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뿔고동 소리가 산을 돌아 메아리쳤다. 멀리서 징소리가 들려왔다.
몰이꾼들의 함성이 산을 흔들고 계곡에 파고들었다. 용유진은 하늘
을 보았다. 정오가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이었다.
"시작되었군."
황금으로 장식된 전통(箭筒)에 각궁(角弓)을 들고, 역시 황금과
보옥(寶玉)으로 장식된 청총마(靑 馬)에 높이 올라탄 황태자가 중
얼거렸다.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셔야 할 때입니다."
황태자는 그의 주변에 모여선 사람들을 보고 물었다.
"이들이 전부인가?"
용유진을 포함해 열한 명, 전원 천자조 사람들이었다. 용유진은
그중에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인가 생각하며 고개를 끄
덕였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모자라십니까?"
"아니, 너무 많은 것 같아서...!"
황태자는 가볍게 대꾸하고는 채찍을 들어 말 엉덩이를 때렸다. 말
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용유진과 열 명의 천자조원들
이 그 뒤를 따랐다.
***
조홍은 호화롭게 장식된 향옥보차(香玉寶車) 안에 앉아서 황태자
일행이 출발하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무슨 소린가, 방금의 말 울음소리는?"
조홍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거기 황제가 반 벌거숭이로 전라의
미녀들 틈에 앉아서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향옥보차란 바
로 황제가 이렇게 야외로 나와서도 황궁 안에 있을 때와 똑같이 향
락을 즐길 수 있도록 고안된 마차였다. 다른 점은 사방에 뚫린 창에
가려진 휘장 너머로 산수(山水)를 볼 수 있고, 나무 사이로 지나온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다. '자연의 향기를 맡으며, 산수의 정기를 흡수해가며 불로장생의
방중술을 새로 익힌다'는 것이 황제의 이번 사냥출정을 결심케 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고안된 것이 향옥보차였다. 안에는 이십여 명이
충분히 뒹굴 수 있도록 넓고, 앞에 사십 명, 뒤에 사십 명의 동창
위사가 끌고 밀어 움직이도록 만들었는데, 마차꾼들은 황제의 호위
병 역할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조홍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 연
출된 행위였다.
조홍은 황제를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호승심을 발휘하신 모양입니다. 호랑이를 잡겠
다고 앞장서 나가셨습니다."
황제는 육십을 넘어 칠십을 향해 가는 나이면서도 그렇게 늙어 보
이지 않았다. 황태자와 나란히 세워 놓아도 형제 정도로밖에 보지
않을 정도였다. 조홍이 세심하게 관리해 준 덕택이었다. 그러나 아
무리 좋은 약을 먹고, 방중술로 정력을 관리한다 해도 세월의 흐름
은 어찌 할 수 없는 법, 그의 피부는 탄력을 잃었고, 양물은 제 기
능을 못 한지 몇 년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행차가 더 설득
력을 얻었던 것이다. 지금 황제의 양물은 우뚝 서서 한창때의 위용
을 보이고 있었다. 조홍이 몰래 술에 탄 음약(淫藥)의 덕택이었고,
몇 번만 쓰면 치명적인 해독을 끼칠 물건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즐겁
기만 한 황제였다. 황제는 그의 양물을 정성껏 애무하고 있는 세 명
의 미녀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으며 황태자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 놈은 내 아들이긴 해도 정말 이해가 가지않는단 말이야. 이런
곳에 나왔으면 생기를 보충받을 생각은 않고 오히려 하늘의 호생지
덕(好生之德)을 해칠 생각만 하고 있다니…. 그 놈 때문에 나까지
하늘의 공분(公憤)을 사지 않을까 두렵군."
