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32화 (32/37)

제16장: 용유진, 황태자를 경호하다.

1.

그는 상심한 사람처럼 창가에 서 있었다. 그 쓸쓸한 두 어깨를 보

고 용유진은 권력이 사람을 외롭지 않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을 했다. 제위(帝位)에 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는

지나치게 쓸쓸해 보이지 않는가. 시간만 가면 그  손에 중원 십팔주

(十八州)를 손아귀에 넣고  흔들 사람의 모습으로는  지나치게 슬퍼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황태자가 몸을 돌려 용유진을 바라볼 때, 용

유진은 방금 한 생각을 모두 버렸다. 그가 슬프고 외롭고 쓸쓸해 보

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마에 깊에  패인 주름살은 고민을

넘어 고통스럽게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

태자였고, 다음 시대의 천하를 짊어질 사람다워  보였다. 그의 눈에

는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할 힘과 의지가  드러나 보였다. 고통스러운

주름살 아래 강인하게 빛나는 눈, 이것이 황태자의 첫인상이었다.

"자네가 날 경호할 거라고?"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

"누구로부터 날 경호할텐가?"

용유진은 대답을 미루고 생각에 잠겼다. 쉽게 대답할 일은 아니었

다. 당금의 황제는 포악하지는 않지만 무능하고,  황음한 세월을 보

내면서도 수명이 긴데다 유달리  정력이 좋아 황후  말고도 비빈(妃

嬪)이 쉰 여섯이나 있었고, 그들을 통해 낳은  아이가 물경 일흔 여

덟이나 되었다. 그중에 황자(皇子)만 서른 네명이었다. 그중에 현재

의 황후가 낳은 황자는 두 명, 황태자와  이미 죽은 장왕, 보령군주

의 아버지였다. 황태자의 나이  이미 마흔 둘, 열  여섯에 황태자로

책봉된 이후 이십 육년이나 황태자로서만 살고 있었다. 늙어 죽지도

않는 황제와 나이 들어  여성의 기능을 상실한 채  쓸쓸히 늙어가는

황후를 부모로 모시고 그 또한 권력의 최고봉  한 발 앞에서 쓸쓸히

늙어가고 있었다.

황태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용유진은 잘 알지  못했다. 그

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알고있는 것은 황태자가 계속되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형제가 서른 셋이라는 것은 그를 죽이

고 싶어하는 자가 서른 셋이라는 말과 동의어이기도  했다. 물론 그

중 하나는 빼야 할 것이다. 이미 죽은 장왕은 죽었으니 그 대상에서

제외될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그의 편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자신 황태자를 노리는 암살시도에 대신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잠재적

인 암살자에서 제외되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로부터' 그를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은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를 믿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비

꼬느라고 한 말일 수도 있다. 그가  말하는 '누구로부터'는 '누구로

부터' 사주를 받고 왔느냐는 뜻일 수도 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서 '진정' 그를 지켜줄 생각인지 묻는 것일 수도 있다. 가능성은 작

지만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보고 믿어도 좋을  사람인지 보겠다는 뜻

일 수도 있다. 그보다는 가볍게 던진  비웃음일 가능성이 높지만….

중요한 것은 황태자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창의

위사, 그리고 허신을 중심으로 한  '번천지계'의 일원임을 황태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번천지계'에 동참해달라는 제의를 받았고,

그것에 대해 절반의 승낙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용유진에게 그는 '누구로부터' 그를 지킬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그

것은 그가 허신조차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

다.

용유진은 깊이 고민했다. 황태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이제 약

속을 해야 하고, 그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켜져야 할  약속일 것이

다. '번천지계'가 실패할 경우에도 그는 황태자를 지켜야 할지도 모

른다. 용유진은 단순한 위사가 아니라 뼛속  깊이 표사였으므로, 그

리고 표사의 임무 중에는 사람을 지키는 것도 있었으므로.

