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9화
그저 단순히 독왕이라는 꿈을 꿨다. 일악천은 갈지혁을 단순히 그 꿈의 연장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재능을 보니 왠지 모를 기대감이 인다.
‘잘하면 독왕이…….’
생각을 하던 일악천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몇 백 년이다. 몇 백 년간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길을 저토록 어린 사내가 걸으려고 하는 것이다. 쉽지 않을 게 분명하고 가능하지 않다고 봐야 옳다. 섣부르게 들떠봤자 무엇하겠는가.
‘아냐. 불가능할 게야. 이곳을 벗어나 독에 관련된 문파 하나를 만드는 거면 몰라도 독왕이 된다는 건 불가능해.’
그렇지만 갈지혁을 바라보는 일악천의 눈빛이 변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미칠 듯한 우기가 끝나고 다시 건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건기가 된 지 며칠 정도 후, 일악천이 갈지혁에게 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독을 사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손이 아니다. 바로 머리다.”
일악천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갈지혁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물론 손의 빠르기도 중요하고 하독 방법도 중요하지. 그렇지만 이 머리가 없는 놈은 그 어떠한 재능이 있어도 쓸모가 없어. 머리가 없는 놈은 무공을 익혀도 천하제일이 될 수 없지. 하물며 독은 더 해. 상대의 다음 움직임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독을 쓰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독인이 되려면 적어도 세 수가량 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독을 뿌림으로서 상대가 취할 행동, 그리고 그 행동에 대응할 움직임. 그리고 그 다음, 또 그리고 다음…….
더욱더 많은 수를 읽을수록 고수고, 싸움에서 이길 승산도 커진다.
일악천의 말이 끝나고 갈지혁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 시간이면 언제나 혼자 무공 훈련을 하곤 했다. 그때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아, 너로구나.”
흠칫 했지만 이내 그 정체가 사황이라는 것을 알자 갈지혁은 다시금 몸을 돌렸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탓인지 사황은 곧잘 갈지혁을 따르곤 했다.
치익!
순간 사황이 갈지혁의 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예상하고 있었던 갈지혁은 가볍게 몸을 공중으로 날림으로써 그 공격을 피해 냈다. 그날 이후로 사황은 빈틈만 보이면 갈지혁에게 이를 들이밀었다. 물론 진짜로 물지는 않았지만 매번 당하다 보니 이제는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한 번의 공격이 실패하자 아쉽다는 듯이 사황은 옆으로 물러났다. 사황은 그저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갈지혁의 무공 훈련을 바라봤다. 사황의 눈빛을 받으면서 갈지혁의 몸이 움직였다.
결을 알게 된 후 많은 것을 깨달았다. 결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중에도 결이 있다. 이것을 잘만 이용한다면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도 상대를 중독시키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결을 깨닫게 되니 무공의 진전도 일취월장으로 늘었다. 검법이나 장법, 지법 등 모든 것이 결에 의해 움직인다.
발은 가볍게, 손은 무거우면서도 경쾌하게. 빠르게 격하게 갈지혁의 손이 움직였다. 더불어 다리는 땅에 붙는지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날아다녔다. 긴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다. 갈지혁의 얼굴을 가린 앞머리가 미칠 듯이 흔들렸다.
막 몸을 움직이던 갈지혁의 몸이 멈칫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갈지혁은 흔들리던 주먹을 멈추고 먼 하늘을 응시했다. 이상하다는 느낌과 동시에 집 안에 있던 일악천이 걸어 나왔다.
“또…….”
“생문이 열린 겁니까?”
“그래.”
갈지혁은 자신이 알아차린 이상한 느낌이 생문이 열리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예전엔 전혀 느끼지 못했거늘 결을 알게 되자 진법의 흔들림을 느낀 모양이다.
일악천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다. 얼마 전에 찾아왔던 약선의 손녀인 운하연이 떠올랐다. 그녀가 다시 온 건가,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떠났다면 분명 무림으로 갔을 터. 그곳에서 남만까지 가자마자 돌아오기 전에는 지금 다시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무림에 돌아가자마자 이곳에 돌아올 리도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일 확률이 높다는 건데…….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떨린다. 불안한 감정이 몸을 흔들었다. 비록 아무런 것도 알지 못하지만 무인의 감이 말하고 있다. 무엇인가 위험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고.
“또 가십니까?”
“……아니.”
느낌이 좋지 않으니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한 일악천은 갈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들어와라. 뭔가 느낌이 좋지 않으니까.”
“……?”
“들어오라면 와. 죽을지도 모른다.”
일악천 또한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위험하다는 감이 연신 몸을 두드렸다. 갈지혁은 더 이상 아무런 것도 묻지 않고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일악천은 조용히 가부좌를 튼 채로 문을 마주했다.
