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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3화 (13/200)

# 13

13화

‘신경을 건드리면 안 돼.’

백황사는 예민하다. 신경을 건드리면 바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백황사다.

사로에는 수많은 독물들이 있다. 아까처럼 강함으로 제압해야 하는 놈들이 있다면 지금처럼 오히려 살기를 죽여야 하는 놈도 있을 것이다. 일악천은 그것을 가르치려고 했던 모양이다.

사황과 함께 가라고 한 이유도 알겠다. 사황은 뱀이니 만큼 그런 부분에서는 육감적으로 뛰어나다.

오늘 또 한 가지를 배웠다. 사람은 강함만이 아니라 유함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갈지혁의 손이 자황에 닿았다.

“휴우!”

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 가득 놓여 있는 서적들을 정리하느라고 이틀 밤을 꼬박 샜다. 피곤할 만도 하련만 눈은 빛난다. 하고자 한 것을 했으니 끝마쳤을 때의 성취감이야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여인의 모습은 아름답다. 이색적인 파란색 눈은 영롱하고 코가 오뚝한 것을 보면 심기도 곧은 것 같다.

이곳은 약선문(藥仙門)이다. 대대로 뛰어난 의원들을 배출하는 문파로 무림에서 상당히 신망이 깊은 곳이다. 약선문은 의술로 유명하다. 그들은 무림에서 유명한 의원들로 활동하고, 당대 약선문의 문주를 약선(藥仙)이라고 부른다.

약선이 되기 위해서는 의술뿐만이 아니라 무공도 빼어나야 한다. 그리고 지금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이 당대 약선인 운구룡(雲救龍)의 손녀인 운하연이다.

그녀는 요즘 상당히 바쁘다. 중원 곳곳에서 천천히 병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오십 년 전부터 걱정하던 병이 돌기 시작했다. 아직은 그 병은 미미하지만 이내 중원을 뒤덮을 지도 모른다.

‘반드시 막아야 해.’

어떠한 병인지 알고, 어떠한 약재를 써야 하는지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구룡과 운하연은 걱정이 태산이다. 알지만 고칠 수 없는 병이다. 가장 중요한 하나의 약재가 없는 탓이다.

단화초.

자생하는 곳이 극히 드물다. 아니, 극히 드문 수준을 떠나서 이제는 구할 수조차 없는 전설의 풀이 되어 버렸다. 단화초가 약초이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약초이기도 하지만 독초다. 그것도 마음만 먹으면 단 일수에 구파 일방의 하나를 멸문시켜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지독한 독성을 지닌.

백 년 전 단화초의 독성을 알게 된 독인 하나는 그것을 이용해 무림의 제패를 꿈꿨다. 그러다가 도중에 격살 당했지만 반쯤 완성된 단화초의 위력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이것을 그대로 무림에 둬서는 안 된다는 구파 일방과 오대세가의 수뇌부들은 급히 온 중원을 뒤졌다. 무림인들이 대거 동원되어 단화초를 없애기 시작했다. 단화초를 숨기는 자는 엄벌에 처했고, 그렇게 오십 년이 흐르자 서서히 그 풀은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는 단화초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무도 단화초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단 한 명을 제한다면.

일악천이다. 일수만독이라고 불리는 그는 단화초가 어디 있는지 안다. 단화초의 특성상 결코 혼자 피지 않는다. 한 송이라도 있다면 그곳은 이미 꽃밭을 방불케 할 정도로 단화초가 가득할 게다.

문제는 일악천은 입을 함구했다. 물론 이해는 간다. 그 독이 무림에 퍼진다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혼란이 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단화초가 없다면 독이 퍼졌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자가 죽는다.

역병(疫病)이 돌 게다. 사람들은 죽어나가지만 아무도 치료하지 못한다. 단화초가 없다면…… 치료약은 만들 수 없다.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 단화초가 있는 곳에 대해서 몇 가지 단서를 얻었다.

일악천이 말했던 것 중 몇 가지를 조합해 그에 맞는 장소들을 뒤지고 있다. 약선 운구룡은 지금 무림을 돌고 있다. 운하연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단화초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약선문을 운하연이 담당하고 있다.

“아씨!”

“왜 그렇게 호들갑이니? 좋아한다던 사내에게 고백이라도 받은 거야?”

약선문을 담당하는 운하연은 침착하고 사려 깊은 여인이다. 환자들의 앞에서는 언제나 한결같이 미소를 잃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신녀(神女)라고 칭하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짓궂다. 장난을 치는 것도 좋아해 어릴 적에는 언제나 사고뭉치였다.

“아이참, 아씨도! 왜 또 그 이야기예요.”