"그러하시다면 또 좋은 예방안이 있나이다. 거기를 이리 하시고
…, 또 거기는 그리 하시면…, 이것이 바로 현녀삼희(玄女三戱)라는
것인데, 구천현녀와 두 시녀가 황제를 위해 마련한 체위(體位)로 이
것을 시행하시면 천지의 가호를 받으실줄로 아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인줄은 조홍도 알고, 미녀들도 알고 있었지만 황
제만은 몰랐다. 그는 곧 여체의 오묘함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 정
력을 쏟아낸 후, 곤한 잠에 떨어졌다. 조홍의 진짜 할 일은 지금부
터였다. 그는 그 누구도 황제의 휴식을 방해하지 못하게 엄명을 내
린 후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백 명의 당두가 거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일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조홍은 예리
한 눈으로 한 번만 훑어 보고도 누가 거기 없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
다. 그리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있을줄 알았던 몇은 없고,
없을 것이 분명하다고 예상한 쪽은 있었다.
"흑수계로 간 위사가 사찬엽(史贊燁)과 양청천(梁靑天), 그리고
천가량(天價亮), 이렇게 셋인줄 알았는데 더 있었나?
위사중 하나, 굵은 밧줄로 허리를 동이고 있는 사내가 앞으로 나
서서 대답했다.
"제독님의 기억이 정확합니다. 그 셋만 갔습니다."
"그럼 황궁에 남긴 열 명에 관한 내 기억도 맞겠군."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럼 여기 여든 일곱 명이 있어야 하는 것도 맞겠군."
"역시,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럼 여기 있어야 하는데도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옳을까?"
밧줄의 사내, 동창 일급당두이자 조홍의 최측근 심복인 한진걸(漢
眞傑)은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대열을 둘러보고 없어진 열 한 명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적으로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희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아. 거기 진 당두!"
진일동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조홍은 무표정하
게 물었다.
"묘하게도 진 당두가 과거 데리고 있던 위사들이 네 명 다 적이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진일동은 용암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땀을 흘려대었다. 그의 얼굴
에 흐르는 땀은 땀이 아니라 살이 녹은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저
승사자 앞에서 녹아내리는 진일동, 이것이 뒤의 위사들, 전원 삼급
당두 이상인 위사들이 보는 모습이었다.
"송구스럽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고 부른 것이 아니야. 문제는!"
조홍은 새끼 손가락에 자란 손톱 끝으로 진일동을 가리켰다.
"적들을 키운 자가 적이 아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해 달라는
것이지."
진일동은 털썩 주저 앉아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교육을 잘못 시킨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역심(逆
心)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추호도 짐작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군."
목소리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조홍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고, 그 눈
은 한진걸을 향하고 있었다. 한진걸이 허리춤에 손을 대며 진일동의
뒤로 소리없이 걸어갔다. 진일동은 땅바닥만 보느라고 이런 변화를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차선의 방법, 즉 도주를 택했을 것이다.
조홍이 음산한 목소리로 판결했다.
"무능에 대한 대가는 죽음이다."
진일동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 눈에는 공포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한진걸의 일만 쉽게 해주는 것이었다. 한진걸은
허리에 동인 밧줄을 풀어 진일동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허공으로
뛰어 나뭇가지에 올라갔다. 진일동은 목을 밧줄에 감긴채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의 발이 사방으로 발버둥거렸지만 어디에도 땅은
없었다. 한진걸은 허공에서 밧줄을 돌려 꼬았다. 진일동의 목에 가
해지는 압력이 순간적으로 높아지고, 곧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음
산하게 퍼졌다. 그가 늘어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조홍은 새로운 희생자를 찾고 있었다.
"적당두! 천당두!"
적중산과 천옥낭이 앞으로 나섰다. 여전히 장대한 몸매의 두 사람
이 나서자 조홍의 머리 위가 가려지는 듯했다. 조홍은 적중산의 검
은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이 누군지 아나?"
"용유진입니다."
"그래, 잘 알고있군. 내가 사년여 전에 자네들에게 어떤 임무를
맡겼는지 기억하고 있나?"
"용유진을 감시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임무를 했다고 생각하나?"
적중산과 천옥낭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무기를 빼들었다. 뒤에 서
있던 당두들이 술렁거렸다. 조홍에 대해 위해를 가하기 위한 동작으
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조홍이 손을 쳐들자 모두 조용해졌다. 적
중산은 철퇴를, 천옥낭을 태산도를 각자의 머리 위로 올리고 말했
다.
