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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3화 (3/200)

# 3

3화

여전히 어투는 차가웠지만 혼절하기 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노인의 행동을 갈지혁은 알아차렸다. 몇 마디 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 방법을 말하지 않았을 노인이라는 것을 확신할 정도로 말이다. 무엇인가가 변한 게 틀림없다.

갈지혁은 확신을 가지고 혼절하기 전에 했던 말을 다시 내뱉었다.

“절 독인으로 만들어주십시오.”

“…….”

노인은 말없이 갈지혁을 바라봤다. 그가 혼절해 있는 동안 노인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답을 내렸다.

“……만들어주지.”

자신의 복부에 칼을 꼽아 넣는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 영특한 머리도 그렇다. 하지만 역시 노인의 마음을 흔든 것은 독왕이 되겠다는 그 한마디 말이었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토록 자존심이 강한 무림인들이 몇 백 년간 지켜오던 전통을 깰 리 만무하다.

알지만…… 나이가 드니 순수해지는 모양이다. 다시금 어릴 적 꿈을 좇는 것을 보니 이루지 못한 꿈이었기에 미련이 남았다. 그랬기에 독왕이라는 두 글자에 마음이 동한 모양이다.

사독문에 갇힌 지도 어언 사십 년이 훌쩍 넘는다. 사람이 그리워질 때도 된 모양이다.

갈지혁은 침상에서 힘겹게 내려와 노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겠습니다.”

스승에게 올린다는 구배지례를 막 올리려는 순간 노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너를 독인으로 만들어는 주겠지만 스승이 되지는 않겠다. 사제(師弟) 관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어르신이라고 불러라. 스승님이라 부르면 용서치 않겠다.”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르신의 존함은 알고 싶습니다. 아, 제 이름은 갈지혁이라고 합니다.”

노인은 순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일악천(一惡天)이라고 한다.”

“이, 일수만독(一手萬毒)!”

노인을 바라보던 갈지혁은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단 일수에 만 가지 독을 뿌렸다고 알려진 무인. 독황독립문이 배출한 최고의 고수였지만 어느 날 돌연 사라진 인물이다.

독황독립문과 중원 무림의 싸움에서 일악천이 펼쳤던 무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전설이 되어 버렸다.

아직도 중원 무림은 일악천을 기억하며 독황독립문과의 격돌을 피할 정도이니 그때의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독황독립문 최대의 금역(禁域)이자 지독한 악행을 벌인 자만 가두는 이곳 사독문에 있다.

그 이유가 너무 궁금했지만 물을 수는 없다. 침묵하고 있는 갈지혁에게 일악천이 말했다.

“회생충을 빼는 것은 한 달 정도 걸린다. 여태까지 네가 겪었던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몰아닥칠 게다. 견뎌 낸다면 회생충이 죽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네가 죽는다.”

갈지혁이 아무런 대꾸도 없자 일악천은 재차 차가운 어투로 이야기했다.

“겨우 이 정도로 겁이 난다면 당장 때려치워라. 난 혹독하다. 네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거다.”

“두렵지 않습니다.”

결의가 가득한 갈지혁의 한 마디에 힐끔 그를 쳐다보고는 일악천은 이내 몸을 돌렸다.

“쉬도록 해라. 내일부터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해도 쉴 수 없을 테니.”

밖으로 걸어가는 노인의 등 뒤로 갈지혁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지독한 악취다.

갈지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갓 해가 뜬 것 같은 시간이다. 그리고 갈지혁의 눈이 향한 곳에는 노인이 있었다.

독황독립문이 배출한 최고의 고수인 일악천이 커다란 항아리 옆에서 갈지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늦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묘시(卯時) 초에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하루 한 시진 이상은 자지 마라.”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잠이 없던 그이기도 했지만 독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각오를 했던 것이다.

일악천이 조용히 항아리 안에 있는 액체를 손으로 찍어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옷을 벗어라.”

갈지혁은 천천히 옷을 모두 벗었다. 일악천은 옆에 있는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풀을 갈지혁의 상처가 있는 부분에 덕지덕지 발랐다. 독기가 침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는 상처를 막고는 말했다.

“들어가.”

“이 안에 말입니까?”

“그래.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고통스러울 거라는 말에 갈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있는 검상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이 검상의 무게만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갈지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성큼 항아리 안으로 들어가 앉은 갈지혁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우욱!”