용유진은 천천히 대답했다.

"모든 것으로부터입니다. 황태자 전하."

"모든 것?"

"소관(小官)은 황태자 전하를 노리는 어떠한 사람으로부터도 황태

자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황태자는 가벼운 웃음을 날려 보내었다.

"건방진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능력이 모자라면 죽음으로 보충하겠습니다."

황태자는 이제 진정으로 경멸의 뜻을 나타내었다.

"난 원래 동창의 사람들을 믿지 않지만 죽는다는 말을  그렇게 함

부로 하는 걸 보면 정말 믿음이 가지 않는군.  자네가 죽으면 난 누

가 경호하지?"

용유진은 한 대 맞은 것같은 충격을 느끼고 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반드시 살아서 황태자 전하를 경호하

겠습니다."

"잘못을 쉽게 인정하는 걸  보면 조금 가능성은 있다고  봐야할까

…?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군. 가령 날 죽이려는  사람이 동창

사람이라면? 이를테면 조홍이 자네보고 비키라고  하면 어떻게 할건

가? 동창의 위사로서 직속 상관이 명령하는 거라면? 자네의 경호 임

무를 해제하고 역으로 나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준다면?"

용유진은 다시 침묵했다. 황태자는 지금 그를 매우 괴롭히고 있었

다. 아니, 다른 위사라면 매우 괴로워 할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그리 고민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조홍은 처음부터

그의 적이었고, 그런 상황이 된다면 당연히 그는  황태자를 위해 검

을 들어 조홍과 적대할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의  말대로 문제는 여

전히 남았다. 그것을 황태자가 확인시켜 주었다.

"조홍은 그렇다 치고 허신이 그런다면? 허신이 이제 내가 필요 없

다고 버리고 도망쳐 오라고 하면 어쩔텐가?"

용유진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황태자는 지금 그를 누군가의 하

수인으로밖에 보지 않고 있었다. 모든  의심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하

는 것이다. 용유진으로서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 자신으로

섰을 때야말로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이지  그 누군가가 또다른 누군

가의 하수인인 상태에서는 신용이라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 될 수밖

에 없는 것이다. 언제라도 그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칼을 돌릴 가능

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고, 그러므로 완

전한 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유진은 이제 그가 그 누군가의 하수인도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어야 했다.

조홍의 지배를 받는 동창  위사로서의 용유진이라는 껍질,  그 아래

허신의 제자로서 '번천지계'의 일원이라는 껍질을  깨고, 진정한 용

유진의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였다. 만약의 경우에는  동창 위사의

일도, 허신의 제자로서의 일도 팽개치고 황태자를 지킨다는 일을 최

우선으로 삼을 각오를 하고 대답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을 용유진은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동창의 위사로 보시고, 그렇게  대우 하신

다면 저는 동창의 위사로서 행동할 것입니다. 저를 번천지계의 일원

으로 보시고, 그렇게 대우하신다면 그렇게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그밖의 다른 것으로, 이를테면  저를 보표(保 )로 보아주신다

면 저는 보표로서 생각하고, 보표로서 행동할 것입니다."

황태자는 이 의외의 대답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보표라고…? 강호에 표사라는 직업이  있다더니 그걸 말하는  건

가? 왜 그 이름이 자네 입에서 나오지?"

"소관은 원래 표사 집안의 자식이었으며, 동창의 위사가  되기 전

에는 저 또한 표사였고, 앞으로 기회가 되면 다시 표사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표사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보게. 자네 자신에 대해서도."

이번 대답은 한 두 마디로 할 것이 아니었다. 용유진은 표사에 대

한 설명에 그 자신이 동창의 위사가 된  경위를 덧붙여 길게 설명을

했다. 황태자는 흥미있게 듣다가 빙긋 웃음을 흘렸다.

