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화
독을 쓰는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경공이다. 독인들은 아무래도 검을 쓰는 무인과의 싸움에서는 거리를 벌려야 한다. 독을 쓰기 전에 상대가 달라붙으면 그만큼 당혹스러운 것도 없다.
채 독을 쓰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독문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경공인 것이다. 그리고 남만의 최고 독문인 독황독립문답게 독황군림계라는 경공은 가히 천하일절이었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갈지혁의 몸이 바람처럼 주변의 풍경에 스미며 사라졌다.
그의 몸은 무섭게 앞으로 쏘아지며 달리고 있었다. 사황은 그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지 소매 속에 들어가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갈지혁은 다리를 더욱 급하게 움직였다. 일악천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이 그를 급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지만 갈지혁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연족이 머무는 곳에 도착했다.
백여 채 정도에 달하는 집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이 근방을 지배하는 부족이다. 물론 무공을 모르는 자들이기에 갈지혁에게는 우스운 상대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살수를 펼치면서 대황을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록 독황독립문과 관계는 없지만 하나의 부족이 단 하루 만에 독에 의해 멸문당한다면 당연히 눈이 가기 마련이다. 잘못하면 뒷덜미를 잡힐지도 모른다.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기 위해 갈지혁은 걸어서 연족의 부락에 들어섰다.
갈지혁은 연족의 부락의 정중앙에 있는 조각으로 된 상 앞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하얀 피부의 중원인. 밤이라고는 하지만 평생을 함께 한 자들이다. 이방인의 등장에 하나둘씩 문이 열리며 급기야는 몇십 명에 달하는 연족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손에 창을 들고 갈지혁의 주변을 둥그렇게 포위했다.
갈지혁은 눈을 감은 채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연족의 사내들의 외침이 계속해서 귀를 간지럽게 했다. 남만의 말과 중원의 말은 다르다. 하지만 어머니가 남만인인 탓에 갈지혁은 두 곳의 말 모두를 알고 있다.
연족의 사내들이 잠잠해진 것은 덩치가 커다란 사내가 나타난 다음이다.
남만에 있는 대부분의 부족이 그렇지만 특히 한 지방을 잡고 있는 연족의 족장은 가장 강한 사내다. 그가 나타나자 사내들은 창대로 땅을 두드리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창대가 연신 땅을 울렸다.
연족의 족장이 나타나자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는 자신보다 무려 머리 하나는 컸고 덩치도 곰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했다. 하지만 갈지혁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갈지혁과 마주한 연족의 족장이 말했다.
“이방인은 환영하지 않는다.”
“당신이 족장이오?”
유창한 남만어에 연족의 족장은 놀란 듯했다. 어렸을 때부터 남만에서 살았던 갈지혁은 중원보다 남만어에 능통했다. 그것을 모르는 족장으로서는 다소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적어도 갈지혁은 중원인처럼 흰 피부를 가졌으니까.
“부탁이 있어서 왔소. 결코 악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니 내 부탁을 들어주시오.”
“부탁? 내가 왜 너의 부탁을 들어 줘야 하나.”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쉽게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갈지혁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연족의 족장은 자신의 커다란 주먹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냉큼 꺼지지 않으면 박살을 내주지. 네놈 같은 흰 피부를 가진 놈들만 보면 역겹다.”
자신이 있다는 말투다. 갈지혁 또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무식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거대한 연족의 족장과 마주하니 상당히 왜소해 보였다.
“대황이라는 약재가 있소. 그것을 얻으러 온 거요. 부탁이니 넘겨주시오.”
“부탁을 할 거면 대가가 있어야지. 내가 너에게 대황을 준다면 넌 나에게 무엇을 줄 거냐?”
갈지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 교환의 조건이 될 수도 없을 거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독단 몇 개가 그의 전부다.
“아무것도 없다? 그럼 아무것도 못 준다.”
갈지혁의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눈동자가 녹색 빛을 띄기 시작했다. 수라독공을 천천히 일으키고 있는 탓이다. 조용히 끝내려고 했지만 그게 안 된다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다. 차라리 죽여야 한다면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줘야 한다. 한 명, 이 앞에 있는 연족의 족장만 무서울 정도의 무위로 죽인다면 다른 자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일악천의 목숨이 걸려 있다. 시간을 끌 거면 죽여 버린다.
