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2화
사황이 옷소매 속에서 목덜미 뒤로 기어 올라왔다. 고개를 내민 사황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황 또한 이 지독한 독기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갈지혁은 마구 자란 풀 사이를 걸으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이런 곳에는 으레 독을 지닌 생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뱀일지, 전갈일지, 아니면 나방이나 벌 같은 날아다니는 생물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의 갈지혁이라면 일정 수준의 독을 버티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그래도 그렇게 마음만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잘못해서 자신의 어깨에 있는 사황 같은 놈에게라도 걸리면 그대로 즉사다.
물론 일악천이 이곳으로 보낸 것을 보면 갈지혁이 버틸 수 있을 정도일 게다. 그리고 무엇인가 깨달음이나 도움을 주기 위해 이곳을 오게 한 게 분명하다.
최근 알게 된 것이지만 일악천이 시킨 모든 것 중에 의미가 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자잘한 행동 하나도, 깨달음을 주거나 무공의 증진에 도움을 준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시간을 버리면서까지 쓸데없는 일을 하게 하지 않는다.
일악천은 강하다. 그의 강함은 갈지혁을 미치도록 부럽게 만들었다.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일수만독이라는 위명은 결코 허튼 것이 아니다. 그가 마음만 먹고 독을 사용한다면…… 수천 명이 단숨에 중독되어 버릴 게다. 결코 허언이 아니다.
일악천은 실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일악천이 왜 사독문에 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그렇지만 대략 짐작은 간다. 예전에 사독문을 찾아왔던 독황독립문의 가주인 지대익이 원인인 듯했다. 그리고 일악천은 그에게도 말했다. 계속해서 독황독립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면 손수 나가서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그 말은 곧 일악천이 이곳을 나갈 수 있음을 지대익에게 말한 것이 된다.
그러나 지대익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곧 그 또한 알고 있다는 말이다.
신기한 관계다. 그리고 그건 갈지혁이 참견하면서 들어갈 부분도 아니다.
“치익!”
갑작스러운 사황의 소리에 갈지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을 본 사황이 그것을 탓하는 듯했다. 그제야 갈지혁은 주변을 둘러봤다. 무엇인가 감각이 꿈틀했고 갈지혁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파악!
손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터져 나오면서 무엇인가와 맞닿았다. 손을 거둔 후에야 갈지혁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나무 위에서 뱀이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물론 갈지혁을 노렸을 테고.
“고맙다.”
갈지혁은 사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황은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갈지혁의 목을 자신의 몸으로 감으면서 연신 꿈틀거렸다.
‘신기한 녀석.’
뱀이면서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것이다. 지금만 해도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신호를 주지 않았는가.
몇 걸음 더 걸어 나가던 갈지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주변이 온통 살기투성이다. 독기도 가득해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다. 사황도 이빨을 내밀었다.
그만큼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들은 강력했다.
‘뱀? 아니, 뱀뿐만이 아니야.’
나무 위에는 뱀들이 있고, 땅에는 자그마한 벌레들이 있다. 아래를 살피던 갈지혁은 개미를 보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홍개미다. 몸집은 일반 개미들을 다스리는 여왕개미보다도 세 배는 크다.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크기를 지니고 있고, 몸은 붉다. 단순히 큰 개미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독을 가진 놈이다.
무인이라면 죽지는 않겠지만 며칠 고열을 앓고 자리에 드러눕게 할 정도는 충분하다.
먼저 달려들지는 않지만 건드리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분명 이 근처는 홍개미의 서식지다. 건드리면 달려드니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다. 더군다나 홍개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십 가지가 넘는 뱀과, 독충들도 있다.
특히 개중에는 무시 못 할 놈들도 몇몇 모습이 띤다.
독인이 된다면 모를까 지금 이 길을 그냥 걷는 건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없다. 일악천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 그는 갈지혁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가르치려고 했던 것일까.
일악천이 구해 오라는 독초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길을 지나야 한다. 그렇지만 우습게도 이 길은 지날 수 없다.
그때였다.
막 일악천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고민하던 갈지혁의 품 안에서 사황이 떨어져 내렸다. 정신을 차린 갈지혁은 급히 사황을 다시금 챙겨들려고 했지만 손을 멈추고야 말았다.
사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황은 갈지혁이 망설이던 그곳으로 들어섰다.
망설이지 않았고, 무엇인가 꺼리는 듯하지도 않다. 그런데 길을 막고 있던 뱀과 독충들이 길을 비키기 시작했다.
사황이 가는 길이 천천히 뚫리기 시작했다.
‘저, 저건…….’
사황은 마침내 반대편에 가서 갈지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모습이다. 어서 오라는 듯한 사황의 눈빛을 보면서 갈지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를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깨달았다.
