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16화
자랑은 아니지만 그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게 누구냐고 묻는다면 자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전하군요. 그 끈질긴 생명력은.”
“네가 신경 쓸 놈은 아니다. 그놈은 어차피 이용해 먹을 놈에 불과하니까.”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신경도 쓰지 않던 놈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이 순간 날카로운 빛을 토해 냈다가 사라졌다.
지대익이 물었다.
“그런데 그놈을 어떻게 아느냐?”
“친구입니다. 아니, 친구였죠.”
“허허. 지독한 악연(惡緣)이로구나.”
지독한 악연이라는 말에 사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놈은 제가 죽일 겁니다. 할아버님.”
“네가 원한다면 그리해야지.”
그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머리에 갈지혁의 얼굴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절로 웃음이 배어 나온다.
‘조용히 있지 그랬어. 그럼 얼마는 더 살았을 텐데. 꼴사납게 발버둥치는 꼴은 여전하군. 이번엔…… 숨통을 끊어 주지.’
지대익의 손자이자 독황독립문의 최고 기재인 그의 이름은 지운경(支雲勁).
사람 좋아 보이는 외모, 그렇지만 그 속은 악귀와도 같다.
그가 바로 갈지혁의 얼굴에 검상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갈지혁의 앞에 하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둥그런 달이 밝기도 참 밝다. 이처럼 조용히 밝은 달을 보고 있으면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달은 세상을 비춘다. 달은 어디서나 볼 수가 있다. 그 달을 통해 갈지혁은 다른 사람을 본다.
‘어머니…….’
갈지혁의 어머니는 남만인이다. 그녀는 갈지혁의 친어미가 아니다. 갈지혁은 아버지를 모른다. 그는 남만에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또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갈지혁은 그와 함께 나타났다. 그때 나이가 세 살.
지금의 어머니와 사랑을 나누던 아버지가 갈지혁을 놔두고 사라졌고, 그녀가 갈지혁을 거뒀다. 친자식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쏟는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중원인의 자식을 키운다는 이유로 갈지혁의 어머니는 주변에서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독황독립문과 중원과의 싸움 탓에 이미 그들의 눈에 중원인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참 많이도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그 탓에 어머니가 미웠다. 이곳을 떠난다면 이 같은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차츰 나이를 먹어가며 갈지혁은 어머니의 고마움을 알았다.
자신만 버렸다면…… 눈 딱 감고 자신을 버렸다면 지금의 그녀는 새로운 가정을 만들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친자식도 아니었기에 그것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만의 끈적끈적한 바람이 얼굴을 감쌌다.
길어서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도 덩달아 흔들렸다. 그때 나무 아래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갈지혁의 뒤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무엇하고 있느냐?”
“달을 보고 있습니다.”
“어머니라도 생각하고 있는 게로군.”
“어떻게…….”
“자면서 그토록 중얼거리니 모를 리가 있느냐! 네놈 탓에 자다가 깨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말을 마친 일악천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악천이 쓰러졌던 이후에도 그의 가르침은 계속됐다.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계속해서 쌓여만 갔다. 건기와 우기가 지나며 남만은 크게 요동쳤다. 사독문 안에서의 하루는 언제나와 같다. 지루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하루하루를 우습게 볼 수 없다.
갈지혁의 몸은 나날이 단단해져만 갔다. 만독불침지체가 되는 날도 멀지 않았다. 이대로만 간다면 그 어떠한 독도 갈지혁에게는 해가 될 수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일악천의 가르침은 그럴수록 혹독해져만 갔다. 이제 편해지겠거니 하면 새로운 것을 가지고 나와 그를 괴롭혔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단 한 번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강해짐을 느끼는 탓이다.
갈지혁은 일악천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슬쩍 지어 보였다. 갈지혁의 옆에 앉으며 일악천이 물었다.
“어머니는 건강하시냐?”
“제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건강하셨습니다.”
사독문에 들어오기 전이라면 이미 육 년을 훌쩍 넘었다. 육 년이라면 생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다. 하지만 갈지혁은 자신했다.
“독왕이 된 이후에 찾아뵙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살아계실 겁니다.”
“허허. 어머니가 장수하시겠구나. 어찌 보면 영영 사셔야 할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갈지혁이 독왕이 될 수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지혁은 싫은 내색하나 하지 않았다. 일악천의 말이 결코 자신을 깎아 내리기 위함이 아님을 아는 탓이다. 일악천 또한 달을 바라보면서 침묵에 잠겼다.
갈지혁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을 사연을 지닌 그다.
