 자

리에 금빛 빛나는 고루 두 개가 나타났다. 금고루(金 ?)들의 출현

이었다. 고루방의 쌍두방주(雙頭幇主)가 나타난 것이다. 옆구리에는

제 일, 제 이 천강시의 처참한 유해를 끼고.

공손영령은 입을 벌렸다. 그러나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비명을 지를 때가 아니라 피를 흘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

배했던 것이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눈을  깜박였다. 나오려던 눈물

이 다시 들어갔다. 그녀의 옷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발밑의 땅이 회

오리 바람에 휩싸인 듯 날아올랐다. 그녀의 전신에서 검은 안개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푸른 섬광을 뿜어내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낮게, 그러나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중얼거렸다.

"강시당의 진정한 힘이 누구에게 있나 보여주겠다."

제 삼, 사의 천강시가 관 주변을 지켰다. 공손영령의 발이 허공으

로 떠올랐다. 나뭇잎들이 우수수 소리를 냈다. 공손영령은 금고루들

에게 덮쳐가고 있었다. 금고루들이 슬쩍 자리를  옮기고, 은고루 셋

이 튀어나와 공손영령을 막았다. 아까의 도끼와 창, 낫이었다.

도끼는 가슴으로 박혀가고, 창은 목을 찔렀다. 낫은 아래에서부터

걷어 올리듯 하는 동작으로  공손영령의 허공에 뜬  발목을 노렸다.

웬만한 경지에 다다른 무림인이라면 약속하지  않았어도 어느정도의

협공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 이들이  그랬다. 사승(師承)도, 무공도

공통되는 바가 없다는 것이 확연히 보였지만 지금 그들은 제법 제대

로 된 합격술(合擊術)을 펼치고 있었다.  공손영령에게는 소용이 없

었지만.

도끼가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퉁겨 나갔다. 그 임자는  찢어진 호

구를 붙잡고 비칠비칠 물러나고 있었다. 그는 한  순간 두터운 철판

을 맨손으로 후려친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실제로 철판을 두들

겼어도 그렇게는 안됐을 것인데, 그의 도끼는 허공으로 날려가 버렸

던 것이다.

낫은 공손영령의 발목을 자른다는, 적어도 그  진행방향을 막는다

는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발에 걸려 끌려갔다.

그리고 내지른 공손영령의 발  끝에 걸려 그 임자의  머리가 박살나

버렸다.

창은 백련정강(百鍊精鋼)으로 만들어진  튼튼한 것이었으나  지금

낭창한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것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강철도 뚫을

수 있다고 자랑하던 그 날카로운 창날은 분명 공손영령의 턱밑 부드

러운 살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역으로 창대

에 가공할만한 압력을 전달하고 있었다. 창대가 반월처럼 휘어지고,

안간힘을 쓰며 지탱하고 있던  은고루의 발밑이 깊이  파였다. 그의

앙상한 백골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에 금고루 하나가 창의 중동을 잡

았다. 그 순간 창은 다시 천천히 펴지기 시작했다. 공손영령은 허공

에서 팔을 내밀어 창을 쳤다. 강철의 창대가  마른나무 가지처럼 부

러져 나갔다. 은고루가 내밀던 힘을 감당 못해  앞으로 주춤주춤 나

서다가 공손영령의 내민 손에 걸렸다. 그는 턱부터  잡혀 위로 들어

올려졌다. 공손영령의 굳게 손이 쥐어졌다. 목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밤 공기를 뒤틀어 놓았다.

금고루가 창의 손잡이부터 남은 반을 휘둘러  공손영령을 때렸다.

공손영령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창을 막아갔다. 쇳소리가 터져 나왔

다. 공손영령의 손에 걸린 창끝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떨어졌다. 다

시 휘두르고 막고, 창은 공손영령의 손에 걸릴  때마다 조금씩 짧아

져서 끝내 단봉만한 길이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금고루의

진짜 절기가 발휘되었다. 손을 권(拳)도 아니고 장(掌)도 아니게 엉

거주춤 쥐더니 가슴 앞에서부터  반원을 그리고 앞으로  뻗었다. 그

손이 가리키는 곳은 공손영령의 가슴. 허공에 시늉만 했을뿐 닿지도

않았는데 공손영령의 동작이 순간 멈추었다가 뒤로 퉁겨나갔다.