"임무를 소홀히 한 점을 죽음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철퇴가, 태산도가 두 사람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
다. 조홍이 손가락을 튀겼다. 그의 손가락에서, 정확하게는 손톱 끝
에서 하얀 섬광 두 줄기가 뻗어 철퇴와 태산도를 때렸다. 두 사람의
무기는 그 주인을 치기 전에 퉁겨나가 버렸다.
"그대들 마저 적이었다면 내 반생(半生)이 헛된 것이었겠지. 벌로
그대들 둘이 내 가마를 들어라!"
조홍은 손을 흔들어 당두들을 주목시킨다음 말했다.
"오늘의 일은 극히 간단하다. 그대들이 여태 해온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는 말을 길게 끌어 전원의 주의를 끈 다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적들을 도살하는 것이다!"
당두들이 일제히 발을 모아 대답을 대신했다. 조홍의 것을 포함해
일흔 여섯 명의 눈이 살기로 가득찼다. 그리고 곧 그 살기는 사방으
로 퍼져 나갔다.
***
경사 순천부에서 서쪽으로 오십여리 떨어진 곳에 석경산(石景山)
이라는 그다지 높지도 산세가 험하지도 않은 산이 하나 있다. 황제
가 사냥 출정을 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경사에 가까운 곳에 무슨
사냥할 짐승이 남아 있을 것인가 싶지만 여기에는 있었다. 원래 순
천부 자체가 험한 산들을 울타리 삼아 자리잡은 곳이요, 명나라가
건국한 이래 계속 벌목금지령(伐木禁止令)을 내려놓은 곳이기 때문
에 중원의 여타 명산들보다 오히려 삼림이 울창하고 짐승들이 많았
다. 그러나 이런 곳을 말을 타고 달리며 짐승을 잡는다는 것은 무리
였다. 황제의 앞으로 짐승을 몰아주는 곳이라면 몰라도 흑수계를 찾
아가는 황태자 일행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곧 숲을 만나 전
원 말에서 내려야 했다.
용유진은 황태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전통과 활은 말에 실어두고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황태자는 시키는대로 하면서 물었다.
"왜? 활은 이런 싸움엔 필요가 없다는 건가?"
"필요도 없으려니와, 그 금박 장식들이 목표가 되기 때문에 그러
합니다. 전하."
"그렇군. 그럼 내 옷도 문제가 있겠군."
"활과 마찬가지로 말에 실어 두시고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
그러면서 용유진이 내밀은 것은 동창의 수련복이었다. 누더기를
기워 만든듯한 복장, 두건까지 달린 그옷을 황태자는 재미있다는 듯
살펴 보았다.
"이게 문제의 그 자객 옷이군."
예전에 보령군주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황태자는 알고 있었다.
"시간 날때마다 내게 재미 있다는 듯 말하곤 했지. 그 아이는 자
넬 좋아하는 눈치였어."
용유진은 쓰게 웃었다.
"미천한 것에게 관심을 보여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희롱하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전하."
"희롱은 아닌 듯했지만…, 하여간 살고나서 더 이야기 해보세. 일
단은 이걸 입으란 말이지."
황태자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용유진은 무기를 점검했다. 활과 화
살은 숲속에서는 무용지물이니 던져졌고, 저마다의 말배에 매달려있
는 창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동창 위사들에게는 독문의 무기가 있으
니 그것을 사용하고, 그 자신은 전궁검에 칼 한 자루를 더 챙겼다.
황태자에게 남겨진 것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는 칼을 보며 다시 웃
었다. 동창 위사 전용의 검은 칼이었던 것이다.
"이걸 쓸줄 알았으면 보도(寶刀)라도 하나 챙겨오는 걸 그랬지?
너무 품위가 없군."
"전쟁에 쓰는 물건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습니다. 전하. 품위는 없
어도 목숨을 지키는 데에는 어떤 칼보다도 나을 것입니다. 보도는
너무 반짝여서 좋지 않지요."
