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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6화 (6/200)

# 6

6화

문이 열리며 일악천이 들어왔다.

“뭐냐, 네놈들은?”

“네가 일악천이냐? 나는…….”

사내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목을 움켜쥐었다.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빠져나오지 않는다. 급기야 그는 미친 듯이 기침을 하면서 주저앉고야 말았다. 일악천은 발로 사내를 밀어 자빠트렸다.

갈지혁의 눈이 빛났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일악천이 하독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건 갈지혁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이는 사내는 꼴사납게 가슴을 움켜쥐고 땅에서 헛구역질을 해댔다.

분명 극독은 아니다. 만약 일악천이 마음만 먹고 손을 썼다면 지금쯤 저 사내는 한 줌 뼛가루만 남아 버렸을 게다.

면사를 쓰고 있는 여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일수만독 어르신, 풍 아저씨가 다소 말이 험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너는…….”

무엇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일수만독의 얼굴 표정이 슬쩍 변했다. 여인은 면사를 벗었다.

그곳에는 열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 있었다. 아직 다소 어리지만 이삼 년만 지나면 천하를 울릴 미인이 될 걸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지만 일수만독 일악천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녀의 미모가 아니었다.

눈, 약간은 파란 듯한 그 눈을 보는 순간 한 가지 확신을 내렸다.

“약선(藥仙)의 손녀인가?”

“예.”

“그렇다면 찾아온 이유도 알겠군. 돌아가라.”

말을 마친 일악천은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는 갈지혁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무얼 하느냐. 무공 훈련을 시작하자.”

갈지혁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급히 약선의 손녀인 여인이 급히 일악천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녀의 눈빛은 간절했다.

“단장초(斷腸草)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세요.”

“가라. 약선과 나는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지금 너를 죽인다 해도 전혀 상관없다.”

“지금 무림에 서서히 퍼지는 병은 단장초가 있어야 해요. 그게 아니면 많은 사람이 죽어요.”

“내가 단장초가 있는 곳을 말한다 해도 넌 그곳에 갈 수 없어.”

일악천은 딱 잘라 말했다.

단호한 말에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죠?”

“독인이 아니니까. 아니, 설령 독인이라고 해도 그곳에 가면 죽어.”

“말해 주세요. 어떻게든…….”

“내 답은 하나다. 나가라. 약선 덕분에 독황독립문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문은 열어줬겠지만 나는 아니다. 이미 독황독립문에서 파문당한 몸.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인은 단숨에 일악천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았다. 한번 내뱉은 이상 결코 번복할 자가 아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 단장초를 구하는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약선의 꿈이기도 했다.

그녀가 옷소매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지독한 독을 가지고 있는 녹색 뱀이다. 여인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뱀의 모습에 당황하고야 말았다.

소매를 놓고 뒷걸음질 치던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고야 말았다. 일악천은 조용히 그런 여인을 바라봤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다시 이곳을 찾아오면…… 죽는다.”

옷소매에서 빠져 나온 녹색 뱀이 일악천의 몸 위를 마구 휘감으며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여인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봤다.

“자, 받아라.”

일악천은 병 하나를 집어던졌다. 여인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고 그는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저놈에게 먹여. 그럼 움직일 수 있을 거다.”

“정말…… 말해 주실 수 없나요?”

“한번 한 말을 번복하는 취미는 없다. 당장 사라져라.”

여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생기발랄하게 보였던 표정도 상당히 침울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 정도에 흔들릴 일악천이 아니다. 단장초는 쉽사리 손을 대서는 안 되는 풀이다.

단장초가 잘못 이용되면 천하를 살릴 약초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뒤흔들 극독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단장초의 위치를 가르쳐 준다면 그 후에 있을 일을 잘 아는 일악천이다. 천하가 흔들릴 것이다. 수많은 자들이 피를 흘리게 될 건 불 보듯 뻔하다.

여인은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병 안에 있는 액체를 먹였다. 잠시 신음하던 사내가 얼굴을 붉히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청해서 따라온 길인데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게 창피한 것이다.

“가요.”

“하지만 아가씨…….”

“억지로라도 들을 수 있다면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수도 없잖아요.”

일악천은 독황독립문에서 전설이 되어 버린 존재다. 그가 이곳에 갇혀 있는 것을 아는 존재도 무림에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자신과 가까스로 일류의 반열에 오른 무인 하나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인은 일악천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막 나가려던 여인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이름이 뭔지 듣지 못했어요. 말해 주실 수 있어요?”