공손영령은 땅에 내려서서 입을  벌렸다. 한 모금 핏물이  뱉어졌

다. 그녀는 들고 있던 은고루를 땅에 던지고 입술을 닦았다.

"반야진기(般若眞氣)! 당신은…."

뒷 말은 생사판이 했다.

"곤륜(崑崙)의 파문장로(破門長老) 종리극(鍾里極)이겠지. 고루마

공에 대항할 정도의 반야진기를 익힌 자는  곤륜에서도 그밖에는 없

다고 들었다. 그런 자가 해골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나오다니. 재미

있는 일 아닌가."

금고루는 자신의 주먹을 힐끗 내려다 보더니 생사판을  향해 흔들

었다.

"고루마공이 강기무공( 氣武功) 중에 제일도 아니고,  천하에 구

대극품기공 말고 기공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곤륜이  문을 열면 그따

위 쭉정이들은 숨을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런 소릴 하다가 쫓겨났지?"

금고루는 멈칫 하더니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파문 당한 정확

한 이유는 비전의 절기, 반야진기를  훔쳐내었다는 것이었지만 그것

은 결국 앞서 말한 그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일이었으니 생사판의

지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 덕분에 자유를 얻었지."

"자유? 그래서 얻은 자유라는 게 고목의 부하가 되는 것이었나?"

금고루는 이번에야 말로 동요를 겉에 드러내었다.

"부하라니, 헛소리를 하는군!"

"그럼 아닌가? 네 정도의 인물을 돈으로 묶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

고목밖에 없다고 보았는데, 아니었나?"

생사판은 쭈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공손영령이

버린 은고루의 시체를 발끝으로 건드려 복면을 벗겨내었다.

"봐, 이자도 요동(遼東) 일대에서 한다하는 낭인(浪人), 요동혈겸

(遼東血鎌) 아닌가. 아까 저 도끼 든 놈은 옥문관 일대에서 기침 깨

나 했던 풍마부(風磨斧)고, 창든 녀석은 동영(東瀛) 출신 왜놈 창잡

이, 일품창(一品槍)이지. 하나같이 낭인으로 굴러먹던  놈들이 웬일

로 고루방이라고 단체까지 만들고 강시당을  노리지? 강시와 고루가

비슷해서 무림동도들에게 혼란을 주므로 하나를 정리한다…. 싸우는

이유 치고는 웃기는 것 아닌가."

공손영령이 이를 갈았다. 몇 달 전부터 끈질기게 강시당을 괴롭혔

고, 이번에도 제일 열심히 따라온 자들이  고루방이었었다. 왜 그러

나 했더니 결국 그 배후에는 고목의 사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고목 밖에는 없지. 돈밖에 없는 놈. 직접  나서서 싸우기에는 뒤

가 구리니까 낭인들을  모아 대신 싸우게  한것이지. 고루방이라…,

이름 짓는 감각이 참 촌스럽기도 하다. 강시당도  웃기지만 그건 옛

날에 지은 것이니 용서할 수나 있지."

여태 침묵을 지키던 제 이의 금고루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사교는 썩 좋은 이름이기나 하고 그런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혹세무민(惑世誣民)이나 하는데는 몰라도 진리를 밝히는  데에는 아

무 도움도 안되는 이름 아닌가."

생사판이 잠시 주춤했다가 살기를 뿜어냈다. 말의  내용때문이 아

니라 그 목소리때문이었다.

"재미있군. 낭인들이나 보낸줄  알았더니 고목,  네 놈도  나섰던

가?"

금고루가 해골바가지를 벗었다.  밤인데도 잠시 밝아지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밝은 머리, 일승 고목대사였다.

"돈이 모자라서 직접 나섰지. 알고보면 나도 돈밖에 없는 건 아니

란 말야. 오히려 돈이 모자라 허덕이는 사람에 가깝지."

"돈이야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고 하는 네놈이니까!"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여도 만족을 못하는 네놈 보다야 낫지!"

어린애같은 말다툼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물씬 살

기가 퍼져서 장내에 서있는 사람들을 질식시킬 듯 짙어졌다. 고목대

사가 손을 움직였다. 그 손은 직접 움직여 생사판을 치는 것이 아니

라 종리극을 앞으로 미는데 쓰였다.

"자네가 실력 좀 보이게."