"그렇군! 잠깐 잊고 있었네."
황태자는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보검을 떼어내어 칼로 그 장식
을 긁어버렸다. 반짝일 수 있는 모든 물건을 제거하는 것이다.
"유서깊은 물건으로 예술품이라 할 수 있었는데, 아깝군. 하여간
이제 되었나?"
용유진은 고개를 젓고 황태자의 머리를 가리켰다.
"황송하오나 피변에 달린 주옥도 모두 떼어내십시오 전하."
황태자는 이번에야 말로 쓴 웃음을 지으며 머리에 쓴 피변을 아예
벗어 던지고 옷에 달린 두건을 뒤집어 썼다.
"이젠 정말로 되었겠지?"
"되었습니다. 이제 가지요."
황태자가 손을 들어 의문을 표시했다.
"잠깐, 여태 안 물어보았는데, 자네 흑수계가 어디 있는지나 아는
건가?"
"안내인이 올 것입니다. 전하. 아쉬운 건 그들이지 우리가 아니니
까요."
그의 말대로 안내인은 숲에 접어들자 마자 나타났다. 그 안내자가
너무 의외의 인물이라 황태자는 놀랐다. 보령군주를 호위하던 여덟
시위중 하나, 권정이 안내인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너희들은 내가 직접 골라서 각대문파에 보냈었지. 그 문파들 중
에는 여인에겐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곳도 있어서 무진 애를 써서
들여보낸 사람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너였지."
권정을 소림사로 들여보내기 까지는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었다.
황태자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가장 기대를 한 사람에게 배신당한
아픔을 곱씹었다. 그러나 앞서 가는 권정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
다. 황태자는 다시 말했다.
"다행히 내 기대를 배반치 않아서 너희들 여덟은 모두 잘 커주었
지. 특히 네 성취는 눈부신 것이었다. 당시 소림 나한당주(羅漢堂
主) 조차도 네가 여자인 것이 아깝다고 했으니까. 네 이름을 권정이
라 지어준 것은 그래서였다. 아녀자의 몸이지만 권법의 최고봉에 한
번 올라가 보라고 하는 뜻이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검비(劍婢)니 도
비(刀婢)니 하는 이름을 붙여준 것에 비하면 파격적인 대우였지. 그
런데 네가 나를, 보령을 배신할 줄은 정말 몰랐구나."
권정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용유진이 말했다.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 너무 책망치 마시옵소서."
"사정이라…, 물론 있겠지. 저 낙양성(洛陽城)밖 북망산에 늘어진
수많은 무덤에도 핑계 없는 무덤 하나도 없다지 않나. 물론 눈물이
날 정도로 절실한 사정이 있었겠지. 원망스러운 것은 믿지 못할 아
녀자따위에게 호위를 맡기고 기대를 한 나자신일 뿐이다."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전하. 아마도…."
황태자는 버럭 화를 내었다.
"아마도 뭔가?"
"아마도 보령군주 저하의 목숨 자체를 미끼로 위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손 쓸 틈도 없이 당했겠지요."
황태자는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건가? 그럼 왜 말을 않는가?"
"말 하지 말라는 위협도 있었겠지요. 무공도 폐지된 것 같고…."
"똑똑하구나. 과연 동창의 일원다워. 그런 네가 적이 된 것이 아
깝다."
이 말은 그들이 한 것이 아니었다. 용유진이 쳐다 보았을 때 그
목소리의 임자는 막 높은 나무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양어깨에 각각
하나씩의 단창(短槍)을 짊어지고 있는 동창의 위사, 용유진은 언젠
가 그를 본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도 알고 있었다. 일급 당두
사찬엽, 쌍창의 달인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용유진은 황태자의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방어자세를 취하며 물
었다.
"보령군주 저하께서는?"
"아, 물론 잘 계시지. 조금만 더 가면 흑수계니 직접 데려가면 되
겠군."
그의 말대로 숲을 빠져나오자 거기 산봉우리가 있고, 계곡이 있었
다. 사방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뻗어 있어서 햇볕도
잘 비치지 않는 음습한 장소, 그래서 계곡의 나무들은 키작은 관목
들 뿐이고, 그나마 이끼에 덮여 암녹색이었다. 그래서 흑수계인 모
양이었다.