"보령군주가 재미있는 위사 하나를 봤다고 자랑하던데, 그게 자네

였군. 과연 재미 있네만 나는 자네를 믿어도  좋은 것일까? 나는 지

금까지 어떠한 동창의 사람도  믿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살았

지. 그런데 지금 자네를  보고 약간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네. 나의

이 의구심을 확신으로 바꾸어줄 그 무엇이 자네에게 있는가 하는 질

문이네."

용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손을 내 밀었다.

"불경한 말씀이오나 소관에게 은전(恩典)을 하사하여 주십시오."

황태자는 다시 이 의외의 태도에  흥미로워 하다가 손에 낀  반지

하나를 빼서 용유진의 손 위에 떨구었다. 용의  문양이 새겨진 위에

금강석이 박혀있는 반지였다.

"정확히 얼마나 나가는지는 모르지만 돈으로 바꾸어 쓰게. 그걸로

되었나?"

용유진은 반지를 받아 품속에 간직했다.

"물론 모자랍니다만 반년 치 선금으로 받겠습니다. 이제  보표 계

약은 성립되었으니 소관은 위험이 해소되었다고 판단될 때까지 보표

로서 행동하겠습니다. 나중에 소관이 임무를  잘 이행하였다고 판단

하시면 잔금을 계산해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황태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표사의 세계에서 신용은 목숨보다 더 가치있는  것으로 다루어집

니다. 동창의 위사로서 소관(小官)은 목숨을 걸고 황태자 전하를 경

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표로서 소인(小人)은 비룡표국

의 제 이대 국주로서 표국의 신용을 걸고 황태자 전하를 경호하겠습

니다. 이로써 황태자 전하께오서는 소인이 국주가 된 후 두 번째 일

을 맡기신 것입니다. 물론 소인은 이 일을 완수할 것입니다. 이후로

도 계속 영업을 하고싶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건다는 말보다는 신용을 건다는 말이 더  믿음직 스럽군.

그런데 선금이 모자라다고  했는데, 잔금은  얼마를 요구할  생각인

가?"

"매우 많이 주셔야 할 것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몸값은 그렇게 싸

지 않기 때문입니다."

황태자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불평을  말하고 있었

다.

"비싸군, 너무 비싸. 능력이  확인되지 않은 초보 표사에게  주는

대금 치고는 너무 비싸."

용유진은 깊이 읍을 했다.  이것으로 계약은 완전히 성립한  것이

다. 황태자의 방금 그 말은 그를 보표로  인정했다는 뜻으로 받아들

여졌기 때문이었다.

"잘 하신 선택이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황태자의 방을 물러나오는 그에게  황태자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

다.

"이번이 두 번째 일이라고 했는데, 첫 번째 일은 어찌 되었나?"

"물론 완수했습니다."

"두번째 일도 완수하길 바라네."

용유진은 다시 한 번  읍하고 물러나왔다. 보표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할 때였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믿을만한 수하를 고르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었다. 둘

다 간단하면서도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첫  번째 일이 어려웠

다. 가장 믿을만한 수하 양평중이 사실은 조비홍의 첩자, 내지는 내

통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자조의 열  명 모두가

그에게 충성을 하고, 그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황태자가 말한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도 조홍이 아니라 그

를 따를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아마도  절반쯤만 그를

따를 것이다. 만약  사부가 명령을 바꾼다면,  황태자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바꾸어 황태자를 희생시키라고 한다면,  그때는 모두가 등을

돌릴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다가오게 되면 믿을 것은 그 하나

뿐일 것이다. 그 자신을 제외한  아무도 진심으로 믿을 수  없는 상

황, 매우 열악한 환경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청부는 이미 받았고,

그는 그것을 이행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사부의  계산과는

약간 틀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진정한 번천지계의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밖에는 양평중과 아홉 천자조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식

으로 황태자 경호를 시작할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용유진은

손짓해서 양평중을 불렀다. 어찌되었든 믿을  사람은 양평중밖에 없

었다. 양평중이 다가왔다. 용유진은 양평중을 데리고 조원들의 시선

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참동안 침묵한채 서

성거렸다. 양평중은 그가 말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나

자 의아한 듯 먼저 입을 벌렸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용유진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

다. 한참만에야 고개를 들고 양평중을 향해 씩  웃어준 다음 잽싸게

그의 머리를 팔뚝과 옆구리 사이에 끼었다. 용유진은 양평중의 귀에

속삭였다.