갈지혁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리고 그런 갈지혁의 변화를 알아차렸는지 연족 족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갈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운에 놀라 버린 것이다.
“마지막이야. 내놔. 안 내놓으면 뼈까지 녹여 주지.”
공손했던 갈지혁의 말투도 변했다. 녹색 눈과 더불어 터져 나오는 살기에 놀라 버렸던 연족의 족장은 갈지혁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갈지혁이 슬며시 소매를 흔들었다.
“캬악!”
사황이 소매에서 튀어나오며 연족 족장의 목덜미에 자신의 이빨을 가져다댔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빨랐기에 연족 족장은 목에 닿는 이빨을 느끼고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해 버렸다.
“죽고 싶나?”
“아, 아니…….”
연족의 족장은 떠듬거리며 말했다. 갈지혁은 차갑게 말했다.
“그럼 대황을 가져와.”
“대, 대황을 가져와라!”
연족 족장의 외침에 뒤쪽에 있던 사내 하나가 어딘 가로 사라졌다가 이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한 가지 약재가 들려 있었다. 갈지혁은 손을 내밀었다.
“내놔.”
머뭇거리는 사내의 행동에 갈지혁이 소리를 질렀다.
“내놔!”
“힉!”
사내는 기겁하면서 급히 약재를 주고는 뒤로 물러섰다. 소매 속에서 뻗어져 나온 사황을 보고 오금이 저린 모양이다. 갈지혁은 대황을 살펴보다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사황이 다시금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쫓을 생각은 하지 마. 그때는 진짜 죽여 버릴 테니까.”
말을 마친 갈지혁은 연족 부락을 경공을 펼치면서 달려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상당히 급했다. 뒤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이 쫓아온다고 해서 잡힐 갈지혁도 아니다. 그들은 아무런 위협거리도 되지 않는다. 독황독립문에게 꼬리만 잡히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최상급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상급의 대황이다. 이 정도면 약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론 일악천이 버텨야 하겠지만 그라면 할 수 있을 게다.
갈지혁은 다시금 사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 건너니 나름대로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지만 긴장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조금만 방심하면 사로의 뱀들의 먹이가 될 테니까.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든든하다. 어깨에 매달려 있는 사황 덕분이다. 이 녀석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자신을 구해 줄 것만 같다. 인간도 아닌 뱀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사황은 갈지혁에게 어느덧 둘도 없는 동료가 되어 버렸다.
* * *
갈지혁은 약재를 조합했다. 마지막으로 대황을 다섯 푼 넣는 걸로 마무리한 갈지혁은 그것을 일악천에게 먹였다. 약재를 먹인 후 반 각 정도가 지나자 일악천의 호흡이 점점 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갈지혁이 천천히 침상 옆에 주저앉았다.
“후…….”
상당히 피곤하다. 사로를 왕복한 게 가장 큰 성과다. 성공할 보장은 없었지만 지금 갈지혁은 살아서 이곳에 있다. 이제야 살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다리의 힘이 쭉 풀려서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기진맥진한 몸으로 쉬고 있던 갈지혁은 일악천의 거친 숨소리가 들었다.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악천이 실눈을 뜬 채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내가 어떻게 된 거지.”
“풍토병에 걸리셨습니다. 아직 다 낫지 않으셨으니 한 보름 정도 요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황은 어디서 났느냐?”
일악천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 또한 이곳에서 대황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밖에 나갔다 왔습니다.”
“사로를…… 걸었느냐?”
“예.”
일악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로를 걸었다는 의미가 어떠한 건지 일악천은 잘 안다. 그가 보기에 갈지혁은 아직 사로를 걸을 수준이 아니었다. 잘못 알았던 것일까.
“네 나이가 몇이냐.”
“스물셋입니다.”
“스물셋이라…….”
상상도 못할 경지다. 스물셋밖에 되지 않은 놈이 사로를 걸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뛰어난 인재라고는 생각했지만 겨우 스물셋이다. 그때의 일악천은 지금 갈지혁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사황 덕분입니다. 없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덕분에 살았군. 고맙다.”