“어머니는…… 바보 같은 분이셨습니다. 저만 버렸다면 행복하셨을 텐데도 불구하고 절 거두셨죠. 친어머니도 아닌 분이 말입니다.”
“큭큭, 친어머니라고 해도 자식을 버리는 세상이다. 넌 복 받은 게다. 그만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지.”
“압니다. 그래서 돌아가려는 겁니다. 다시는 모멸과 멸시를 받지 않으시도록 독왕이 되어서 말입니다.”
갈지혁의 어렸을 때의 생활이 어땠을지 눈을 감아도 훤하다.
중원인에게 일수만독 일악천이라는 이름이 이가 갈리는 것처럼 독황독립문도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중원하면 이가 갈리는 자들이다. 그런 중원인의 자식이 있으니 당연스럽게 갖은 괴롭힘으로 갈지혁을 힘들게 했을 게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아마도 옛날에 도망쳤을 게 분명하다.
“독에 눈이 갔습니다. 강해진다면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죽어라 노력했고 독황독립문의 최고의 기재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헌데…….”
“헌데?”
말을 하던 갈지혁의 눈동자가 녹색으로 물들었다. 분노와 괴로움이 뒤섞인 애매한 감정이다. 그의 몸에서 은연중에 살기가 터져 나왔다.
“파문되어 버렸습니다. 금지된 독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처음엔 중원인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금지된 독에 손을 댔다는 것은 파문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비록 큰 죄라고는 하지만 그것 가지고 기재인 갈지혁을 파문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렇기에 중원인이라서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닌 듯하다.
육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갈지혁은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다른 이유라…… 예상이라도 가는 게 있나보구나.”
“예. 사독문에 들어온 후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듣고 싶은데 물어도 되겠느냐?”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운경이라고 하는 자였지요.”
“지운경이라면 혹시…….”
“맞습니다. 현 독황독립문 문주인 지대익의 손자입니다.”
지대익과 관련 된 말이 나오자 일악천은 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는 지대익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더욱 괴롭다.
“저와 그는 독황독립문 최고의 기재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독황독립문의 문주는 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력으로 인해 정해집니다.”
“문주가 되기 위해 널 파문시킨 것이군. 지대익의 손자라면 능히 그럴 힘이 있지.”
지대익의 수하 세력을 이용해 갈지혁을 파문시키도록 동조한 것이리라. 다른 자라면 몰라도 지대익의 직계 손이라면 그만한 힘이 있다. 더군다나 일악천이 알기에 지대익은 그의 손자인 지운경을 무척이나 신뢰한다고 알고 있다.
비록 사독문에 갇혀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 얼굴을 가르는 검상을 만든 것도 그입니다. 지운경은 제가 파문당하는 날 제 거처로 찾아왔습니다. 반갑게 맞아들였는데 안으로 들어온 그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제 얼굴을 벴습니다.”
그 날의 일을 생각하니 다시금 피가 솟구친다. 어머니는 놀라 비명을 질렀고 지운경은 그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 갈지혁이 일장을 내리쳐 지운경을 밀쳐 내지 않았다면 내친김에 어머니까지 벴을 지도 모른다.
그때 지운경은 피를 뱉어 내고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평생 사독문에서 쉬게 될 거라는 그의 말과 함께 독황독립문의 율법을 관리하는 자들이 들이닥쳤다. 반항도 하지 못한 채로 갈지혁은 그들에게 잡혔고, 지금 이곳에 있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일악천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였다.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면 지독한 악연이다.
‘업보(業報)로다, 업(業).’
결국 갈지혁이 사독문을 나간다면 지운경과도 싸워야 할 터다. 그것은 일악천과 지대익의 싸움 후 이어지는 후계들의 싸움이리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당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그는 저에게 좋은 의도로 접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후우…… 아무래도 널 나에게 보낸 것은 하늘의 운명인 듯하구나. 나와 지대익의 질긴 선을 끊기 위해 말이야.”
끝난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듯하다. 지대익과 자신의 싸움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 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이대로 지대익을 놔두었다가는 남만과 중원 모두가 흔들린다.
그리고 그런 지대익을 막을 수 있는 건 일악천뿐이다. 애초부터 지대익이 이만큼 크게 된 것은 일악천의 영향도 적지 않다. 뿌린 씨는 스스로 거둔다. 그렇지만 이곳 사독문을 나갈 수 없는 일악천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
모든 것은 갈지혁에게 달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갈지혁에게 일악천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려고 한다.
“수라독공의 성취는 얼마나 되었느냐?”
“칠성에 이르렀습니다.”
“일 년 전에 육성이었거늘 꽤나 빠르구나.”