"너 조첩형과 연애하지!"

양평중은 눈이 튀어나올만큼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용유진은 양

평중의 목을 조였다.

"빨리 불어!"

양평중의 눈이 다시 튀어나왔다. 놀라서가 아니라  숨이 막혀서였

다. 그는 혀를 빼물고 켁켁거렸다.

"농담하십니까? 제가 변탠줄 아세요? 제가 왜 환관하고 연애를 합

니까?"

"연애하는 게 아니면 왜 내 행동을 조첩형에게 보고하냔 말이다!"

양평중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터질 듯이 상기되어 핏줄까지 불거

져 나온 얼굴로 굳어져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너밖에 없잖아! 그걸 알만한  놈, 알아도 일러바칠 놈이  너밖에

없으니 네가 밀고범이지!"

"그런 엉터리가…!"

"아니라고 할테냐?"

"아니요, 제가 범인 맞습니다. 맞아요. 그러니 이 목좀…."

"밀고범 주제에 요구가 많군. 내가  이대로 네 목을 뽑아버릴  수

있을지 어떨지 내기 걸고싶지 않나?"

"켁켁, 이것 좀 놓고 말씀하세요. 케엑. 그런 내기는 안합니다."

"아냐, 넌 내기 해야 해.  싫어도 해. 왜냐면 지금 내가  네 목을

뽑아버릴테니까."

"켁켁, 그럼 제가 졌습니다. 뭐든지 요구하세요. 제가 졌어요."

"조첩형을 배반해라! 하겠나?"

"하겠습니다. 전 처음부터 조첩형의 부하는 아니니까요."

"동창도 배반해! 나 말고 누가 시켜도 듣지 말란 말이다."

"예, 그러겠습니다."

"내 사부님이 시켜도 안 들을거지?"

양평중이 다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어떻게 아셨지요? 아니, 아닙니다. 당두님 사부님이 누구세

요?"

용유진은 피식 웃었다.

"이미 늦었어. 넌 밀고범에다 이중 첩자였군. 점점  더 못 믿겠는

걸."

그는 양평중의 머리를 놓아주고 약간 떨어져서 기둥에  등을 기대

었다.

"기회를 주마. 칼을 뽑아 나를 베어라. 그러면 넌 사는거야."

양평중은 목을 움켜쥐고는 말했다.

"안 뽑으면 죽이겠다는 말씀이군요. 우린 적이 아니라는  걸 알고

게시는 겁니까?"

"지금부턴 적이 될지도 몰라."

"사부님을, 허 노사(老師)를 거역할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될지도 몰라. 지금부터 나는 개인적인 사업을  해야 하거

든."

"어떤 사업입니까?"

"표국업이다. 난 방금 황태자의 개인보표로 고용됐지."

"허 노사께서 황태자 전하를 암살이라도 하신다고  생각하는 겁니

까? 그렇게 사부를 못 믿으세요?"

"사부님을 믿지. 난 누구보다도 사부님을 믿고 있다. 믿으니까 이

러는거야. 사부님은 냉철한 데가 있으셔서  필요하다면 황태자 전하

보다 더한 사람도 암살할 수 있는 분이란 걸  잘 알지. 그러니 네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거다. 사부님이냐, 나냐? 어느쪽을 따를테냐?"

"단순하시군요. 제가 당두님을 따른다고 하면  그대로 믿으시겠습

니까?"

"믿어야지. 안 믿고는 어쩔 도리가 없으니 믿어야지."