시비는 쌜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이곳에 여섯 살 때 와서 운하연과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그때 그런 시비의 뒤를 따라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운하연은 급히 안면에 미소를 띠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연노노. 잘 지내셨어요?”

연노노는 신비한 노인이다. 약선문에 일 년에 한 번쯤 찾아오는 자로 할아버지의 친한 친우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는 약선에게도 그렇고 운하연에게도 항시 존대를 했다.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어딘가 모르게 신비한 인물이다.

“약선께서 안 계신다기에 아가씨나 한 번 보러 이렇게 왔습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안 계시기에 보지 못했으니까요.”

“아! 그때…….”

그때라면 분명 남만에 갔을 때다. 상당히 더운 남만의 날씨에 고생 꽤나 했다. 일악천을 만나러 갔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 생각을 하니 운하연의 얼굴이 다시금 찡그려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연노노는 놓치지 않았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에요. 그냥 작년 이맘때 고생했는데 아무런 것도 얻지 못한 게 생각나서요.”

“최선을 다하셨다면 언젠가 보답을 얻을 겁니다.”

말을 마치고 미소를 짓던 연노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뇨. 최근 들어 약선문에서 나간 적도 없는데요?”

“흠…….”

연노노의 눈이 계속해서 운하연의 얼굴을 훑어봤다. 예전과 느낌이 다르다.

“관상이 변하셨습니다.”

“관상이 변했다뇨?”

연노노는 관상을 잘 본다. 그랬기에 약선문의 사람들은 그에게 찾아와 자신의 관상을 봐달라고 하곤 했다.

연노노의 관상은 대단했다. 곧 일어날 일도 대번에 맞췄고 그에 대한 대처법도 말해 줬다. 약선도 언제나 연노노의 관상법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곤 했다. 그 정도라면 어디를 가나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면서.

그랬기에 어렸을 때부터 운하연도 관상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 봤다. 하지만 여태까지 관상이 변했다는 말은 또 처음이다. 그것도 겨우 이 년 만에.

“이상하군요. 쉽사리 변할 게 아니었는데…….”

“변해서 좋으면 다행이죠. 그런데 그렇게 쉽게 관상이 변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운명을 바꿀 사람을 만나신 듯합니다. 누군가 만나셨습니까?”

“아뇨. 최근에 딱히…….”

수많은 환자들을 만났지만 개중에서 그녀의 운명을 바꿀 정도의 인물은 없었다. 계속해서 운하연을 바라보던 연노노가 말했다.

“흠, 바뀐 게 하루 이틀 된 것 같지가 않군요. 족히 일 년 정도는 된 듯합니다.”

“일 년이요?”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일악천의 모습이 떠올랐다. 일 년 정도라면 남만에 있을 때니까.

일수만독이라면 분명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왠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일악천과 자신은 연이 없는 인물이다.

운하연이 아는 한에서 일악천은 결코 무림에 나오지 않을 게다. 약선은 일악천이 사독문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말해 주었었다. 그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 설령 그곳에서 죽을지언정 말이다. 그런 그가 운하연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겠는가.

그때 문득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얼굴은 가려져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으로 가리고는 있지만 그 눈만큼은 또렷이 봤다.

죽어 있지 않은 눈이다. 사독문에 갇혔으면서도 눈에 생기가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물었고, 나중에 다시 만날 때 나이를 묻겠다 했다. 사독문에 있다면 나올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한 이유는 그녀도 알 수 없다.

단지 다시 만날 거라는 강렬한 생각에 그리 말한 것뿐이다.

이름이 뭐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눈빛은 아직도 기억한다. 활화산과도 같은 뜨거움과, 냉혹한 맹수의 차가움을 동시에 담고 있던 그 눈을.

‘……갈지혁?’

잠시 머리를 싸매자 이름이 생각났다. 분명 그는 갈지혁이라는 인물로 독황독립문에서 파문당한 자다. 그렇지만 이내 운하연은 고개를 흔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자는 아니야. 그는…… 독의 길을 걷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사독문에서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운하연은 생각을 접고 연노노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 * *

사독문의 모든 곳이 익숙하다. 눈을 감고도 주변의 경관이 보인다고 할 정도라면 말해 무엇 하랴. 갈지혁이 사독문에 들어온 지 어언 오 년이 지났다.

많은 게 변했다. 완전히 청년이 되었고, 독황독립문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독에 대한 내성도 상상을 불허한다. 몸으로 접한 독의 종류만 해도 수천 가지다. 모두 악으로 버텨 냈고, 이제는 웬만한 독에는 내성이 생겼다.