용유진과 일행은 흑수계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계곡 입구
는 좁고, 들어갈수록 넓어졌는데, 양쪽 벽은 하늘을 찌를 듯 깎아지
른 암벽이었다. 들어가기도 어렵고, 나오기는 더욱 어려운 장소였
다. 그 가장 안쪽에 다섯 구의 시체와 두 명의 소녀, 그리고 한 명
의 사내와 세 명의 여인, 마지막으로 보령군주가 있었다.
"저건…?"
황태자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다섯 구의 시체는 바로 보령군주
이 여덟 호위 중 다섯의 시체였다. 나머지 두 소녀도 상처투성이,
고문을 받은 것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세 여인중 두 명은 언젠가 용
유진과도 싸운 적이 있는 보령 군주의 수신이비였다. 역시 고문을
받고 묶여 있는 모습이었다.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사내는 동창의
위사였는데, 여인은 가시 돋힌 채찍을 들고있고, 사내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키만큼이나 큰 장도(長刀)를 거꾸로 세워 기대어 서 있었
다. 여인이 일급 당두 중 천옥낭과 더불어 둘밖에 없는 여인중 하나
인 천가량이고 사내는 역시 일급 당두인 양청천임을 용유진은 알아
볼 수 있었다. 사찬엽까지 포함해서 동창의 세 일급 당두들은 무시
못할 적수들이었다. 적어도 양평중과 아홉명의 천자조 조원들은 그
들의 손에 십 초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역시 그랬었군!"
황태자가 용유진의 추측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분노에 치를 떨
고 있을 때, 용유진은 보령군주를 보고, 그녀의 수신이비를 보며 미
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래전 처음 보았을 때는 몰랐으나
세월이 가면서 그때를 다시 회상해 보고 점점 의심스러워 하던 사항
을 오늘 확인한 것이다. 그것도 두 가지나 그랬다. 그는 황태자의
신변을 경호하기 위해 그러는 것처럼 약간 장소를 이동했다. 그러나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 본다면 그것이 동창의 세 일급 당두들로부터
오히려 몸을 감추는 위치임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황
태자가 말했다.
"자, 너희들 뜻대로 내가 여기 왔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사찬엽이 나서서 말했다. 그가 이 셋중에 대표격인 모양이었다.
"저희 미천한 것들이 감히 황태자 전하를 어찌 하겠습니까? 저희
는 단지 여기까지 모시는 것에 만족할 따름입니다."
"그냥 물러가겠다는 말인가?"
사찬엽은 고개를 저었다.
"고귀하신 몸을 모셔놓고 어찌 그냥 물러갈 수 있겠나이까? 술 한
잔 대접하려 하오니 받아주시기만 바랄 뿐이옵니다."
천가량이 자신의 앞에 있던 상자를 열어 술잔과 술병을 꺼내었다.
술병을 기울이자 벽옥색 술이 술잔에 가득 찼다. 그녀는 그것을 내
밀고 앞으로 걸어왔다.
"명주는 아니오나 황태자 전하의 입맛에는 맞을 줄로 아옵니다.
사양치 마시옵소서."
황태자는 술잔과 그것을 들고있는 천가량을 보았다. 그리고 보령
군주를 보았다. 양청천의 위치는 보령군주의 옆이었고, 그의 칼은
키만큼이나 길어서 보령군주의 목을 충분히 벨 수 있을 정도의 거리
였다. 그리고 황태자가 바라보자 칼을 살짝 들어서 보령군주의 옆으
로 옮겼다. 묵시적인 위협이었다. 황태자는 입꼬리에 비웃음을 매달
았다.
"사직(社稷)의 운명과 한낱 어린 계집아이의 목숨을 맞바꿀줄로
생각하였던가?"
사찬엽은 자신있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러고도 남을 분이다…
라고 제독께서 그러셨지요. 저희 미천한 것들이야 무얼 알겠습니까?