종리극이 불평 한 마디  없이 소매를 걷어부치며 앞으로  나섰다.

싸움은 마다하지 않고, 자신도 있는 그였기 때문에  그 발길에는 망

설임이 없었다.

생사판이 고개를 까닥이자 무면호와 독각토가  나서더니 종리극의

양쪽으로 달려들었다. 종리극은 양  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고 뻗었

다. 곤륜비전 반야진기를 금룡대구식(金龍大九式)의 장법에 실어 보

낸 것이다. 무면호는 옆구리에 매달고  다니는 요도(腰刀)의 칼집을

왼손으로 치고, 그 반탄력으로 튀어나오는 칼을 오른손으로 잡아 빼

들었다. 그냥은 도저히 빠질 것같지 않던 긴  칼이 순간적으로 뽑혀

져서 반원을 그리며 종리극의 팔뚝을 베었다. 독각토는 황구이의 머

리를 부숴버린 철창을 던지듯 내밀어 종리극의 손바닥을 찔렀다. 종

리극은 어느쪽이든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이 공격들을 도외

시하고 무거운 물건을 밀 듯이 천천히 손을 내밀 뿐이었다.

무면호의 칼이 독사의 혀처럼 종리극의 팔을 핥고 지나갔다. 소매

자락이 한 자락 베어져 날렸다. 종리극의 팔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무면호는 맞지도 않았는데 충격을 받은 듯 피

를 토하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칼은

허공으로 날려갔다.

독각토는 그보다는 좀 나았다. 대기를 압축시키듯  압박해오는 종

리극의 손에 맞서서 굴하지  않고 창을 내밀었다.  그리고 종리극의

손바닥을 꿰뚫어 버렸다. 종리극은 무면호를  퉁겨버린 오른손을 돌

려 독각토의 가슴을 찍었다. 독각토 역시 종리극의  손을 꿰뚫은 창

을 놓고 쌍장으로 맞섰다.  그러나 창이 아닌  맨손으로는 종리극을

당할 수 없었다. 독각토의 양손이 부러져 나갔다. 그는 간단히 가슴

팍을 비워주고, 거기에 한 방을 맞았다.  아름드리 나무가 중동에서

부터 부러져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퍼졌다. 독각토는 가랑잎처럼 날

아 생사판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 순간 어느새  허공으로 떠올랐던

무면호가 날아 내렸다. 그의 손에는 아까 놓쳐 버린 칼이 들려 있었

고, 그 칼은 아까전부터  노리던 종리극의 오른쪽  팔뚝을 파고들었

다.

칵-!

무면호의 칼날은 종리극의 팔뚝에 절반쯤 박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무면호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종리극의 금빛 해골머리가 들이 박았다. 무면호는 역시 가랑

잎처럼 날려져 독각토의 옆에 들어 누웠다.

고목이 박수를 쳤다.

"좋아, 좋아. 돈값을 하는군!"

그러나 그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종리극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해골답지않게 우람한  그의 근육들

이 옷을 찢고 나올 듯이 부풀어 올랐다. 팔뚝에 박혀있던 칼이 부러

져 떨어지고, 손바닥의 창도 가시 뽑히듯  뽑혔다. 종리극은 짐승의

포효처럼 한 줄기 길게 외치더니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 앉았다. 그

의 손과 팔뚝으로부터 한줄기 붉은 빛이 비쳤다. 그 빛은 곧 분수처

럼 쏟아지는 핏물이 되었다. 종리극은 온몸의 피를  다 그렇게 쏟아

놓고는 흐물흐물한 가죽부대처럼 되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고목은 방금 떠올린 미소조차 채 거두지 못하고 섰다가 인상을 찡

그렸다.

"비겁한 놈들, 독을 썼군."

"그보다 비겁한 짓이라도 할수만 있으면 했을 놈이…."

"곤륜제일(崑崙第一)이라고 큰 소리 치더니 힘도 못  쓰고 가버리

는군. 돈이 아깝다."

고목은 아쉬운 듯 중얼거리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생사교 팔대 호교령 중 둘을 죽였으면 밑지는  장사는 아

니지?"

생사판의 어조는 담담했다.

"누굴 죽였다고?"

그의 발치에서 무면호와 독각토가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고목

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젠장! 역시 임시고용으로는 안되는건가?"