일악천의 말대로였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온몸을 엄습했다. 당장에 토악질을 해댈 것만 같다. 그렇지만 버텨야 한다. 이것이 회생충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장에 항아리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갈지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 세게 문 탓에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갈지혁은 버텼다.

일악천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두 시진을 버텨라.”

“두…… 시진 말입니까?”

간신히 갈지혁이 말을 내뱉었지만 일악천은 간단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공이 없는 갈지혁이 지금 저 안에서 버티는 것이 얼마나 큰 고역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하고서는 독왕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꺼낼 자격이 없다.

“힘드냐?”

갈지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로 무너질 거라면 애초부터 독인이 되고자 하지도 않았다. 이상한 액체 속에 몸을 푹 담근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 멀었어.’

화기가 강한 독초들로 조합한 액체 안에서 갈지혁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지만 내공도 없는 몸으로 그 지독한 독기 안에서 버틴다는 것은 무리였다.

한 시진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갈지혁은 혼절했다.

일악천은 조용히 그를 항아리에서 꺼냈다. 두 시진을 버티라고 했지만 애초부터 무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처음엔 반 시진 정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에 비하면 갈지혁은 두 배 이상을 버틴 것이다.

일악천은 갈지혁을 업은 채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갈지혁을 침상에 눕히고는 몸에 스며든 독기를 제거할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약을 만드는 재료들은 극독으로 알려진 것들이었다. 사독문은 일반적으로 약초의 성격을 지닌 풀들이 자라기 힘들다. 대부분이 독초들이고 그곳에서 약의 기운을 꺼내 써야 한다.

독이나 약이나 한 끝 차이다. 조금만 손보면 독은 약이 되고, 약은 독이 된다.

막 약을 만들어 갈지혁 옆에 앉은 일악천은 신음 소리를 들었다.

“크…….”

일악천은 말없이 약초를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 손길조차 쓰라린지 갈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일악천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고 얼굴에도 약초를 바르기 시작했다.

얼굴에 있는 검상이 상당히 깊다. 그렇지만 갈지혁의 외모는 그 검상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빼어났다. 흰 피부에 몸집도 적당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그것들이서로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신비한 느낌까지 풍긴다.

그런데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걸까.

일악천은 자신의 추한 얼굴을 생각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독에 당하면서 얼굴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왜 얼굴을 가리느냐.”

무인으로서 얼굴을 가리는 건 좋지 않다. 머리카락이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에 엇비슷한 실력을 지닌 자와 싸울 때는 패배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검상 때문입니다.”

누운 채로 갈지혁이 대꾸했다.

일악천은 무심한 눈으로 연신 약초를 발라댔다. 갈지혁은 말을 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제가 독황독립문 내에서 친하게 지냈던 벗이었습니다. 그가 낸 상처입니다.”

“얼굴을 드러낼 용기가 없는 거냐?”

“아직 떳떳하지 못합니다. 이 상처를 볼 때마다 저를 사독문에 갇히게 한 그 녀석이 생각나서…….”

“겁쟁이로군.”

말을 끊은 일악천은 약초를 다 바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묘한 일이다. 독왕이 되겠다고 내뱉은 것도 그렇지만 다른 점에서도 일악천과 갈지혁은 묘하게 닮았다. 그가 이곳 사독문에 오게 된 것도 알고 있는 지인(知人)에게 당하면서였다. 그렇지만 일악천은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일악천은 집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네놈이 내공만 움직일 수 있다면 무공 훈련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지.

앞으로 네가 내공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지식과 무공의 기본 상리를 가르쳐 주겠다.”

“곧 일어나겠습니다.”

누워 있는 갈지혁의 마음도 결코 편하지는 않았다.

가고자 하는 길은 먼데, 지금 갈지혁은 막 걸음걸이를 시작한 기분이다. 달려도 먼 거리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은 기고 있다. 이렇게 기어서는 평생을 가도 도착할 수 없다.

갈지혁은 허리를 부둥켜안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몸은 아프지만 쉴 수는 없다.

갈지혁의 하루 일과는 정해졌다.

새벽에 두 시진 동안 그 고통스러운 액체 속에 있어야 한다. 두 시진이 지나면 가벼운 식사를 한다. 원래대로라면 무공 훈련 등을 해야겠지만 몸이 제 상태가 아니다. 내공을 움직일 수 없기에 우선은 잡다한 지식을 배웠다.

