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11화
“물어볼 게 있다.”
그 말에 갈지혁은 감았던 눈을 뜨고 일악천을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다.
“독왕이 되겠다는 생각…… 변하지 않았느냐?”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변한 적 없습니다. 제 꿈이니까요.”
갈지혁이 일악천에게 독왕이 되겠다고 말한 것은 일 년 전의 일이다. 그 후부터 갈지혁과 일악천은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비록 갈지혁의 독왕이 되겠다는 말에 혹해 무공을 가르쳐 주고는 있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독인이라도 만들어주자 하는 생각에 무공을 가르쳐 준 것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혼절한 상태에서도 독왕이 되겠다는 말에 일악천은 갈지혁이 꿈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난…… 포기한 줄 알았다.”
“죽어도 포기할 생각 없습니다.”
“그런가. 나만…… 포기했던 모양이군.”
나이를 먹어 버리니 의지도 약해지는 모양이다. 갈지혁을 처음 본 순간 잠시 불타올랐던 의지도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사그라져 버렸다.
“난 독왕이 되고 싶었다.”
“어르신도 말입니까?”
“그래. 내가 널 받아준 이유도 독왕이 되겠다는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갈지혁은 누운 채로 일악천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이 우수에 젖어 창을 통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꿈을 꾸는 갈지혁이기에 그 눈빛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독왕이 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일악천도 알고 있지만 갈지혁도 중원이 독왕이라는 호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얼마나 힘든 길인지도 잘 알지만 반드시 가고자 하는 길이다.
“다행히 치료가 늦지 않아서 며칠만 쉬면 될 거다.”
다행스러운 말이다. 내상을 입어 다시는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폐인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일악천이 갈지혁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그 화상으로 일그러진 듯한 얼굴이 정감 있게 보인다.
“따라올 자신 있느냐?”
“……?”
“독왕이 되는 길을 말이다.”
“물론입니다.”
갈지혁의 눈을 바라보던 일악천이 피식 웃어 버렸다. 결코 포기하지 않을게다. 더 이상 질문은 입만 아프다.
일악천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독왕은 무공이 강해야 되는 게 아니다. 물론 무공도 강해야지. 하지만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독왕이 될 수 있다면…… 여태까지 무림에 단 한 명의 독왕도 탄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지만 강함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어야 독왕이 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 나 또한 독왕이 되지 못했으니 잘은 모르겠군.”
“강함이 아니라면 어떻게 독왕이 되라는 겁니까?”
“강함은 중요하다. 무림은 강한 자를 동경하지. 하지만…… 독은 아니야. 독을 쓰는 자가 강하다면 그건 오히려 경계 대상이야. 심지어는 같은 문파의 동료들에게까지.”
독과 검은 그 성질을 달리한다. 우습게도 독을 쓰면 비겁한 것이고 검을 쓰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우스운 게다. 다른 분야에 파고들어 최고가 되었지만 독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나마 인정을 받으려면 사천당문처럼 기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것은 독인의 길이 아니다.
시키는 독을 만들고,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일악천이 생각하는 독인은 자유다. 자유롭지 못하고서는 독왕은커녕 독인도 되지 못한다. 어딘가에 매여 있는 자는 먼 곳을 볼 수 없다. 그런 자가 독인? 큭, 웃기기만 하다.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야 한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그리고 그 후에는…… 네 몫이겠지. 솔직히 현 무림에서 독왕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난 너에게 걸어 보려고 한다.”
갈지혁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일악천이 먼저 말했다.
“쉬거라. 너에게 가르쳐 줄 무공이 산더미다.”
여태까지 일악천이 가르쳐 준 무공은 몇 없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 양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일악천은 본격적으로 갈지혁을 가르치려는 모양이다.
“오 일이다. 그 안에 일어나지 못하면…… 죽는다.”
일악천이 씨익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갈지혁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걷기 시작했다. 일악천의 의지가 불타오르자 덩달아 갈지혁의 마음도 들떴다. 적어도 십 일 이상은 거동도 힘들었지만 매일매일 움직인 덕분에 갈지혁은 오 일째 되는 날 비록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긴 해도 걷을 수 있을 정도로 상처가 호전됐다.
물론 그것은 일악천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하루에 몇 번이나 이상한 검은 약재를 가져다줬다. 무엇인지 묻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몸 상태가 이토록 호전되는 게 가능했다.
일악천의 앞에 선 갈지혁은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수라독공의 성취는?”
“아직 미약합니다. 삼성 정도 익혔습니다.”