고목의 그 말이 신호인 듯 숲속에서 은고루 십여명이 걸어나와 복

면을 벗었다. 숲속이 잠시 화사해지는 것같았다. 피비린내가 가시고

지분 냄새가 그 자리를 메웠다. 은고루들은  하나같이 여인, 그것도

스물을 갓 넘기거나 아직 되지 않은 미녀들이었다.

"나찰십이방(羅刹十二房)이라고 하지. 내 첩들일세. 인사들 해라.

너희들 시동생이다."

생사판이 불쾌한 듯 침을 뱉었다.

"내가 언제 네 동생이 됐나."

"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될 수 있다는 얘기지. 늦으면 그 조차도

불가능할테니 잘 생각해봐."

"냄새나는 계집 몇 명 불러놓고는 위세가 대단하군.  이쪽도 없는

건 아니지."

생사판의 앞에 몇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고목은 고개를 끄덕였

다.

"과연, 팔대 호교령 중 나머지를 몽땅 데려왔단  말이지. 이번 일

에 아주 목숨을 걸었구나.  하지만 내 첩들에게는 못  미칠걸? 막내

야, 네가 실력을 좀 보여주려마."

나찰십이방이라 불린 여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제일  어려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날아갈 듯 인사를 하고는  눈웃음을 쳐가며 말

했다.

"십이매(十二妹)라 하옵니다. 특기는 맷돌 돌리기지요. 어느 분이

제 상대를 하시려는지?"

생사판이 눈살을 찌푸렸다.

"맷돌 돌리기?"

십이매는 허리를 요염하게 꿈틀거리며 엉덩이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요. 도련님부터 한 번 맛을 보시겠어요?"

생사판은 다시 침을 뱉었다.

"못 봐 주겠군. 쌍두사(雙頭蛇)!"

팔대 호교령중 하나가 나섰다. 그의 무기는 유성추(流星錐), 철못

이 박힌 추가 두 개 달려있는 기형병기였다.  십이매가 짐짓 몸서리

를 쳤다.

"어머, 전 기구 사용하는 건 싫은데, 게다가  저런 흉칙한 물건을

…! 본신의 물건에 별로 자신이 없으신가 보군요."

쌍두사는 머리 위로 유성추를 돌려 바람소리를 내며 말했다.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보여주지. 거기 누워라!"

십이매는 옷고름을 살며시 당겨 푸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살살 해 주세요."

주고받는 말은 지분 냄새  풍기는 기녀원에서나 오갈  말이었지만

살기는 점점 짙어져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였다. 그때 누군

가가 끼어들었다. 생사교도, 고목의 수하도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였

다.

"저런, 저런. 매춘(賣春)은  율령(律令)에 저촉되는 것이니  그만

두는게 좋겠어."

생사판과 고목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그들이  가장 꺼리는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상관대부였다.

상관대부, 조홍은 오늘도 가마를  타고 나타났다. 그러나  예전과

다르게 그 가마에는 가마꾼이 달려 있었고, 가마꾼  외에도 많은 수

하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것도 전원 동창의  위사들이었다. 수십 명

이 넘는 동창의 위사들이 장내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것도 하나같이 고수급의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고목과 생사판의 표

정에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서로를  견제하다가 제 삼의

세력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조홍은 기분 좋게 한 마디 덧

붙였다.

"참고로 말하지만 무기를 사용한 민간인의 싸움도  율령에 저촉되

지.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체포해야 하겠어."

"체포라…, 요즘 동창분들이 꽤 기세등등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우

리까지 체포할 수 있을진 모르겠군."

고목이 말하지 생사판이 덧붙였다.

"상관대부의 관직이 뭔지 계속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군."

"뭔데? 난 아직도 궁금한 걸?"

"내시. 고자라는 말이지."

상관대부는 화도 내지 않았다.

"나도 한 가지 들은 이야기가 있지. 생사판이  사기꾼이라는 이야

기. 마교의 후계자가 아니라면서? 천마불사공을 익힌게 아니라 독약

을 사용한다고 그러더군. 교도들이 알면 좋아 하겠지?"

그 말에 놀란 것은 생사판도, 그의 교도들도 아니고 중주사견이었

다. 그들만 아는 비밀, 높은 가격으로 거래하려고 했던 비밀이 너무

쉽게 나와 버리지 않았는가.