갈지혁의 지식은 상당했다. 독황독립문 최고의 기재라고 불렸던 것은 무공뿐만이 아니라 독에 대한 엄청난 지식이 있었던 탓이다. 그렇지만 그런 그조차도 일악천의 앞에서는 어린애와 다름없었다. 그가 알고 있던 지식을 훨씬 뛰어넘는 그 무엇인가를 일악천은 가르쳤다.

독을 뿌리는 것을 가리켜 용독술(用毒術)이라 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용독술 또한 여러 가지다. 직접 뿌리는 것, 어딘가에 묻혀둠으로써 그것을 만지는 순간 독에 중독되는 방법 등 그 수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다.

일악천은 조용히 갈지혁을 내려다봤다. 독초를 이리저리 만지고 있는 갈지혁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손이 익숙해. 글이나 읽은 서생(書生) 놈이 아니야.’

독인이 되겠다는 무인 중 일부는 서생에 불과한 놈들이 있다. 무공을 어느 정도 익히고 독에 대한 지식은 손으로 만져보기보다는 책으로 접해 단순히 이론만을 알고 있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은 쓸모없다. 필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부닥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순간적으로 내릴 수 있는 독에 대한 판단이다.

그것은 결코 책만 본 서생들이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목숨을 걸고 독을 파헤쳐 본 자들만 알 수 있다. 그러한 기준으로 봤을 때 갈지혁은 합격이다. 그의 독초를 만지는 손길은 결코 낯설지 않다. 상당히 많은 독들을 직접 제조해 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독황독립문에서 배운 것들.’

독황독립문에 있는 독에 대한 서적들은 중원 그 어디에 가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그렇지만 그곳에 있는 게 전부는 아니다. 분명 그 서적들을 모두 알고 독황독립문의 무공을 대성한다면 독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인이 될지언정 독왕은 될 수 없다.

‘큭, 벌써 저 어린놈을…….’

아직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녀석을 독왕으로 만들겠다는 자신이 우스운 모양이다.

아니, 이름 빼고 아는 게 있다.

심계가 깊다. 결코 속내를 겉으로 내비치지 않는다. 얼굴을 감추고 있는 탓이기도 했지만 그걸 떠나서 힘들다는 표정이나 말 한 마디 한 적 없다. 내공이 없는 자가 결코 버틸 만한 훈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틴다.

무림에서는 실력을 감춰야 한다. 본연의 능력의 칠을 보여야 하고 삼은 감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암투가 난무하는 무림에서 버틴다는 것은 무리다.

문득 왜 갈지혁이 독황독립문에서 파문을 당했는지 궁금증이 치밀었다. 적어도 이만한 재능과 열정이라면 독황독립문에서도 미래를 기대하는 기재 중 하나였을 게다. 겨우 금지된 독에 손을 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파문시킬 정도의 존재는 아니다.

조용히 독초들을 조합하는 갈지혁을 바라보던 일악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놈…… 정말로 금지된 독에 손을 댔다는 이유 하나로 파문을 당한 거냐?”

“적어도 그들이 내건 이유는 그거였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군.”

갈지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갈지혁은 애써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제가 그들과 다르니까요.”

“중원인이라서인가.”

“…….”

갈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이미 맞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일악천은 혀를 찼다. 자신이 몸을 담았던 독황독립문이 그토록 변색되어 버렸을 줄이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악천의 머릿속에 한 사내와 여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 둘의 모습이 떠오르자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된 것이냐. 내가 이곳에 갇히면서도 반항하지 않은 것은 전부 너를 위해서였거늘……. 모든 것을 빼앗기면서도 선선히 웃었던 것은 네가 내 지기이기 때문이거늘 지금 네놈은…….’

상념은 금방 끝났다. 지금 독황독립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일악천이 원하던 방향은 아니다.

독의 제조를 끝마친 갈지혁에게 일악천이 잎 하나를 내밀었다.

“독초냐 아니면 그냥 잎이냐.”

“독초입니다.”

“왜?”

“잎이 너무 깨끗합니다. 사독문에서 일반적인 생물이 자라는 곳에는 독초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무래도 곤충이 모이게 됩니다. 잎이 멀쩡하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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