몸이 상당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고는 생각했지만 풍토병에 걸려 쓰러질 정도로 약해진 줄은 몰랐다. 일수만독이라고 불리던 자신이 풍토병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뻔했다.
“건널 만하더냐.”
사로에 대해서 묻는 것일 게다. 갈지혁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운이 좋았다 뿐이지 다시 건너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보장할 수 없다.
“아직은 무리입니다.”
“누군가 널 알아본 자는 없느냐?”
“대황을 구하기 위해 연족의 부족에 간 게 전부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네 움직임은 독황독립문에 걸렸을 게다.”
“하지만 아무런 것도…….”
갈지혁은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가 감시하는 눈빛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일악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대익은 영리한 놈이야. 놈은 날 알지. 사독문을 나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너를 노릴 거다. 지대익은 네가 언젠가 사로를 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단화초를 노리는 겁니까?”
“그래. 네가 무림에 나간다면 그들은 비밀리에 너를 감시할 게다.”
예전 지대익이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일악천이 생각했던 것이다. 지대익은 결코 단화초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악천이 입을 닫을 거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면 답은 하나다.
갈지혁을 노릴 것이다. 단화초가 있는 위치를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까.
몸이 상당히 좋지 않다. 이 상태라면 몇 년을 버틸 지도 자신할 수 없다.
어서 갈지혁에게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한다.
“가서 할 일을 하거라. 내 몸은 알아서 할 테니.”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된 날이다. 무공이 강해졌다고는 느꼈지만 예전의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연족 족장의 놀란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비록 무공을 모른다 하지만 남만의 험한 환경을 이겨 내며 자라난 용사다.
예전이었다면 이길지언정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을 게다.
갈지혁은 집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완전히 돌처럼 딱딱하게 변해 버렸다. 독을 너무 접해 손톱의 색도 변색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후회는 없다.
‘난…… 강해졌다.’
그거 하나면 족하다.
독황독립문의 문주인 지대익은 자신의 손주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다.
지대익의 아들은 채 마흔도 되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남긴 자식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손주다.
외관도 수려하고 재능도 있다. 이대로라면 독황독립문을 이어받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야망도 있어 독황독립문을 진보시킬 수 있는 인물이다. 둘은 가벼이 차를 즐기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막 찻잔에서 입을 뗀 지대익이 물었다.
“무공의 진전은 잘되어 가느냐?”
“물론입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환하게 웃었다. 그 누가 봐도 호감이 갈 정도의 사내다.
남만인인데도 불구하고 강해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운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피부색만 아니라면 중원인이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다.
지대익은 손주를 볼 때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독황독립문의 미래다.
그때였다.
“문주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 안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불구하고 둘은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은 사내는 고개를 조아렸다. 조심스럽게 사내가 입을 열었다.
“사로에 사람의 흔적이 있습니다.”
“……사로에?”
“예. 어제 저녁으로 추정되고 손가락만 한 암기들이 터져 나와 뱀들의 일부를 죽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안에서 나온 게 분명합니다. 다행인 것은 어찌 된 것인지 사독문을 감시하는 자의 말로는 둘 모두 아직 그곳에 있다는 겁니다.”
“흠!”
지대익은 짧은 콧소리를 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바이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빠르다는 거다.
“일악천의 흔적이냐?”
“아닙니다. 일악천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엉성합니다.”
한숨이 새어 나온다. 만약 지금 갈지혁이 그대로 도망을 쳤다면 상당히 일이 귀찮아졌을 것이다. 지대익은 다시금 차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사로를 걷는 게 너무 빠르기에 혹시나 했을 뿐이다.
“그놈 예상보다 뛰어난 놈이로군.”
“놈은 독황독립문에 있을 때도 기재로 손꼽혔습니다. 그런 놈이 일수만독을 만났으니 강해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좋아. 이제부터 사로의 감시를 두껍게 하거라. 언제 그놈이 뛰쳐나갈지 모르니까 말이야.”
지대익의 명을 들은 사내는 가볍게 읍을 하고는 나타났을 때처럼 은밀하게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지대익의 손자가 말문을 텄다.
“갈지혁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흠, 그 녀석을 아느냐?”
“물론이지요.”
말을 하면서 손자가 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