일악천이 갈지혁에게 수라독공의 오성 정도를 익힌 후에야 무공을 전수해 준다고 했다. 그렇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일악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독공은 결을 기본으로 한다. 그 결만 따른다면 태산도 부술 수 있다. 바위를 부순 것을 보니 이제 너도 어느 정도 결을 느낄 수 있을 게다. 수라독공을 익히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반쯤 아는군.”
수라독공에는 허례허식이 없다. 무엇인가에 얽매여 있는 것도 없다. 자유롭고, 경쾌하면서 또 무겁기까지 하다.
“자유 속에 내포된 광폭함이 수라독공이다. 네가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수라독공을 대성했다 할 수 있지.”
말을 마친 일악천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갈지혁의 안색이 파랗게 변해 버렸다. 일악천의 몸에서 지독할 정도의 독기가 터져 나왔다. 몸 주변에 녹색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갈지혁은 안다. 지금 일악천의 행동이 어떠한 것인지.
검을 예로 들자면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다. 검과 몸이 하나인 경지, 지금 일악천은 몸 자체가 독이 되어 버렸다. 일정 수준 이하의 무인들은 몸에 손을 대기만 해도 죽고, 심지어는 다가만 가도 죽는다.
더군다나 지금 일악천이 마음만 먹고 손을 뻗는다면…… 갈지혁은 죽는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왜 중원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일수만독이라는 별호를 기억하는지 알 것만 같다.
예전 독인이 되겠다는 말에 살기를 터트렸다 일악천의 모습은 조족지혈이었다. 내공을 제대로 운기할 수 없었기에 그가 인정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때 지금과도 같은 행동을 취했다면 여태까지 살아 있을 수도 없다.
지금 일악천은 독 자체다.
“수라독공의 팔성에 이르면 몸 자체가 독이 된다. 웬만한 무인들은 다가도 못 오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갈지혁은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일악천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독기는 대단했다.
“일 년 정도 전이면 너도 버텨 내지 못했을 게다. 네가 뱀이 있는 구덩이에 자주 가면서 내성이 생긴 탓에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일악천의 말은 사실이다. 비록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은 듯하지만 일 년 동안 갈지혁은 두 배가량을 성장했다. 일악천의 별 의미 없어 보이는 하나하나의 가르침이 지금의 갈지혁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수라독공을 팔성가량 익혔다면 그건 이미 독인의 수준을 뛰어넘은 것이다. 네가 이곳을 나가기 위해서는 수라독공을 팔성까지는 익혀야 한다. 그래야 무림에서 안 맞아죽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지.”
“……십성을 익힌다면 어찌 되는 겁니까?”
“그때는 천하(天下)가 네 아래에 있을 게다.”
일악천은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만큼 수라독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또한 자신 할 수도 있다. 수라독공을 만들어 내기 전 일악천은 무림을 흔들었던 최고의 고수였다. 수라독공은 부족했던 자신의 무공을 절충했다.
대성한다면 천하를 내려 볼 수 있다.
말을 마쳤던 일악천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리고 무림은 최악의 인물을 만나게 되겠지.”
* * *
일악천이 변했다. 언제나 방관자처럼 옆에서 보고만 있던 그가 이제는 손수 옆에서 가르친다. 움직임 하나하나, 내공의 안배에 대해서도 이래저래 이야기한다.
이제는 몸에 쌓인 독기도 모두 제거됐다. 일악천의 도움 덕분에 짧은 시간 만에 모든 게 해결된 것이다.
지금 갈지혁의 몸은 흙투성이였다. 그의 앞에는 일악천이 있다.
“와봐.”
손을 까닥거리는 일악천의 몸에선 여유가 느껴진다. 지금 갈지혁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일악천이었다. 그 날 이후 일악천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갈지혁과 겨루었다. 실전 경험을 위해서다.
발이 땅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손이 움직인다. 결을 따라 움직였지만 일악천은 쉽게 막아 냈다. 그와 동시에 발이 복부에 꼽혔다. 갈지혁은 그대로 땅을 뒹굴었다. 일악천이 호통을 쳤다.
“살아 있는 것을 상대할 때 결만 노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생물의 결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돌과는 달리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이나 인간의 결은 조금 다르다.
돌의 결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순식간에 변하지 않는다. 한 달이 넘는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변하는 것이 무생물의 결이다.
그에 반해 생물의 결은 조금 다르다. 결이라는 것만 노리고 공격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건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적에게 드러내는 꼴이 된다. 약한 자라면 상관없지만 일류 이상의 고수에게는 결만을 노리고 달려드는 짓은 멍청한 일이다.