수라독공도 육성에 이르렀다. 이제는 눈을 부릅뜨면 녹색 안광이 터져 나오는 경지다. 결을 잡는 것도 익숙해 이제는 딱히 그것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처음 일악천과의 비무 때는 연신 두드려 맞기에 바빴다. 손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꼴사납게 뒹굴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비록 상대가 되지 못하긴 하지만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팍!

녹색 손바닥 두 개가 부닥치면서 파공음을 토해 냈다. 갈지혁의 몸이 세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몸을 비틀었다. 그대로 일악천의 발이 가슴을 노렸던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지만 갈지혁은 급히 소매를 흔들었다.

펑!

중간에서 갑작스럽게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일악천이 하독한 독을 갈지혁이 막아 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용독술이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용케 그것을 잡아냈다.

오히려 이번에는 갈지혁이 반격을 했다. 손에 끼여 있는 나무토막 사이에서 무엇인가 작은 것이 튕겨져 나갔다.

독환단! 갈지혁이 손수 만든 것으로 당하는 즉시 구토와 어지러움을 느끼며 혼절하게 된다. 그렇지만 상대는 일수만독이라고 불리는 희대의 독인이었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손에 의해서 오히려 독환단이 갈지혁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바, 다시금 나무토막 사이에서 독환단과 비슷한 것이 튀어나오면서 그것을 상쇄시켰다.

일악천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녹색 기운이 회오리쳤다.

독기가 코로 스며들어왔다. 다리가 풀렸지만 이내 갈지혁의 몸이 움직였다.

내성으로 치자면 그 누구 못지않다. 일악천의 독을 버텨 낸 것이다.

“좋아, 여기까지.”

일악천이 손을 거뒀다. 갈지혁은 땀을 닦아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정확하게 당한 것은 없지만 계속해서 수세였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지 못한 채로 연신 막아 내기 급급했다. 대단할 정도의 발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멀었다.

변한 건 세월뿐이 아니다. 일악천과 갈지혁의 사이도 변했다. 비록 말을 많이 하는 건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게 됐다.

갈지혁에게 일악천은 단순히 무공을 가르쳐 주는 사람 이상이었다. 정을 받아보지 못했다. 어머니를 제하고는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독인이 되기 위해서는 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강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되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이후부터 그런 생각을 버렸다.

오 년이다. 자그마치 오 년을 둘이서 보냈다.

사람과 떨어져 홀로 지내던 일악천에게 정이 생기기 충분한 시간이다. 더군다나 그는 갈지혁의 의지에 마음이 움직이지도 않았던가. 독왕이 되겠다고 다시 말하는 갈지혁을 보며 일악천은 이미 마음을 줬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네가 걱정할 필요 없으니 열심히 연습이나 해라.”

최근 들어 일악천의 얼굴 표정이 좋지 않다. 나이도 많은데 이런 독기가 가득한 곳에서 평생을 살고 있다. 몸이 상한 듯하다.

그렇지만 그는 갈지혁 앞에서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용케도 갈지혁은 얼마 전부터 연신 괜찮냐고 물어보고 있다.

일악천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그는 엄청나게 땀을 쏟은 후에도 몸을 움직이고 있다.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오래 살긴 오래 살았어.’

칠순을 훌쩍 넘어 이제 여든을 바라본다. 무인 중에서 백 세를 넘게 사는 자들이 허다하긴 하지만 삶에 욕심은 없다. 사독문에 들어오면서 모든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가. 그래도 지금은 꿈이 있다.

저 어린놈을 독왕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품속에 있던 사황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일악천이 조용히 사황을 어루만졌다.

‘사황, 네놈도 이제는 저 녀석을 잘 따르는구나.’

처음엔 갈지혁이 붙인 사황이라는 이름이 어색했다. 뱀에 이름을 붙일 생각은 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이제는 사황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스러워졌다.

변해 버렸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눈도 어느 정도 예전처럼 변한 듯하다.

왠지 모르게 몸이 나른하다. 예전 중원에서 봄이라는 것을 맞이했을 때의 기분이 이랬다. 나긋나긋한 것이 잠이 쏟아진다.

일악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계속해서 눈꺼풀이 떨어진다.

수라독공을 펼치던 갈지혁은 쿵,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옆을 향해 고개를 돌린 갈지혁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일악천이 돌 위에 앉아 있다가 그대로 쓰러져 버린 것이다.

“어, 어르신!”

갈지혁은 급히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맥을 짚어 보니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기는 한데…….

‘위험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갈지혁은 급히 일악천을 업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에 그를 눕힌 갈지혁은 옆에 있는 창고를 열고 약재를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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