그저 시키는대로 할 뿐이지요. 황태자 전하의 판단만 기다리겠습니
다."
용유진이 앞으로 나섰다.
"황태자 전하는 그러셔도 나는 못 그러지. 내 검을 받아볼 생각이
있는가?"
"너는 저리 꺼져라! 아직은 네 차례가 아니야. 삼급 주제에 감히
대들다니, 선배를 공경하는 법도 못 배웠구나."
사찬엽의 어조는 황태자를 대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용유
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선배가 선배 같아야 대우를 하지. 어디 역모를 꾀하는 무리 주제
에 선배 행세를 하려는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이키면 사지 중 하
나만 절단하는 것으로 용서해 주겠으나, 그러지 않는다면…."
"그러지 않는다면?"
용유진은 보기좋은 미소를 흘려보내었다.
"내 손이 무정타 원망을 말라는 거지."
그의 손이 허리께로 옮겨졌다. 사척이 넘는 장검의 긴 손잡이가
손에 잡히려 하고 있었다. 양청천이 소리쳤다.
"네 진정 군주의 목숨도 돌보지 않는단 말인가?"
황태자도 소리쳐 용유진을 제지했다.
"섣부른 짓은 삼가라!"
그러나 이미 용유진의 손은 검의 손잡이를 잡았고, 거침없이 검이
뽑혀나왔다.
"미친 놈!"
사찬엽이 신속하게 어깨 뒤의 단창을 빼서 용유진을 향해 휘둘렀
다. 천가량이 술잔을 든 손 그대로 황태자를 짖쳐왔다. 그녀의 다른
손에 들린 채찍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양청천의 장도
가 슬쩍 움직였나 하는 순간 그 칼끝은 어느새 보령군주의 목에 닿
으려 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천가량의 공격을 받고 있으면서도 시선
은 보령군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손을 내밀어 양청천의 장도를 대
신 받으려는 것처럼 뻗었다. 양평중과 아홉 명 천자조원들이 몸을
날려 황태자와 천가량 사이로 파고들었다. 몸으로 그 공격을 대신
막겠다는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중 두 명은 덮쳐가는 기세로 바로 옆에 선 동료의 옆구리에 칼을
꽂아넣고 있었다. 그들 둘이 바로 조홍의 첩자였던 것이다.
그 순간 번개가 쳤다. 대낮에도 어두침침한 흑수계의 하늘에 번개
라도 친 것처럼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폭풍이라도 몰아친 것처럼
돌아가던 장내의 소란이 한 순간에 멎었다. 그리고 방금 번개를 때
린 용유진을, 그의 검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용유진은 사척이 넘는 긴 검을 수평으로 뻗어 황태자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날도 안 서서 단지 거무튀튀한 몽둥이로밖에 보이지
않던 그의 검이 방금 때린 번개의 잔광(殘光)인 듯 푸른 섬광을 튀
기고 있었다. 수평을 이룬 검의 아래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
이 갈라져 있고, 거기 뱀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천가량의
채찍 동강이였다.
"너, 너는…, 방금 그것은…?"
사찬엽이 힘겹게 말을 뱉었다. 그의 입에서는 조각난 창자가 게워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용유진의
검이 때린 번개의 가장 큰 피해자가 그였기 때문이었다. 가슴에서부
터 배까지 화포에라도 맞은 것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조각난 형체가
바로 그의 상반신이었다.
"검강(劍 )… 이라고나 할까? 아직 거칠어서 부끄럽긴 하지만."
용유진은 천천히 검을 거두며 천가량을 보았다. 천가량은 사찬엽
보다는 나았다. 그녀는 단지 황태자를 공격해 가던 두 팔만 희생했
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용유진이 입힌 상처고, 다른 사람이 입힌
상처는 사찬엽보다 심했다. 목 바로 위에서부터 그녀에게는 남은 것
이 없었다. 누군가의 벽공장(劈空掌)에 맞아 날아가 버린 것이다.
바로 황태자가 양청천을 노리는 척 하면서 휘두른 일장에 맞아서였
다.