‘사황이 건넜다. 뱀이라서 가능했다? 아니!’
뱀이라서 가능한 게 아니다. 뱀이나, 독충들이 볼 때 사황 또한 갈지혁과 마찬가지로 외부인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갈지혁과 사황의 다른 점이 있다.
갈지혁은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그에 반해 사황은 자신을 뽐내는 듯이 기어갔다. 몸에서는 독기가 풀풀 날렸다. 그렇게 되면 적으로 간주해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지독한 독기에 놀란 생물들이 길을 열었다. 아무도 사황에게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갈지혁은 마음을 다잡은 듯이 그곳을 향해 한 발 내밀었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갈지혁은 수라독공을 운기했다.
수라독공을 안으로 갈무리하지 않고 밖으로 표출했다.
도박이었다.
‘확률은 반반! 실패하면…… 꼴사나운 모습이 되겠지.’
갈지혁은 자신 있게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나무에 걸려 있던 뱀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렇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걸었다. 뱀이 꿈틀했지만 결국엔 움직이지 않았다. 독충도 마찬가지였다. 독을 가진 놈들이 슬슬 옆으로 물러났다. 갈지혁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사황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그제야 갈지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태연한 듯 보였지만 적지 않게 긴장했다. 특히 중간 부근에서는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곳에서 무엇인가에 물려 중독된다면 살아나가기도 힘들다.
약해진 동물이라면 바로 먹잇감이 될 테니까.
갈지혁의 몸을 타고 사황이 다시금 옷 속으로 사라졌다. 사황의 움직임을 느끼며 갈지혁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봤다.
‘약육강식이야. 동물은 자신보다 강해 보이면 싸우려 들지 않지.’
기본 중에 기본이었거늘 지금 깨달아 버렸다.
그때 옷 속으로 들어온 사황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며 치익거렸다. 갈지혁이 손으로 사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다시 가자.”
사황 덕분에 쉽사리 건넜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일악천이 구해 오라고 한 자황은 이 산의 꼭대기에 있는 동굴에나 자생한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갈지혁은 몸을 감춘 채로 호흡도 멈췄다. 하늘을 뒤덮을 듯이 날고 있는 나방 탓이다. 남만에 있는 나방의 종류는 알려진 것만 해도 십만 종(種)가량이다.
나비와 나방은 매우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나비와 나방을 분류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더듬이다. 나방의 날갯짓에서 독분이 흩어진다.
갈지혁은 모공까지 닫은 채로 몸을 숨겼다.
산란기에 이른 나방은 난폭해진다.
쉽게 다가서서도 안 되고, 함부로 대하는 건 더더욱 안 된다. 독의 성질을 알기 전에 중독된 독을 해독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더군다나 십만 종이 넘는 나방이라면 더욱 그 독의 종류를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 갈지혁은 독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내성을 쌓았다. 독분이 몸으로 스며들어도 버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버텨 내지 못한다고 해도 어떠한 독인지는 알 수 있다. 그것이 목숨을 걸고 독의 길을 걸은 갈지혁이 얻은 성과였다.
웬만한 독은 몸으로 접하면 그 성질을 알 수 있다. 그가 여태까지 몸으로 체험한 독의 수만 해도 오백여 종류가 넘는다. 그것도 어디서나 쉽게 접하기 힘들 정도의 지독한 독이다.
죽을 것과 같은 고통. 사람은 즐거웠던 일은 잊지만 괴로웠던 기억은 오랫동안 기억한다. 독에 대한 느낌도 같다. 어떤 독은 복부를 칼로 후비는 듯한 고통을 줬다면 다른 독은 머리를 흔들리게 하는 충격을 준다.
갈지혁은 기회를 엿보다가 슬그머니 움직였다. 처음 보는 나방들이다. 한 놈쯤 잡아가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다. 모공을 닫고 호흡을 없애니 체온도 사라졌다. 나방들은 갈지혁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쉬익!
그의 손이 나방의 암수를 하나씩 잡아냈다. 그 짧은 순간에 암놈과 수놈을 판단한 것이다. 갈지혁의 손에 들린 한 쌍의 나방은 이내 그가 들고 다니는 자그마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나방의 독분은 모르고 당한다면 치명적이지.’
어떠한 독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나방의 독분은 더욱 그렇다. 많은 나방의 종처럼 독을 지닌 숫자도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개중에 하나의 독에 당하고 순간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지혁은 계속해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생전 보지도 못했던 독충들이 많이 있다.
산은 험했다. 나무들에는 온갖 뱀들이 대롱대롱 걸려 있었고, 땅에는 듣도 보도 못한 독충들이 기어 다닌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역이다.