"그걸 어떻게?"

생사판이 눈썹을 꿈틀했다.

"버러지같은 것들을 잊고 있었군."

그는 한걸음 앞으로 내 디디면서 흑구삼을 걷어찼다. 간단한 발길

질로 보였는데 사실은 발  하나로 팔방을 제압해 피하려  해도 피할

곳이 없게 만드는 이상한 초식이었다. 흑구삼이 피하려 했지만 발은

어느새 그의 관자노리를 걷어차 버렸다. 흑구삼은 맥없이 쓰러져 칠

공(七孔)으로 피를 흘렸다.

백구말과 반구대가 급히 무기를 휘둘러 생사판을  협공했다. 그러

나 그건 아이가 어른에게 덤비는 것과 같은  무모한 짓이었다. 생사

판은 귀왕자를 휘둘러 반구대의 손을 때려  떨구어놓고 백구말의 심

장을 찔렀다. 그리고 돌아서며 반구대의 목을  꿰뚫어 버렸다. 반구

대는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바둥거리다가 쓰러져 버렸다. 한 사람

당 일초씩, 더도 덜도 아닌 삼초만에 중주사견은  모두 시체가 되어

버렸다.

상관대부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훌륭한 솜씨!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확하게 사람을 죽이는군. 이

걸로 자네에겐 살인죄도 추가일세. 증인이 이렇게 많으니 따로 물증

도 필요 없겠군. 위당두, 살인죄엔 어떤 벌이 있나?"

위당두, 천자조장을 내놓고 이급 당두로 올라선  위류향이 대답했

다.

"당연 사형입니다."

상관대부는 복창하듯 말했다.

"사형이라는군."

고목이 투덜거렸다.

"놀고있네."

그는 생사판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동창 위사분들이 아무리 무서워도 생사교 분들은 두려워 않겠지?

황송하지만 우리 아이들도 그렇다네."

동창에 대항해 협력을 하자는 이야기였다. 생사판이  거절할 이유

가 없었다.

"일단 관헌분들은 보내 놓고 다시 물건의 처리방법을 이야기 해볼

까?"

"물건! 그래, 그게 있었지."

상관대부는 홀을 들어 머리를 두들겼다.

"우리끼리 이게 무슨 짓인가. 물건을 쥔 사람은 줄 생각도 않는데

…, 어부 앞에서 물고기끼리 싸울뻔 했군 그래."

고목과 생사판은 시선을 교환하고 입가에 비웃음을  흘렸다. 그들

이 협력할 뜻을 보이자 바로 태도가 달라지는 상관대부에 대한 비웃

음이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최강의 세력은 상관대부의 동창이었다.

그러나 고목과 생사판이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한다면  그들도 꼭 이

긴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 계산이  너무 뻔하게 들어왔지

만 싸워서 좋을 것은 그들에게도 없었다. 오늘의 목표는 강시당이지

그들 서로가 아닌 것이다.

"우선 물건을 확인해야겠지? 보통 물건이 아니니 말이지."

고목, 생사판, 상관대부의 시선이 공손영령이 내려놓은 관에 모였

다. 공손영령은 그들끼리의 싸움을 기대하고 있다가 싱겁게 끝나고,

결국 그녀에게로 다시 표적이 옮겨지자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여러분이 저희 할아버님께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래요.

여기 이 관 안에서 쉬고 계세요. 하지만 지금 여러분을 접견하실 순

없겠군요. 주무시고 계시니까요."

그녀가 짊어지고 온 관에는 그녀의 할아버지, 공손조덕이 누워 있

었던 것이다.

고목과 생사판, 상관대부는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고목이  대표

격으로 말했다.

"우리는 소저의 할아버지에게 몇 마디 묻고싶은게 있을 뿐이니 미

안하지만 좀 깨워 줬으면 좋겠군"

"거절합니다."

고목은 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소저에게는 거부권이 없어.  우린 보고싶은 걸  보는

사람일세."

공손영령은 고목의 들어올린 손가락에  금빛 광채가 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 손가락과 관을 연결하는  일직선 상의 가운데로

위치를 옮겼다. 고목이 지풍을 사용해 관을 부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역시, 거절합니다."

"거부권이 주어지지 않았대도 그러네."