양청천은?
그 역시 좋지 않았다. 보령군주를 향해 휘둘러지던 그의 장도는
중간에 멈춰 있었다. 여인이 쓰는 비단 허리띠에 감겨서 더 이상 나
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허리띠는 수신이비 중 하나의 허리
에 감겨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인이 던진 비녀에 꽂
혀서 그또한 목구멍으로 피를 내뿜고 있었다.
결국 이 일전으로 죽은 것은 동창의 세 일급 당두였다. 그리고 천
자조의 두 명이었다.
"복잡하니 빨리 해결해야겠군."
용유진은 천자조의 배신자 둘을 향해 말했다.
"결국 너희들은 나를 따르지 않고 옛 주인을 따랐구나. 애석하구
나."
천자조의 둘이 말했다.
"우리는 후회하지 않소."
그러나 그들은 떨고 있었다.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나를 따르던 자들은 모두 대장부였다고 기억하겠다."
양평중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천자조의 다섯이 그 뒤로 포진했
다. 배신자 둘의 눈에 절망의 빛이 스쳤다. 용유진은 더 이상 그들
을 보지 않았다. 그는 황태자를 향해 깊이 포권했다.
"전하께서 고수이신 줄은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방금의 일장은
대력금황기 중 일부였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황태자는 부인하지 않았다.
"자네야 말로 내 생각보다 훨씬 고수군. 방금의 일검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인데 이름을 말해주겠나?"
용유진은 전궁검을 내려다 보며 대답했다.
"사실은 방금 만든 것인데…, 전부터 검에 강기를 접목시키는…,
검강(劍 )을 시도해보고 싶었지요. 되는군요. 전궁(電穹)이라고나
이름을 붙여야 하겠습니다. 제 일초라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수신이비가 보령군주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보령군주는 입술을 앙 다물고 용유진에게 다가오더니
그 뺨을 때렸다. 그리고는 그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밉다, 미워!"
용유진이 황태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어쩔줄 몰라하는 동안 양평중
은 배신자 둘을 처리하고 권정과 여타의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보령
군주가 겨우 울음을 그치고 수줍은 듯 한쪽으로 물러나자 황태자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수신이비를 가리키며 묻는 말이었다. 용유진은 수신이비를 소개했
다.
"일승 고목대사의 두 가마꾼이었죠. 원래 이름은 모르겠습니다만
…. 왜 보령군주 마마의 호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수신이비가 바로 그녀들이었던 것이다. 용유진을 감시하는 임무를
받고 따라다니던 그녀들은 가장 가까이 있는 방법으로 황궁에 잠입,
궁녀 행세를 했다는 것이 그동안의 경과였다. 그리고 방금 용유진을
도와 양청천을 처리한 것이다. 그녀들은 무공을 숨기고 있었고, 그
덕분에 양청천의 주의를 끌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인이 약간의 거래를 해서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신이비 중 하나가 말했다.
"월인 공손조덕은 빈말을 않는 사람이었죠. 용 공자도 그러리라고
믿어요."
"물론이오. 고목대사를 만나는대로 치료법을 알려드리겠소."
용유진은 치료법을 거래 조건으로 걸었던 것이다. 그녀들이 여태
용유진을 따라다닌 이유가 그것이었으니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수신이비가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주인님을 만나야 치료법을 알려주시겠다고요? 약속이 다르지 않
은가요? 우리는 지금 당장 그걸 원해요."
용유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와 함께 행동했다가 상관대부의 표적이 되는 것은 싫다는 뜻
이겠지요? 그러나 이미 소용 없는 일이 되었소. 당신들만이라도 이
곳을 떠나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건 지나치게 안이한 생각
으로 보이는군요."
"빠져나가고 말고는 우리 소관이니 치료법이나 알려줘요."
용유진은 대답 대신 하늘을 향해 손짓했다. 중인들의 시선이 그
손가락끝을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한꺼번에 안색이 변했다. 흑수계
를 내려다 보는 절벽 위쪽에 수십 명의 동창 위사들이 서있었던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