모든 무공이 그렇듯이 점점 익힐수록 오히려 진전 속도는 더뎌지기 마련이다. 왜 그러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그 무공의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는 탓이다. 수라독공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은 팔성부터다. 팔성이 되면 독인을 넘어섰다고 봐도 될 정도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아직은 독인에 조금 못 미치는 경지. 일악천은 이 날을 기다렸다.
“너에게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
“내가 만든 독이 하나 있다. 절대극독이지. 해독약은 물론 없다. 이곳에서는 해독약을 만들 수가 없거든. 그냥 먹는다면 필히 죽겠지만 한 가지와 섞는다면 어느 정도 독기가 죽게 된다. 그것을 먹고 나서 이겨 낸다면 네 몸의 피는 독 자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변할 것이다. 독인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지. 네가 원한다면 그 약을 주마. 하지만 죽을 지도 모른다. ……하겠느냐?”
일악천의 말은 파격적이었다.
엄청난 독을 갈지혁의 몸에 투여함으로서 그의 경지를 높이려는 것이다.
일악천이 이런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전부 이유가 있다. 지대익의 수상한 행보도 그렇거니와 일악천의 몸도 슬슬 망가지기 시작한 탓이다.
더 이상은 열정적으로 갈지혁을 가르쳐 줄 정도로 일악천의 몸은 건강하지 않다.
저번에 풍토병으로 쓰러진 이후 계속해서 몸의 한 구석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서둘러 갈지혁을 독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일악천은 손수 절대극독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주지 않을 생각이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갈지혁에게 죽음을 줄지도 모르는 독을 강제로 먹일 생각은 없다.
정이 들어 버린 탓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마라.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뇨,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것이냐? 나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면 생각을 바꿔라.”
“아닙니다. 제가 원해서입니다.”
“그러냐. 알겠다. 내 그럼 준비하마. 내일 진시(辰時)에 보자.”
말을 마친 일악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더 있을 생각은 없다. 왠지 모르게 갈지혁을 죽음의 길로 몬 것 같은 마음도 인다. 그렇지만 일악천은 갈지혁을 안다. 아마도 그의 말은 진실일 게다. 일악천이 말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갈지혁 스스로가 그만큼 독왕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탓이다.
‘미안하다. 하지만 네가 걸어야 할 길이 독왕의 길이라면…… 어쩔 수가 없구나.’
일악천은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시, 해가 뜨기 시작했고 덩달아 공기도 무거워졌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갈지혁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일악천은 조용히 앉아 갈지혁의 눈이 떠지기를 기다렸다. 지금 갈지혁은 운기조식 중이다. 그리고 그런 갈지혁의 앞에는 하얀 천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일악천이 만든 절대극독이다. 일악천은 그것을 먹기 쉽도록 단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발에 담겨 있는 검은 물이 있었다.
갈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일악천이 다짐하듯이 물었다.
“준비되었느냐.”
“물론입니다.”
“원한다면 그만둬도 되겠지만…… 네가 그러지는 않겠지.”
그 말에 갈지혁은 대답 대신 슬쩍 고개만 끄덕였다. 일악천이 손으로 사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독은 나라고 해도 버텨 내지 못한다. 물론 네가 직접 먹는다면 필사(必死)지. 그래서 준비한 게 이것이다. 이 물을 마시고 독단을 먹어.”
“이 독의 위력은 얼마나 됩니까?”
“절대라는 말이 붙은 걸 보면 알 게다. 당문이 자랑하는 당문십독, 독황독립문의 오대금독(五大禁毒)에 비해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알려지지 않아 더 위협적이면 위협적이겠지.”
일악천의 말을 들은 갈지혁은 조심스레 단환을 바라봤다. 그 정도의 독이라면 세상에서 열 손가락 안에 가벼이 들어갈 정도의 독이다. 적어도 일악천이 직접 만들어 낸 독이라면 최고의 독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당문이 자랑하는 십독, 그리고 독황독립문이 자랑하는 오대금독. 그 두 군데는 각기 독에 대해서는 최고의 문파라고 자랑하는 곳이다. 그 두 군데에서 비전으로 알려진 독이라면 그 위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예로 당문의 십독 중 제 일 위를 차지하는 독인 무형지독은 무림에서도 널리 전설로 회자되곤 한다.
‘죽을지도 몰라.’
일악천이 어제 했던 말을 갈지혁은 되�l다. 그 정도의 독이라면 아무리 갈지혁의 내성이 늘었다 한들 무조건 죽는다. 그렇지만 일악천이 그냥 갈지혁을 죽게끔 하지는 않을 게다. 옆에 놓여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