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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7화 (17/200)

# 17

17화

갈지혁은 천천히 사발을 들어 올렸다.

코로 슬며시 냄새가 났다. 비릿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개운한 냄새가 풍긴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엇인가를 달인 듯하다. 갈지혁은 사발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삼켰다. 전혀 독기가 없는 것인 듯 몸 안은 잠잠했다.

“그건 너의 몸을 지켜 줄 약재다. 그리고 이 단환을 먹어라. 아마도 죽을 정도의 고통이 찾아들 게다.”

이미 각오한 일이지만 죽음을 앞두니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갈지혁의 마음을 잘 알기에 일악천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잠시 지루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갈지혁은 자신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수도 없이 걸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먹어야 할 독은 그런 갈지혁조차 망설이게 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갈지혁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단환을 들어 올렸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무취(無臭), 무미(無味), 무색(無色)의 독이리라. 예상대로 입에 밀어 넣은 단환에서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막 식도를 타고 단환이 넘어간다는 생각이 든 순간 찢어질 듯한 고통이 몸을 엄습했다.

아랫배가 뒤틀렸다. 온몸의 장들이 서로 꼬이는 듯했고, 머리는 이미 땅을 향해 처박혔다.

“정신차려라! 그리고 내공을 운기해!”

말은 들렸지만 그대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이 빠져 버렸다. 무엇을 하기도 전에 목숨이 경각에 달려 버린 것이다. 순간 빠져 버렸던 힘이 일순 돌아왔다.

‘지금이야!’

갈지혁의 내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단환을 먹기 전 먹은 약재 덕분인 듯했다. 잠시 멈칫했던 독기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혈도를 역류하고, 그들은 각각 중요한 곳을 점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게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눈은 마치 광인처럼 뒤집혔고 온몸도 비틀렸다. 또다시 죽음의 바로 앞에 도달하는 것과 동시에 다시금 약재의 힘이 갈지혁을 살렸다.

그렇지만 이내 독기가 다시금 갈지혁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지혁이 죽음에 이를 정도가 될 즈음해서 다시금 약재의 힘이 독기를 막아 냈다.

죽고 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갈지혁은 정신을 거의 잃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무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지혁은 계속 운기했다. 죽을 정도로 괴로운 이때 힘이 되는 건 일악천의 목소리뿐이다. 그가 계속해서 외치는 말은 단 하나였다. 운기를 하라는 것.

그렇다면 길은 그것뿐인 게다. 일악천이 그리하라면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걸 의미한다.

지금 갈지혁이 살고 있는 건 전부 약재의 덕분이다. 만약 약재를 마시지 않았다면 절대극독이 이미 갈지혁의 목숨을 앗아갔을 게다. 다행히 독기가 온몸을 감싸려고 할 때 약의 기운이 갈지혁의 한 줌의 숨을 살렸다. 그것으로 갈지혁은 다시금 호흡했고, 또다시 죽음의 어두운 힘이 그를 움켜쥐었다.

계속해서 세 힘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독, 약재, 그리고 갈지혁.

사실 약재가 갈지혁의 목숨을 살리고는 있지만 또한 그가 약재의 기운을 살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 상태에서 내공을 운기하지 못한다면 약의 기운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숨을 거둔다. 다행히 갈지혁은 계속해서 운기했고, 그 덕분에 약의 기운이 움직일 시간을 벌게끔 한 것이다.

갈지혁의 몸이 마구 비틀렸다.

앞으로, 뒤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런 갈지혁을 보는 일악천의 눈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괴로워하는 갈지혁을 보며 일악천은 절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회생충을 제거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고통인 건 당연하다.

지금 그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생사를 오가고 있다. 간신히 이어지는 생명의 끈을 잡고 갈지혁은 버티고 있는 것이다.

먹는 순간 즉사할 정도의 지독한 독. 약재로 인해 버티고는 있지만 갈지혁의 모습은 위태위태했다. 그렇지만 일악천은 믿었다.

애초부터 갈지혁이 버텨낼 거라고 믿지 못했다면 이 독을 먹일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놈! 너는 버틸 수 있다!’

그런 일악천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죽을 듯하면서도 갈지혁은 끝끝내 버텨 냈다. 그리고 일순 갈지혁의 얼굴이 녹색으로 변해 버렸다. 일악천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수라독공이다!”