"허 노사를 따르겠다고 하면요?"

"나 혼자 하는 수밖에 없지.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정말로  마음

먹고 누굴 지키면 손댈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한 둘 뿐일거다."

"그럼 애초에 혼자 하시지 그러셨어요. 왜 제게 이런 말까지 해서

약점을 보이는 겁니까?"

용유진은 지금까지의 농담하는 듯한 태도를 버리고 심각하게 말했

다.

"신용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황태자는  나를 신용해 줬

어. 그러니 그를 지킬 수 있는거다. 나도  처음엔 혼자 할까 생각했

지. 그런데 이런 의심이 생겼어. 내가 남을 신용하지 못하는데 남이

나를 신용해줄까 하는거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너를 신용하

지 못하면 나는 결국 너를 알고 지낸 사 년의  세월을 믿을 수 없게

되는거지. 내 능력은 그게 한계인거야. 누굴 지키기에 앞서 나 자신

조차 지키지 못하는 자가 되는거지."

양평중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용유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두님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분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당두

님의 수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세요? 제가 조비홍에게

밀고한 것은 허 노사의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허  노사가 그런 지시

를 한 것은 당두님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지시

를 따른 것, 허 노사가 꿈꾸는 것을 이루기  위한 집단의 하나로 들

어간 것 또한 당두님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저는 처음부터 당두님의

수하였습니다."

용유진은 잠시 양평중을 내려다 보다가 손을 들어 목을 긁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간지럽다. 남들이 보면 우리가 연애

한다고 하겠군."

양평중이 다시 인상을 썼다.

"전 변태가 아닙니다."

"좋아, 좋아. 알겠으니 그만 일어나라. 일 할  계획을 짜보자. 우

선 저기 있는 아홉 중에 몇이나 믿을 수 있을까? 황태자를 경호하라

고 맡겼더니 칼을 들이댈 놈이면 곤란해."

"저 중에 둘은 조홍의 지시를  따르고 있을 겁니다. 그런  의심이

드는 자들을 알고 있죠. 셋은 허 노사의  편입니다. 허 노사도 제법

세력을 모았다고나 할까요. 나머지 애들은 그냥  동창 위사죠. 먹고

살기위해 하는 애들입니다. 곤란한건 애들  성향이 어쨌든 비슷하게

당두님을 따르고 있다는 겁니다. 만약의 상황이 닥쳐오기 전에는 다

들 당두님의 충실한 수하들이죠."

"그 만약의 상황이 문제란 말야.  나는 그때도 나를 따를  사람이

필요해. 이대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아서  믿고 맡길 수가

없지."

"저같은 놈이 또 있는지 지금부터 찾아보지요. 어차피  남자는 자

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겁니다. 당두님은  제법 인덕이 있

는 편이니 몇 명은 당두님을 따를겁니다."

"칭찬인가? 칭찬이라면 자넨 아부하는 솜씨가 별로군.  그렇게 기

분 좋진 않아. 하여간  믿을만한 애들이 가려지기  전까지는 있어도

없어도 상관 없는 곳에  배치해야겠군. 애들을 전부  황태자 전하의

처소 주변에 배치하고 삼교대로 돌려. 황태자 전하의 수라상 시식은

네가 맡도록 하고."

"그러면 수행은 누가 합니까? 통상  세 명씩 하게 되어  있는건데

요."

"나 혼자 하겠다."

"혼자 하시면 힘들텐데요?"

"나는 걸으면서도 자는 법, 자면서도 감시하는 법을 알고있으니까

상관 없어. 그보다 어디서 검이나 한 자루 구해다 줘. 이번엔 좀 오

래 써야 하니까 쓸만한 걸로."

