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화
사제의 연을 맺음으로서 생기는 정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이미 일악천과 갈지혁의 사이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엇인가가 생겨 버렸다.
그것이 정이라는 것이리라.
“오냐.”
“스승님! 그간 감사했습니다.”
갈지혁은 그 상태로 땅에 머리를 박았다. 예전에 하려고 했지만 여태까지 못했던 구배지례를 지금에야 올리는 것이다.
늦었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다. 그랬지만 그때 올리려 했던 것과 지금의 구배지례는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형식상으로 하려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음 한편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마음을 담았다.
스승에게나 올린다는 구배지례를 갈지혁은 천천히 행하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앞으로 그 누구의 앞에서도 허리를 굽히지 않겠습니다.”
“…….”
지지 않겠다는 의지다. 강해 보이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물귀신 같이 끈질기다. 일악천은 대견하다는 눈으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현실일 게다. 그래도 웃었다. 자식을 보내는 부모가 그 앞에서 슬픔을 보여서 무엇한단 말인가.
“이곳을 나가서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게냐.”
“중원으로 갈 겁니다. 독왕이 되려고 하니까요.”
“복수는?”
“그건 나중입니다. 반드시 해야겠지만…… 최우선은 독왕이 되는 겁니다. 독왕이 된다면 독황독립문에게 복수를 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요.”
일악천은 피식 웃었다.
독인이 가져야 할 냉정한 판단력이 갈지혁에게는 충분하다.
무인에게도 그렇지만 독인에게 냉정한 판단은 더욱 중요하다. 독인에게 흥분은 금물이다. 흥분을 하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은 바로 죽음과 연결된다.
일악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갈지혁과 마주했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부닥쳤다.
“오너라.”
“아셨습니까?”
“마지막이니 봐주지 않으마.”
일악천은 갈지혁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마지막으로 겨루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랬기에 갈지혁은 사양하지 않고 움직였다.
스륵.
갈지혁의 몸이 일순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하늘 위에서 독분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일악천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손을 휘둘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가벼운 소매의 움직임으로 자연의 움직임을 역행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갈지혁도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미 그의 몸은 일악천의 뒤에 선 상태였다.
그 짧은 거리는 독인에게 있어서 치명적이다. 일반적인 독인들은 무공이 약하기에 근접전에서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일악천은 아니다. 그렇게 바짝 붙은 상태에서 둘은 서른 번 이상 손을 움직였다.
파팍!
엇비슷하다고 느꼈지만 갑자기 빨라진 일악천의 손에 갈지혁은 뒤로 물러났다. 입고 있던 상의에 손바닥 자국이 새겨졌다. 붉은 장인이 갈지혁의 옷을 녹였다.
그냥 무인이 당했다면 독의 기운에 당장에 기혈이 뒤틀렸겠지만 갈지혁은 이제 독인의 경지에 올랐다. 웬만한 독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내성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흡이다. 호흡에 신경 써라.”
“예.”
말을 마친 갈지혁은 상의를 찢어서 일악천에게 던지면서 그대로 발을 휘둘렀다. 갈지혁의 다리가 일악천의 무릎을 꺾으려 들었다. 그렇지만 일악천의 몸에서 녹색의 기운이 일면서 동시에 일장을 휘둘렀다.
다가가던 갈지혁의 등골이 일순 서늘해졌다.
피해야 한다. 이것을 그대로 받는다면 아무리 독인이라고 해도 무사할 수 없다. 정말 일악천의 말대로 그는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지 않다.
‘피할 수 없다!’
갈지혁이 강해졌다 하지만 아직은 일악천에 비해 많이 부족한 형편이다.
애초부터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싸움이 아니다. 일악천과의 대결은 갈지혁에게 부족한 경험을 채워주었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일악천은 각종 변수들로 갈지혁을 몰아치곤 했다.
사독문에 있음으로 유일하게 부족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것도 일악천이 가르쳤던 것이다. 한 번의 대결들이 갈지혁에게는 피와 살이 된다. 마지막 이별 선물로 일악천은 하나의 가르침을 더 주려 했고 갈지혁은 그에 답하려고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답은 하나다.
갈지혁의 손이 일순 녹색으로 물들었다.
수라독공끼리의 격돌이었다.
퍼엉!
일악천과 갈지혁의 손이 맞닿았다. 굉음이 터져 나왔고 주변에 있는 생물들이 생기를 잃고 사방을 향해 터져 나갔다.
주변을 뒤덮던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둘의 모습이 나타났다. 갈지혁은 얼굴이 일그러진 상태 그대로 주저앉았다. 입술을 비집고 검은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가슴을 움켜쥔 채로 갈지혁은 일악천을 올려다봤다. 담담해 보이지만 갈지혁의 수라독공을 받은 일악천 또한 다리가 후들거렸다.
일악천은 뒤틀리는 속을 달래며 천천히 말했다.
“좋은 선택이었다. 물러설 수 없다면…… 부딪치거라.”
“스승님…… 당신의 제자였다는 걸 가슴에 새기고 살겠습니다. 일수만독이라는 위명에 결코 먹칠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내일 떠나려면 지금쯤 자야지.”
일악천의 말에 갈지혁은 소매로 피를 닦아 내며 거처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악천은 그런 갈지혁의 등을 아무런 말도 없이 바라봤다.
많이 커 버린 갈지혁을 보니 왠지 모르게 대견하다. 갈지혁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일악천은 주저앉고야 말았다.
“우웩!”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그렇지만 일악천의 입가에는 오히려 미소가 걸려 있었다.