이번에 말한 사람은 상관대부였다.  그도 얼마든지 관을 부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공손영령은 곤경에 처했다. 그녀와 세

천강시의 힘으로는 관을 지킬  수가 없었다. 거기에  생사판이 말을

보탰다. 결정적으로 힘이 빠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강시당의 잔여 식솔들이 어디 있다고 했지?"

대답한 것은 또 하나의 호교령, 통비원(通臂猿)이었다.

"융중(隆仲)에 있는 것을 교도들이 보고해 왔었습니다."

강시당의 잔여식솔들, 무공을 모르는 노약자와 어린애들을 융중에

피신시켜 뒀는데, 그것이 생사교에 의해 발각된 것이다. 공손영령은

이제야 말로 포기하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다른 어느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녀의 옆에서 일어난 것이다. 공손조덕이었다.

"누가 우리 손녀를 핍박하는가?"

관두껑이 스르르 열리고, 뼈마디  앙상한 손이 그 관두껑을  밀며

나타났다. 그리고 공손조덕이 관에 일어나 앉았다. 온 몸엔 검은 수

의를 걸치고, 얼굴에는 부적을 붙여 그 또한 한 구의 강시처럼 보였

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들 그것이  공손조덕의 갑옷이요, 무복이

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크게 한 번 피를  보려고 할 때 공손조덕이

저렇게 차리고 나선다는 것을 고목도, 생사판도, 상관대부도 뼈저리

게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더욱 두려워 하는 것은 공손조덕의

손에 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기는 것이었다.  그가 무리해서 죽

으면 고루마공에 당한 상처를  치유할 길이 없다는 것이  더 두려웠

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질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는 상황이 그들

을 진정 곤란하게 하는  것이다. 다행히 공손조덕에게도  싸울 뜻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관에 앉아 밤 하늘을  우러러 보며 중얼거리

고 있었다.

"오늘 밤은 달이 없어. 싸울 기운이 나지 않는군."

고목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싸울 이유도 없지. 자네가 말만 해주면…."

"그냥 물러날텐가?"

"아, 물론이지. 난 자네 손녀를 좋아해. 고루방도 당장 해체해 버

리지."

공손조덕은 싱긋이 웃었다. 궁하면 무슨 말을 못 할 것인가. 고목

이 유난히 말에 책임을 안 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그 한 마디로 고목의 입을 막아놓고 공손조덕은 말을 이었다.

"자네들과 다툰지도 이미 수십 년이 되었군. 난  지쳤네. 정말 지

쳤어."

쓸쓸함이 배어나오는 탄식같은 한 마디였다.

"용씨 아이에게 월인을 물려줬을 때 나는 정말 어떻게  결과가 나

와도 좋다는 심정으로 내기를  건 것이었지. 그  아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난 정말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어. 하지만 이제 죽기 전에

한 번 그 아이가 보고싶군. 잘 있는지, 얼마나 컸는지…."

상관대부가 불쑥 말했다.

"잘 있지. 크기도 많이 컸고.  그 또래 아이로는 출세도 한  셈이

지. 이대로 커나가서 우리 나이쯤 되면 정말 한 자리 하겠더군."

공손조덕은 웃었다.

"그 아이가 자네 밑으로 들어간 건 정말 나도  예상치 못했네. 그

나이 되도록 자네가 그냥  둔 것도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고  말이

야."

상관대부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나도 약속을 하면 지키는 사람이야."

그러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동습의 일

에 강시당의 일로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한지  몇 년이 되어가는 것

이다. 그는 이렇게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는  데에 두려움까지

느끼며 돌아가는대로 확인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공손조덕이 계속 말했다.

"그래서 자네들에게 제안을 한 가지 하겠네. 이제 곧 순천부로 가

서 그 아이를 만나지.  그 자리에서 자네들에게  치료법을 알려주겠

네. 아니, 아예 완쾌시켜 주지.  그 다음엔 자네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

"그 말이 진짠가?"

고목이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공손조덕이 표정을 굳혔다.

"신용 하나로 살아온 날세.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건가?"

"아니, 아니야!"

고목은 얼른 손을 저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말일세.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

지 모르겠군."

"의심할 수도 있겠지. 충분히 의심할만한 일일 수 있겠으나…."

공손조덕은 쓸쓸히 웃었다.