“만약 누군가가 찾아온 거라면 넌 입을 열지 마라. 내가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리하겠습니다.”
일악천 본인조차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조심해서는 나쁠 게 없다는 생각에 갈지혁에게 주의를 준 것이다.
반 각 동안 일악천과 갈지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독초 냄새가 가득한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답답함이 길어지던 와중 일악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최악이군.”
기척을 느껴버렸다. 지금 이곳에 찾아온 자의 정체를 아는 순간 일악천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갈지혁은 일악천의 표정을 보면서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갈지혁도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대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숫자는 잘은 모르겠지만 둘 이상.
갈지혁의 눈이 문을 향해 꽂혔다. 그리고 동시에 천천히 문이 열리며 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갈지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셋 중 둘은 갈지혁도 익히 아는 인물이다. 특히 가운데 있는 자는…….
“오랜만이오.”
가운데 서 있는 자가 말했다. 머리 중 반 이상이 희끗희끗한 노인이다. 그렇지만 당당해 보이는 모습과 한 지역을 지배하는 패자와도 같은 기세가 쏟아지는 자였다.
갈지혁은 그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독황독립문의 문주 지대익(支大翼)…….’
현 독황독립문 최고의 고수이자 정점에 위치한 자. 그런 그가 이곳에 나타났다.
이유는 분명 일악천을 만나기 위해서이리다.
“무슨 일이냐.”
“허, 삼십 년 만에 만난 아우를 이리 박대하시면 안 되는 법이오.”
“하, 하하핫! 아우? 그래, 네놈은 내 아우지. 아우이고말고! 난 그럼 천하에 다시없을 패륜아 아우를 둔 것인가?”
일악천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 둘은 결코 좋은 인연이 아니리라. 옆에 있던 사십 대 정도의 중년인이 검을 꺼내 들려고 했지만 지대익이 손을 들어 올렸다.
“가만있거라.”
중년인은 고개를 꾸벅하고 물러섰다.
지금 고개를 끄덕거린 중년인 또한 독황독립문 내에서 무시 못 하는 자다. 독에 대해서는 크게 빼어나지 않지만 검법만은 독황독립문 내에서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자다. 검을 들어 올리면 반드시 피를 보는 인물로 독황독립문에서 그를 제어할 수 있는 건 지대익뿐이다.
“형님이 그리 생각한다면 이 아우야 어쩔 수 없지.”
“쓸데없는 말 듣고 싶은 생각 없다.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을 터. 어서 말하고 냉큼 꺼져.”
“하하! 형님은 예전부터 참 머리가 좋소. 단숨에 내 심기를 파악하고 말이오. 나 또한 당신과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오랜만에 맘이 통했군그래. 쓸모없는 말은 다 빼고 본론을 말해.”
“단화초는 어디 있소?”
“네놈이 기어코…….”
일악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일악천의 표정으로 추측컨대 결코 참을 듯하지도 않다.
이글거리는 눈과 함께 일악천의 손이 뒤를 향해 움직였다. 옆에 있던 중년의 검객이 슬쩍 검집에 손을 댔고 지대익 또한 소매 속으로 손을 감췄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 상황을 타개한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만하시지요.”
“후후!”
지대익이 소매 속으로 감췄던 손을 빼자 일악천 또한 살기를 거뒀다.
갈지혁의 눈이 젊은 사내의 몸을 훑었다. 독황독립문에서 지냈던 갈지혁으로서는 처음 보는 자다. 아니, 그걸 떠나서 그 젊은 사내는 중원인이었다. 하얀 피부가 결코 남만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줬다.
‘고수다. 지금 싸운다면…… 열 번 싸운다 해도 전부 져.’
믿어지기 힘들지만 젊은 사내는 대단한 고수다. 분하지만 갈지혁은 상대를 제대로 보는 눈이 있다. 적어도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덤벼들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젊은 사내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단화초에 대한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번에 왔던 약선의 손녀인 운하연도 그것을 원했다. 그것뿐이라면 그냥 넘어가겠거늘 독황독립문의 문주인 지대익도 찾아왔다. 갈지혁이 아는 단화초는 단순한 독초다. 다만 요즘엔 그 식물 자체가 모습을 감춰 다시는 보기 힘들 독초라는 것만이 특이한 점이었다.
그렇지만 이토록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단화초가 있는 곳을 알고 있잖소. 예전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그냥 넘어갔지만 거사가 가까워졌기에 단화초가 반드시 필요하오. 내놓으시오.”