지금 이 순간만을 잘 넘긴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 오히려 갈지혁이 독을 잡아먹을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그의 피는 독으로 쓸 수도 있게 된다.

갈지혁의 몸이 일순 꿈틀하더니 이내 몸이 녹색 기류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일악천의 입이 벌어졌다.

‘이, 이럴 수가!’

형성되는 기류의 범위가 엄청났다. 무려 오 장을 뻗어 나가며 주변의 사물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일악천의 상상을 훨씬 웃도는 위력이다. 그 간격 안에 있는 것 중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죽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것은 갈지혁과 일악천뿐이다.

이 정도의 위력을 낼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놀랄 수밖에 없다. 완성되지 않은 수라독공으로 이만한 위력을 낸다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내 알아차렸다. 점점 차분해지는 갈지혁의 모습을 보면서 일악천은 알아 버렸다.

그릇이다. 수라독공을 담았던 그릇의 차이다.

‘난 딱 맞는 그릇이었을 뿐이로구나.’

일악천은 수라독공을 담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그 이상의 것은 보지 못했다. 그에 반해 갈지혁은 수라독공을 담고도 많은 자리가 남은 것이다. 그것이 독과 상충되며 표현되었을 뿐이다.

일악천은 자리에 서서 갈지혁을 바라봤다.

‘독황독립문의 몇 백 년 역사상 최고의 기재는…… 바로 네놈이야.’

여태까지 무공의 성취가 예상을 훨씬 웃돌아 놀라기는 했지만 지금에야 확실히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재능 수준을 넘어선다. 갈지혁은 애초부터 독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이다.

만약 그가 독황독립문에 오지 않았다면…… 그래도 어떻게든 독에 길을 걸었으리라. 그게 바로 갈지혁의 운명일 게다.

점점 녹색 기류가 작아지면서 갈지혁의 안으로 갈무리되기 시작했다. 일악천은 그저 침묵했다.

그 기류가 사라지면서 감겨 있던 갈지혁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안광이 터져 나왔다.

“어르신…….”

갈지혁은 일악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이곳에 있는 것은 한 시진 전에 있던 갈지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이되 그가 아닌 자.

“축하한다. 넌 이제…… 독인이다.”

그 지독한 독과의 싸움 후에 혼절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힘이 넘친다. 절대극독의 힘을 몸으로 흡수했다. 이제는 더욱 강해진 것이다.

“그런데 주변이…….”

갈지혁은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이상하게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풀과 나무가 독에 의해 녹아내렸으니 이상하게 보는 것도 당연하다.

“네놈의 수라독공 성취가 이 정도에 미쳤다는 게다. 그러나 자만하지 마라! 이 정도는 자만할 것도 못 된다!”

일악천은 엄하다. 결코 칭찬을 하지 않는다. 분명 일악천은 갈지혁이 눈을 뜨기 전까지 이만한 위력을 내는 것에 대해 놀랐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자만을 하게 되면 점점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뭐 그래도…… 썩 훌륭한 성과긴 했다.”

기가 죽을까 하여 이내 일악천은 말했고 갈지혁은 오랜만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있다. 일악천 또한 인자한 눈으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이제 갈지혁은 독인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피를 독으로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 되기도 했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구나.’

육 년이나 함께 했다. 이제는 슬슬 내보내야 할 때가 된 듯하다. 다소 이른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저놈이라면 해낼 것도 같다.

육 년이었다. 자그마치 육 년. 그 시간은 길기도 했지만 또한 너무 짧기도 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일악천은 더 늙어 기력이 사라졌지만 갈지혁은 오히려 그 반대다. 열여덟 살에서 이제 스물넷의 장정이 되어 버렸다.

사독문의 생활은 반복됨의 연속이다. 일악천은 계속해서 갈지혁을 괴롭혔고 그런 일악천을 잘도 따라주었다.

많은 일은 없지만 함께 한 시간이 자그마치 육 년이다. 없던 정도 생길 정도의 시간을 단 둘이서 보냈다.

갈지혁을 받아서 가르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그와 일악천은 반드시 만나야 할 운명이었다. 기나긴 독황독립문과의 연을 끊기 위해서.

일악천은 갈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짐을 싸거라. 이만 이곳을 나갈 때가 온 듯하구나.”

“어, 어르신!”

“왜? 아직 넌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아직 어르신의 모든 것을 배우지도 못했는데…….”