“몰라도 돼.”

갈지혁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갈 길이 다르다.

약선이라면 독과는 정 반대되는 길을 걷는 자다.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

“전 운하연(雲夏淵)이에요. 이름이 뭐죠?”

“네 이름 궁금하지도 않고 난 분명히…….”

“갈지혁이죠?”

“……뭐야?”

“독황독립문에서 들었어요. 이 문이 요즘 자주 열린다면서 당신 이야길 하더군요. 혹시나 했는데 맞았나 봐요.”

갈지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을 가지고 논 기분이 들어서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그냥 운하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을 무시했다. 더 이상 말을 나눌 기분이 아니다.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물어보죠, 그건.”

“…….”

이후로 볼 일은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운하연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갈지혁은 쓴 입맛을 다시며 일악천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단장초 때문이리라.

단장초라면 들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약선이라는 노인의 손녀가 찾는다면 약초일 터인데 어째서 일악천은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당장에 딱 답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는 건 없다. 또한 상관할 이유도 없다.

단장초라는 풀과 자신은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 * *

갈지혁의 일과에서 새로운 것이 생겼다.

얼마 전 일악천이 말했던 독사들이 있는 구덩이에 먹이를 가져다주는 일이다. 갈지혁은 일악천이 내미는 통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뒤에서 일악천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 녀석을 데려가라.”

소매 속에서 녹색 머리의 뱀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뱀은 혀를 뺀 채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뱀을 말입니까?”

“그래.”

갈지혁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악천이 결코 허튼짓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은 이곳에서의 생활을 통하면서 알았다. 그랬기에 갈지혁은 묵묵히 소매를 내밀어 녹색 뱀이 들어오게끔 했다.

뱀이 일악천의 소매에서 빠져나와 갈지혁의 손목으로 올라섰다. 처음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비록 뱀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귀기스럽지 않다고는 하지만 이빨에 물리기만 하면 그대로 즉사다. 그러한 맹독을 지닌 독사가 옷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좋을 리가 없다.

갈지혁이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일악천이 말했다.

“그 녀석은 동물이다. 자신보다 약한 자에겐 결코 굴복하지 않지.”

맹수들의 세계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다. 이 녹색 뱀이 일악천을 따르는 것은 그가 엄청난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 녹색 뱀은 일악천을 그렇게 따르면서도 갈지혁에게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가까이만 오면 당장에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물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그 이빨에 물리는 순간 어떻게 될지 잘 아는 갈지혁이기에 뭔가 떨떠름한 것은 당연하다. 일악천의 행동 탓인지 뱀은 얌전히 갈지혁의 옷 속으로 파고들어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놈을 제압해라. 힘을 보여도 좋고 아니면 다른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뱀이 너를 따르게 만들어.”

뱀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혓바닥을 연신 날름거렸다.

갈지혁은 꽤나 어려운 숙제를 일악천이 자신에게 던졌다고 생각했다. 비록 생긴 게 순해 보인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게다.

‘뱀이다. 그렇지만 그냥 뱀은 아냐.’

일반적인 뱀이라면 검을 들고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 뱀이 공격을 들어오는 경로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날아드는 뱀을 검으로 베지 못할 정도로 갈지혁은 약하지 않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 뱀을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잡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일악천이 이렇게 이겨 내라는 과제로 내주지도 않았을 게다.

일악천은 갈지혁보다 이 뱀이 강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분하지만 일악천이 그렇게 봤다면 맞을 거다. 갈지혁은 일악천의 말에 전혀 반발하지 않았다. 그는 소매 속을 기어 다니는 뱀을 느끼며 독사들이 모여 있는 구덩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갈지혁이 나가자 일악천이 슬쩍 웃었다. 대충 앞으로 있을 일이 머리에 그려지는 탓이다. 아마도 갈지혁은 뱀과 상당히 오랜 시간 싸우게 될 거다.

뱀이라고 얕볼 만한 녀석이 아니다.

‘고생 꽤나 할 거다, 이놈.’

독사들이 모여 있는 구덩이에 가는 것은 상당히 버겁다. 지독한 독기가 땅에서부터 공기까지 가득하다. 머리가 욱신거릴 정도로 독기가 지독해서 갈지혁은 호흡을 최대한 줄인 채로 이곳에 들어오곤 한다. 오늘도 통 안에는 일악천이 만든 검은색 단환들이 있다.