용유진은 원래 병기에 대해,  보검이나 보도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이었다. 필요할 땐  막대기든 목검이든 잡아들고  쓰고, 쓰고난

뒤에는 똥 막대기 버리듯  버려 버리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쓸만

한' 검을 찾는 것이다. 양평중이 맡은 임무는  다행히 하루 세 번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황태자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음식을 맛보면 되

는 것이었으니. 그래서 남는 시간동안 동창의 무기고와 금의위 무기

고, 나중에는 약간 손을 써서 황궁 무기고까지 들어가 뒤진 끝에 세

자루의 보검을 찾아내어 용유진 앞에 내밀었다.

눈처럼 하얀 어피검갑(魚皮劍匣)에 서리처럼 투명한 검신, 손잡이

까지 하얀 가죽으로  감은 보검에는 상아(霜雅)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붉은 적동검갑(赤銅劍匣), 은은한 핏빛 검신의 보검은 자하

(紫霞)였다. 그러나 용유진은 그 두 자루는  본체만체 넘어가고, 검

정색 고래가죽 검갑에 먹처럼 검은 검신이 네 자 이상이나 뻗어있는

둔중한 검을 골라쥐었다. 날조차 서지 않아 몽둥이처럼 보이는 검이

었다.

양평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하필 그걸…?"

용유진이 되려 물었다.

"왜 하필 이 검을 골라왔나?"

"그건…, 웬지 기세가 담겨있는 듯해서…, 그래도  당두님이 설마

그걸 고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이 기세가 마음에 들어서일세."

용유진은 검갑을 등에 짊어지고 두 손으로 뽑아보았다. 검신이 너

무 길어 끝부분이 채  검갑에서 뽑혀나오지도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 해 보이고는 다시 시도했다. 역시 다 뽑혀지지 않았다. 양평

중이 웃었다.

"어지간히 체구가 큰 사람이 쓰던 것인 모양입니다.  고대의 장군

쯤이나 되는…."

"고대의 장군이 얼마나 컸을 것 같나? 팔 척? 구 척?  나는 그 숫

자에는 과장이 적지않게 섞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네. 과장이 아니

라 그 정도로 큰 사람이 있다고  쳐도, 이 검은 그런 사람이  쓴 게

아냐."

용유진은 손잡이를 보여 주었다. 역시 검은 가죽이 감긴  그 손잡

이에는 사람의 손자국 같은 것이 찍혀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한 흔

적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박힌 자국이었다. 용유

진은 그 자국 위로 손을 겹쳐 보았다.

"중요한 건 손가락 끝이 어디까지 닿아있나 하는  것이야. 그걸로

손 크기를 알 수 있지. 봐. 내 손자국보다  오히려 짧지? 체구는 큰

사람이 나보다 손가락이 짧다. 손이 적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그런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체구가 크면 손도 크지. 이 검의 원주

인은 나보다도 손이 작아. 나보다도 체격이 작은 사람일거라는 얘기

야. 그가 사용했으면 나도 사용 못할 리가  없지. 게다가 이 손자국

은 여러모로 이상하단 말이야…."

용유진은 검갑을 허리에 차고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그가  검갑

끝의 어느 부분을 만졌을 때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며 검이 쏘아지듯

튀어나왔다. 용유진은 얼른 그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역시 용수철 장치가 되어 있었군. 손힘으로 뽑는게 아니었어."

그는 검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전궁(電穹)이라고 새겨져 있군. 좋은 이름이야.  전궁…, 무언가

의미하는 바가 있는 걸. 알 것 같아…."

용유진이 장난감을 든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

던 양평중은 급히 보고할 일을 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뭔가 불안하더라니…!"

양평중은 이마를 소리나게 때리고는 내용을 말했다.

"제독태감이 당두님을 찾았다고 합니다."

용유진은 검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나보고 오라던가?"

"아니요."

양평중은 눈빛을 번뜩였다. 의미가 있는 눈빛이었다.

"직접 당두님을 만나러 오실 듯하다는  조첩형의 전갈이었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예방한다는 구실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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