"십 년을 채워 기다리기에는 내 인내가 부족하여….  자네들이 봐

서 알겠지만 난 정말 한 달을 기다리기도 어려운 처지가 됐다네. 급

한 감은 있지만 내가 하던 일의 추이를 확인해 보고 싶어."

고목도, 생사판도, 상관대부도 그 말에 공손조덕을  다시 보았다.

그들은 알아볼 수 있었다. 공손조덕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공손

조덕의 얼굴에 깔린 죽음의 기운, 그 뒤에  서있는 저승사자의 모습

까지 보이는 것같았다.

상관대부가 문득 홀로 손바닥을 쳐 소리를 내었다.

"좋아, 시간은 안되었지만 이번 모임은 내가  준비하지. 자네들을

모두 순천부로 초대하겠네. 용가 꼬마도 나오게  하지. 공손 늙은이

는 꼬마를 확인하고, 우린 오랜 굴레에서 해방되는 거야. 그 시점에

서 다시 판을 짜서 놀기로 하지. 어떤가?"

고목과 생사판은 썩 좋은 눈치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순천

부는 상관대부의 영역인  것이다. 홍문연(鴻門宴)에 끌려가는  유방

(劉邦)의 심정이 아니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공손 강시

가 거기 가겠다는데에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목과 생사판은 고개

를 끄덕였다.

"즐거운 마음으로 초대를 기다리겠네."

고목이 먼저 떠나고, 상관대부도 사라졌다.  생사판은 친절하게도

자기가 죽인 시체, 즉 중주사견의 시체까지  들고서 떠나갔다. 공손

영령은 빈터에 앉아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유진까지 끌어들이시려고 하는 거예요."

공손조덕이 용유진까지 끌어들여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원망하는

말이었다. 공손조덕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그는 천천히 관속으로 다시 누웠다. 잠깐이지만 태연한 신색을 유

지하느라고 적잖이 힘을 썼던 것이다.  공손영령이 안타까운 표정으

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공손조덕은 미소를 지으러 애쓰며 말했다.

"그애에게서 월인의 힘을 일부분만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다면…,

그땐…, 적어도 저 셋 중에 둘은 내가 끌고 저승으로 가마. 그게 내

생각이다."

동귀어진(同歸於盡), 그것이 공손조덕의 마지막 계획이었다.

그 모습, 그 소리를 멀리  숨어 엿듣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웃음을 날려보내고 자리를 떴다.  '누구 마음대로' 라는

뜻의 비웃음이었다. 그바람에 그들은 공손조덕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이것으로 되었나? 죽은 열 명의 아이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을

했어."

생사판은 그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중주사견의

시체를 늘어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죽은 지  거의 한 시진이

되어가는데도 그 시체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생사판은 전혀 지

루함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필요하다면 그런 자세로 한 달

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제일 처음 죽

었던 황구이의 시체에서 처음으로 변화가 발견되었다. 죽을 때는 시

체가 식어감에 따라 창백하게 변하더니 지금은  창백한 안색에서 다

시 홍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두 개

골이 깨어져 뇌수가 흘러나왔는데도 다시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곧 이어 흑구삼이 살아났다. 내력에 두뇌가 진탕되어 죽었던 것이지

외상은 없었기 때문에 대단히 빠른 회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다음

은 목이 뚫려 죽었던  반구대, 마지막이 심장을  관통당한 백구말의

순서였다. 그렇게 두 시진이  걸려 모두 살아나자  생사판은 말문을

열었다.

"자, 이제 슬슬 이야기 해 볼까?"

죽었다 살아난 네 마리 개들은 생사판의 앞에  꿇어앉아서도 정신

을 차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뭐, 뭘…?"

생사판은 코웃음을 쳤다. 천마불사공의 위력을 잘 아는 그가 중주

사견이 일부러 멍청한 척 한다는 것을 못알아볼 정도로 바보는 아니

었다.

"내겐 인간을 괴롭히는 오백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열 가지는

시체도 일어나 말하게 하는 힘이 있지."

"글세 뭘 묻는지 알아야…."

생사판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일단 좀 패라. 그 다음에 이야기 하는 게 낫겠다."

그는 막 몽둥이를 들고 다가서는 수하들에게 한 마디 덧붙여 지시

했다.

"어지간히 때려선 죽지도 않을테니 좀 심하게 다루도록."

동녘에 떠오르는 해 아래로 중주사견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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