“웃기지 마라. 세상 그 누구에게도 단화초를 줄 마음은 없다. 더군다나 네놈에게 단화초가 있는 곳을 말해 준다면…… 천하가 죽는다.”
“그건 형님이 걱정할 것이 아니외다. 형님은 사독문에서 늙어 죽으면 그만인 몸. 그런 사람이 무슨 천하를 걱정한다는 거요. 우습소!”
지대익은 손으로 앞에 놓여 있는 탁자를 내려쳤다. 쩌적, 하고 탁자가 갈라지면서 위에 놓여 있던 풀들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악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가 할 말이 그게 다라면 나 또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곳에서 나가지 않는다면 살수를 펼칠 수밖에.”
“흥! 예나 지금이나 형님은 고집쟁이요. 세상과 타협할 줄을 모르지. 그러기에 형님은 항상 내 아래인 거요.”
굴욕적인 말에도 일악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할 말이 없다는 듯한 태도다. 지대익의 눈에 순간 살기가 일었다가 사라졌다. 분하지만 일악천을 죽일 수는 없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는 일악천의 옆에 있던 갈지혁을 향해 눈을 돌렸다. 비록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그래도 흰 피부를 모두 감출 수는 없다. 중원인의 모습을 한 갈지혁을 보자 지대익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갈지혁이오.”
“아, 네놈이 갈지혁이로군.”
지대익이 피식 웃었다. 기재지만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사내에 대해 그 또한 들어 본 적이 있다. 적어도 갈지혁 정도의 기재라면 지대익을 만나 봤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중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갈지혁은 지대익을 만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독황독립문 문도가 모두 모인 자리가 아닌 이렇게 사적으로 만난 것은 지금이 처음인 셈이다. 그랬기에 갈지혁은 지대익을 본 적이 있지만, 그는 갈지혁을 지금 처음 보는 것이다.
갈지혁은 손을 꽉 쥐었다. 지대익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기백에 밀리고 싶지 않아서다. 과연 한 문파의 문주가 되기에 모자라지 않는 모습이다. 당장이라도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강하다. 그렇지만 갈지혁을 의연한 모습으로 버텼다.
그 모습을 보고 지대익이 다시금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는 등을 보이고 있는 일악천에게 말했다.
“말년에 재미있는 장난감을 하나 키우시는 모양이외다.”
“……재미있는 장난감이 될지 네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독사가 될지는 두고 보거라.”
“하하! 형님의 말이라면 기대해 봐도 되겠지요. 물론 이 사독문을 벗어난 후에나 가능하겠지만……. 가자!”
말을 마친 지대익은 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단화초의 위치를 알아내고 싶지만 그는 일악천을 안다. 고문을 한다고 해도 결코 입을 열지 않으리라. 그리고 일악천이 죽으면 단화초의 위치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랬기에 이렇게 물러섰다. 대신 한 가지의 계책이 생각나 버렸기에. 그때 막 걸어 나가는 지대익을 향해 일악천이 소리쳤다.
“지대익! 내가 너에게 독황독립문을 양보한 것은 다 그녀를 위해서다. 네가 자꾸 이런 식으로 독황독립문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다면…… 난 이곳을 나가 네놈의 목을 벨 것이다.”
“파문된 자가 독황독립문의 이름에 대해서 거론하다니 우습소, 형님.”
지대익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나가자 방 안은 다시금 침묵에 휩싸였다.
일악천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걱정할 것 없다.”
갈지혁은 말없이 일악천의 뒤에 선 채로 그의 등을 응시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일악천이다.
“방금 전 그가 누군지 아느냐?”
“예.”
“그래. 그는 나의 사제(師弟)였다. 또한 스승님 밑에서 무공을 배우기 전까지는 지기이기도 했고 말이야.”
추레한 외모의 일악천과 화려하면서도 위엄 있게 생긴 지대익은 나이 차가 상당해 보였다. 그렇지만 실상 그 둘의 나이 차는 한 살밖에 되지 않았다. 모두 살아온 환경이 다른 탓이다.
독황독립문의 문주로 산 지대익과, 평생을 사독문에서 독초들을 만지면서 살아온 일악천. 더군다나 얼굴이 뭉개진 탓에 제대로 된 외형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단화초가 그토록 중요한 겁니까? 약선과 문주가 찾을 정도로. 제가 알기로 단화초는 그저 평범한 독초 중 하나입니다.”
“그래. 분명 그렇게 적혀 있지. 하지만 그건 무림을 시끄럽게 하지 않기 위해 거짓을 적어 놓은 것이다.”
“도대체 어떠한 독이기에…….”
이해할 수가 없다. 책에 거짓을 실어 놓으면서까지 지키려는 단화초의 비밀이 너무나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