“놈! 네가 나를 따라잡으려면 이십 년도 더 걸린다!”

일악천은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 몸은 이제 제 상태가 아니야.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독왕이 되기 위해서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돼. 자유를 느껴라. 그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진정한 독의 길을 걸어 보거라.”

갈지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별을 하게 될 줄도 몰랐다. 적어도 이삼년은 더 아래에서 배울 거라고 생각했다. 서른, 그 정도 나이에 무림에 나설 생각을 했는데 빨라도 너무 빠르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고개를 조아렸다. 일악천의 마음을 이해하는 탓이다. 지금 갈지혁은 일악천에게 짐이 된다. 그의 건강이 망가지는 지금 갈지혁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게 할 수는 없다. 지금 일악천은 편히 쉬어야 할 때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갈지혁이 사독문을 떠나야 할 때가 온 듯하다.

* * *

밤이 깊었다.

마주한 둘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갈지혁은 헤어질 것을 알게 되니 어떤 말도 선뜻 내뱉기가 어려웠다. 어머니를 제하고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를 위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의 이별이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일악천 또한 그다지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삼십 년이 넘도록 혼자 지내다 갈지혁을 만났다. 비록 육 년이지만 다시금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악천은 결코 그런 감정을 겉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담담해 보였다.

갈지혁은 일악천의 뒤에서 그의 등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왜소하지만 한때는 천하를 흔들었던 사람의 등이다. 비록 지금은 이런 외진 곳에 갇혀 있는 그이지만 천하제일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일악천이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이내 그는 커다란 항아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일악천이 말했다.

“밖으로 나오너라.”

그 말을 마치고 일악천은 밖으로 걸어 나갔고 갈지혁도 덩달아 따라 나갔다.

일악천은 갈지혁이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앞에 앉자 항아리의 덮개를 열었다. 지독한 술 냄새가 순간 주변에 퍼졌다.

“삼십 년 넘게 묵은 술이다. 내가 이곳에 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담근 술이지. 한잔하자.”

“저야 좋지요.”

일악천의 앞에 갈지혁은 공손하게 앉았다.

이별의 아쉬움을 술로 대신하려는 게다. 일악천이 먼저 술을 받았고 이내 갈지혁도 술을 받았다. 딱히 잔이 없어 약재를 달일 때 쓰는 사발에 술을 담았다.

삼십 년이나 된 만큼 독특한 맛을 지녔다. 지독하면서도 뭔가 혀에 감긴다.

이 정도라면 명주(名酒)다.

둘은 계속 술잔을 주고받았고 이내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일악천은 갈지혁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

“잘 마시는구나!”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즐기는 편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마시고 싶은 날이군요.”

“그래, 네가 독인이 된 날이지.”

“예, 그리고 어르신과 헤어지기도 하는 날이니까요.”

그 말에 순간 움찔했던 일악천이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사발에 술을 채웠다.

그는 술을 들이키고는 소매로 입을 닦았다. 갈지혁을 바라보며 일악천이 말했다.

“섭섭하냐?”

“솔직히 말한다면 그렇습니다.”

처음으로 일악천에게 갈지혁은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일악천은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감정도 격해진 기분이다.

예전이었다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일이거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혼자가 되어 버린 지금 누군가에게서 헤어지게 되어 섭섭하다는 말을 들었다.

일악천은 다시금 술잔을 들었다.

“나도, 나도 그렇다.”

그 말을 마치며 일악천은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상태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하하!”

먼저 웃음을 거둔 일악천이 말했다.

“바보 같은 녀석! 네놈은 내가 가르친 유일한 놈이었어. 무림에 나가서 지는 것은 내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게야. ……절대 지지 마라.”

“질 생각 없습니다. 반드시 독왕이 되어 나타나겠습니다.”

“허허, 과연 네놈이 내가 죽기 전까지 올 수 있을지나 모르겠구나.”

“반드시 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갈지혁의 마지막 말에 일악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둡지만 달 때문에 주변의 경관들이 더욱 아름답게 비친다.

“어르신,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뭐냐?”

“스승님이라고 한 번만 부르고 싶습니다.”

“……그게 다냐?”

“예.”

일악천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하늘을 올려다봤다.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무공을 가르쳐 주면서도 그런 호칭은 피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일악천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갈지혁은 스승님이라는 호칭 대신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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