가장 먼저 고개를 쳐든 것은 홍사였다. 붉은 몸을 마구 흔들며 갈지혁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홍사를 보며 갈지혁은 통 안에 있는 단환들을 꺼내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호흡은 천천히 일악천이 일러준 대로 하기 시작했다.

일악천은 며칠 전 이곳에 오면서 이런 호흡법을 취해 보라고 했던 것이다.

‘천주혈에서 회음혈까지…….’

호흡이 점점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슴은 점점 편해졌다. 독기를 받아들이지만 이내 뱉어 내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신기하면서도 일악천의 능력이 새삼 대단스럽게 보였다.

독인이 되기 위해서는 한시도 쉬어서는 안 된다. 걸을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심지어는 잠을 잘 때까지도 마찬가지다. 갈지혁은 운이 좋다. 오히려 어떠한 점에서는 이 사독문에 온 것을 감사해야 했다.

이곳에는 두 가지가 있다.

훈련을 하기 가장 적합한 장소와 최고의 독인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일악천이 바로 그것이다.

사독문에는 밖에서는 접할 수 없는 수많은 독들이 있다. 그리고 땅이나 공기 중에도 독의 기운이 강하게 흐르기 때문에 심법을 익힐 때도 유리하다.

실제로 이곳에 와서 갈지혁은 밖에 있을 때보다 갑절 정도 빠른 성과를 보였다.

구덩이 아래에서는 단환을 받아먹기 위해 뱀들이 마구 요동쳤다.

뱀들의 세계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다. 힘을 가진 놈이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건 그 어디를 가나 변하지 않는 듯싶다.

쉬익쉬익!

갑자기 소매 안에 있던 녹색 뱀이 고개를 내밀었다. 예전에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던데 아마도 그 때문인 듯했다.

뱀은 청각이 발달되지 않았다. 대신 뱀은 상상을 불허하는 촉각을 지니고 있다. 뱀은 자그마한 바람의 흔들림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혀를 이용해 느끼는 것이다.

녹색 뱀은 주변을 돌면서 연신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온갖 뱀들이 꿈틀거리면서 사방에 있는 독초들도 독기를 토해 냈다. 그렇지만 일악천에게 배운 호흡법을 펼치니 오히려 그 독기들이 내기(內氣)로 몸에 축적되는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이 넘치니 갈지혁은 조용히 검을 꺼내 들었다. 검에 초록색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쉬익!

검의 울음소리에 주변을 휘돌아다니던 뱀이 고개를 돌렸다. 검에서 나는 바람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뱀은 마치 신기한 것을 보기라도 한 듯이 갈지혁을 바라봤다.

갈지혁의 몸이 사방을 향해 터져 나갔다. 검객이 아니다. 검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진지한 모습에서는 사뭇 검객의 그것과도 같은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한동안 검을 휘두르던 갈지혁은 호흡을 멈추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의 얼굴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살기가 터져 나온 탓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등을 잡혀 버렸다.

갈지혁은 손을 내려트렸다. 남이 본다면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갈지혁은 검객도, 도객도 아니다. 그는 독의 길을 걷는 자다.

독을 쓰는 자의 손에 아무것도 없다 해서 방심한다면 그 순간 싸움은 끝난 거다.

바짝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손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풀었다. 독을 하독하는 것과 상대의 병장기가 날아오는 것 중 뭐가 빠른지는 붙어 봐야지 안다. 그런데…….

쉬익쉬익!

낯익은 소리에 갈지혁은 혹시나 하고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의 상황에 갈지혁은 땀을 닦아 냈다. 등 뒤에서 흘렀던 알 수 없는 기운의 주인은 바로 그 녹색 뱀이었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었던 일악천의 말이 생각났다. 이 뱀을 제압하라고 했던 그의 전언이 말이다.

갈지혁은 검을 허리에 꼽고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쳐냈다. 사방에 독기가 가득해 나무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독기에 강한 나무가 있는 법이다. 지금 갈지혁이 나뭇가지를 꺾은 나무가 그중 하나다.

적향독목(赤香毒木)이다.

가지가 단단하고 그 가지 자체를 조금만 손보면 독으로 사용도 가능한 나무다. 오히려 이 나무가 있는 반경 삼 장가량이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고 알려진 독 나무. 그 가지를 쳐낸 갈지혁은 뱀을 향해 슬쩍 움직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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