그래도 가야 한다. 일악천은 얼마의 시간이 걸리던지 상관없다 했다. 그만큼 이 길이 힘들 거라고 말한 것이다. 반드시 구해 가야 한다.
아침에 출발한 길이거늘 서서히 해가 지고 있다. 가뜩이나 산은 해가 일찍 진다. 원래 같았다면 반나절이면 충분히 왕복할 수 있을 정도지만 독충들이 너무 많아 거동이 쉽지 않아 이리 오래 걸린 것이다.
해가 사라질 무렵 갈지혁은 일악천이 말했던 동굴을 발견했다. 그가 말했던 곳에 위치에 있는 동굴을 향해 갈지혁은 천천히 다가갔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 전 갈지혁은 안에서 풍겨 오는 기운에 움찔해 버렸다.
‘음기(陰氣)가 가득해.’
남만은 더운 날씨로 인해 음기가 있는 풀이 거의 없다. 남만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독초도 음이 아닌 양에 의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드물게도 이 동굴은 음기로 충만했다.
동굴 안으로 한 발 내딛자 왠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남만에서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은 들어 본 적도 없다.
자황을 구해 오라고 했을 때부터 음기가 있는 장소를 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상당한 수준이다.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기에 갈지혁은 손을 소매 속으로 넣었다. 가장 위험한 순간 그의 목숨을 구해 줄 것은 독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일악천에게 배웠던 가르침이다. 목숨이 경각이 달렸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기에 의존하게 된다. 갈지혁에게 무기는 독이다.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 아니다.
더군다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사황도 믿음직스럽다. 사람도 아닌 뱀을 믿는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여태까지 사황의 행동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적어도 사황은 지금 갈지혁에게 유일한 동료이자 목숨을 구해 줄 은인일지도 모르니까.
동굴 안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깊었고 어두웠다. 안력을 돋우면서 갈지혁은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주변에 습기와 음기 탓에 평소 사독문에서 보지 못했던 독초와 약초들이 종종 보였다. 그렇지만 갈지혁의 눈은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자황은 독기가 심한 풀이다. 주변에서는 아무런 것도 자라나지 못한다. 사방 삼 장. 그 안에 아무런 것도 자랄 수 없을 정도로 땅의 정기를 먹어 버린다. 다른 독초나 풀들이 먹을 영양분까지도 먹어 버리는 탓에 언제나 자황 주변은 깨끗하다.
동굴 안이 갈지혁의 발자국 소리에 조용히 울렸다. 갈지혁의 예상대로라면 자황의 근처에는 맹독을 지닌 생물들이 있을 게다. 음기를 지닌 풀이 적지 않은 이곳에 자황은 분명히 생물들에게 매혹적일 게다.
당연히 주변에는 음기를 지닌 독물들이 있을 게 분명하다.
걸어가던 갈지혁의 다리가 멈췄다. 자색 빛을 토해 내는 저 풀은 분명 자황이다. 동굴 가장 안쪽에 이르러서야 자황을 발견했다. 자황이 있는 곳 주변엔 흰색 뱀들이 우글거렸다.
백황사(白皇巳)다. 남만에서 보기 힘들다고 알려진 백황사가 이곳에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근방에 다른 종류의 독물들이 없는 것은 바로 저 백황사 때문이리라. 그만큼 백황사는 지독한 독을 지니고 있다.
백황사라면 아무리 갈지혁이라고 해도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사천당가에는 수많은 독이 있다. 그 하나하나가 얕볼 수 없지만 개중에서가장 뛰어난 독을 가리며 당문십독(唐門十毒)이라 한다.
그리고 그 열 가지 독 중 하나가 바로 백황사의 독액으로 만든 것이다.
더군다나 동굴 안이라 도약해서 자황을 가져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까처럼 독기로 상대를 제압하려던 갈지혁의 품 안에 있던 사황이 다시금 소매에서 빠져 나왔다.
이번에도 사황이 백황사가 있는 곳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 극히 다른 모습을 보았다. 독기를 풀풀 날리며 기선을 제압하던 아까 와는 달리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럽다.
사황은 백황사 사이를 유유히 기어서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던 갈지혁은 그제야 일악천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언제나 강해서는 안 된다. 유연함과 강함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는 독기를 이용해 상대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했다면 백황사는 이를 들이밀었을 게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영역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뱀이니까.
일악천은 지금 사로를 걷는 훈련을 시킨 것이다.
이곳은 작은 사로다. 사로를 걷는 것은 이보다 훨씬 어려울 게다. 갈지혁은 백황사 사이로 발을 들이밀었다. 왠지 모르게 사황이 먼저 움직이니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갈지혁은 천천히 백황사 사이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