갈지혁의 손이 재차 움직였다.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손을 일악천은 가볍게 막아 내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쉬지 마라! 기회를 만들고, 틈을 비집고 들어가!”
갈지혁의 손이 크게 흔들리는 듯하더니 손끝에서 무엇인가가 터져 나왔다. 미리 준비했던 독을 사용하는 것이다.
가루로 만들어진 독분이 일악천을 노렸다. 그런데 일악천이 가볍게 소매를 흔들자 오히려 갈지혁이 비틀거리면서 물러났다.
“바람의 방향을 놓치지 마라. 바람을 등져야지 맞선 상태로 독분을 뿌리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내공을 불어넣은 가벼운 움직임에도 오히려 독의 방향이 바뀌어 버렸다. 바람을 등지지 않고 마주한 상태로 독분을 사용한 탓이다. 기본적인 것이지만 막상 싸우는 와중이라면 놓치기도 하는 작은 실수다. 그렇지만 독을 쓰는 자에겐 이만한 실수도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갈지혁의 손에서 녹색의 기운이 몰리기 시작했다. 반면 일악천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왼쪽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밀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왼손은 등짐을 졌고 오른쪽 발은 어느 때건 움직일 수 있도록 가벼워 보였다.
갈지혁은 그대로 자신의 손을 휘둘렀다. 결을 이용한 공격이라면 어느 정도 일악천에게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갈지혁과 일악천의 손이 부닥쳤다. 그런데 아무런 기운도 일지 않던 일악천의 손에 갈지혁은 오히려 뒤로 밀려나 버렸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몸 안이 미칠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큭!”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갈지혁이 주저앉고야 말았다.
“탄이라고 한다. 남의 힘을 받아서 오히려 상대에게 충격을 주는 거지. 독을 쓰는 자와 상대할 때 주의해야 할 거다. 독기를 손으로 받아 몸으로 돌리면서 반대로 퉁긴다. 알겠느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갈지혁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일악천의 말을 머릿속에 각인시킨 것이다.
일악천은 괴로워하는 갈지혁을 놔두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그마한 단환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먹어라.”
갈지혁은 말없이 단환을 받아먹었다. 무공의 정진에도 그렇지만 갈지혁의 몸 상태도 일악천은 상당히 신경 썼다. 저녁마다 갈지혁의 몸 상태를 확인하면서 일악천은 약재를 만들었다.
일악천이 만들어주는 약재들은 항상 몸을 개운하게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힘겨워하던 호흡이 점점 고르게 변하면서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악천이 갈지혁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 산에 가야 할 게다.”
“산……에 말입니까?”
“그래.”
갈지혁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일악천이 말한 산이라는 곳이 어떠한 곳인지 대충 아는 탓이다.
사독문 내부에는 많은 장소들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 일악천이 가지 말라고 한 곳이 있다.
사산(巳山)이 바로 그곳이다.
“산에 가서 자황(茨惶)을 구해와.”
자황이라면 음기가 있는 독초다. 남만에서는 쉽사리 구할 수 없는 독초로 그나마 있을 확률이 있는 곳이 바로 동굴이다.
“사산에 가면 정상 부근에 커다란 동굴이 있다. 그 안에 자황이 자생한다. 네가 가지고 와라.”
“알겠습니다.”
“이 녀석을 데리고 가라. 시간이 얼마 걸리던 상관없으니 반드시 가져와라.”
말을 마치면서 들어 올린 소매 속에서 사황이 고개를 내밀었다.
갈지혁은 사독문 안에 있는 많은 곳을 가봤다. 그렇지만 유독 사산이라고 불린 이곳은 가본 적이 없다. 일악천이 함부로 갔다가는 목숨을 잃을 거라며 이곳은 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이 일 년 전이다. 지금 일악천은 갈지혁에게 이곳에 가서 독초를 구해 오라고 했다.
그만큼 성장했다는 거다.
“가만히 좀 있어라.”
소매 속에서 연신 꿈틀거리는 사황에게 갈지혁은 한 마디 했다. 물론 뱀이 알아들을 리는 없겠지만 신기하게도 사황의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산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갈지혁의 온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주변에 흐르는 자연의 기운이 뭔가 다르다. 독분이 공기 중에 섞여 있다. 지나가면서 흔히 보이는 꽃들도 독초의 일부다.
‘대단하군.’
독의 길을 걷는 자라면 누구라도 눈이 휘둥그레질 게다. 구하기 힘든 독초들이 마치 잡초 마냥 마구 자라나 있다. 그렇지만 갈지혁이 구해야 할 독초는 저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