‘놈! 나에게 이 정도의 타격을 줄 정도로 성장한 게냐.’
몸이 멀쩡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지만 갈지혁의 수라독공은 분명히 위력적이었다. 절대극독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미 갈지혁은 독인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다지 오래 함께 한 것 같지 않은데 어느덧 육 년이다. 삼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으니…… 육 년이라면 세상이 변하기 부족함이 없다.
아직 당장은 미숙한 것이 사실이다. 분명 무림에서 갈지혁 정도 되는 독인은 몇 없다. 그렇지만 갈지혁이 되고자 하는 독왕은 지금 이 정도로 가능하지 않다. 조금 더 가르치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다.
이제 갈지혁은 둥지를 떠나야 한다.
찌는 듯한 더위.
지독한 우기가 지난 후 다시금 찾아온 건기다. 갈지혁은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챙겨두었던 몇 안 되는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 봤자 무림에서 쓸 만한 독들이 전부다.
헤어짐을 알면서도 일악천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행동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결코 내색하지는 않았다.
“갈 시간이로구나. 너에게 줄 게 있다.”
말을 마친 일악천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조그만 단지가 있었다.
“네가 먹었던 절대극독이다. 네 피 또한 이 독에 필적한 만한 극독이 되었지만 만약 필요한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만드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건 네놈이 걱정할 게 아니니 가져가라.”
“알겠습니다.”
갈지혁은 거절하지 않았다. 일악천이 주는 선물이다. 떠나는 이 마당에 그가 주는 선물을 거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갈지혁이 그 독을 받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악천이 말했다.
“사황도 데리고 가라.”
“예? 사황을 말입니까?”
제대로 들은 것은 분명하지만 갈지혁은 재차 물었다. 일악천은 대답 대신 소매를 슬쩍 움직였다. 녹색 몸통을 지닌 뱀이 스르륵 기어 나와 갈지혁의 다리를 감싸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 혼자서는 도통 걱정이 돼서 말이다. 너에게 좋은 동반자가 될 게다.”
“하지만 스승님…….”
절대극독은 그렇다 해도 사황을 받기는 뭐했는지 갈지혁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지만 일악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사황도 이곳에서만 지내기 지루해 보인다. 어차피 나간다면 함께 보내리라.
“가거라.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근사하게 줄 명검도 없고, 무림에서의 직위 같은 것도 없다.”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저에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을 줬습니다.”
만약 일악천이 없었다면 지금 갈지혁은 살았을지도 의문이다. 일악천은 그의 목숨을 살려 줬고 독인이 되게끔 해 줬다. 일악천이 없었다면 지금 이 모습은 상상도 못했을 게다. 회생충에 의해 완전히 내공도 못 쓰는 폐인이 되어 버렸을 게 분명하다.
그것이면 어딘가. 이미 일악천은 자신의 건강을 버리면서까지 갈지혁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어 버렸다.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갈지혁은 짐을 맨 채로 다시금 구배지례를 올렸다. 일악천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격해지는 감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말했다.
“오냐. 잘 가거라.”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고개를 꾸벅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일악천이 갈지혁의 이름을 불렀다.
“지혁아,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이름을 듣는 것은 처음이기에 갈지혁은 이외라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무엇입니까?”
일악천이 손을 내밀었다. 서찰 한 장을 내민 그가 읽어 보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서찰 안에는 어느 지역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곳은…….”
“입 밖으로 꺼내지 마라. 그곳이 바로 지대익이 그토록 찾던 단화초가 있는 곳이다.”
“……!”
“네 손으로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하겠습니다.”
일악천에게 입었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에 갈지혁은 쉽게 승낙했다. 일악천이 재차 말했다.
“죽을지도 몰라. 결코 어설픈 상태로 가려고 하지 마라. 수라독공의 성취가 구성 이상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네가 무림을 나선다면 지대익의 눈도 그를 쫓을 거다. 절대 단화초를 지대익에게 넘겨서는 안 돼.”
“어차피 싸워야 할 겁니다. 단화초 또한 지키지요.”
일악천은 말없이 갈지혁을 바라봤다.
아직도 앞머리를 내려 얼굴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얼굴을 가르는 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생긴 외모다. 그렇지만 아직도 갈지혁은 얼굴을 가린다.
“얼굴을 아직도 가리는 이유가 뭐냐? 얼굴을 벤 지운경이라는 놈 때문에 아직도 떳떳하지 못하다는 게냐?”
“아닙니다. 이제 확실히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지운경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니까요. 다만 아직은 이게 편합니다. 생각은 정리했는데 아직 마음은 그렇지가 않으니까요. 하지만 곧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일악천은 갈지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사내라면 할 수 있으리라. 흉한 외모의 일악천을 보면서 갈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 볼 때는 그토록 추악해 보였거늘 지금은…….
“난 이만 들어가마.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너도 가거라. 그리고 지금 본 서찰을 머리에 새겼다면 당장 없애거라.”
일악천은 몸을 돌렸다.
왜소한 체구지만 돌아서서 걷는 그 등은 너무나도 넓어 보인다. 갈지혁은 그런 일악천의 등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갈지혁 또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품속으로 들어온 사황이 몸을 간지럽게 한다. 이제 다시금 걸어야 한다.
죽음의 길, 뱀의 길이라고 알려진 사로를.
두렵지는 않다. 걸어 봤던 길이기도 하고, 이제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갈지혁은 성큼 성큼 사로를 향해 다가갔다.
떠나는 갈지혁을 일악천은 창을 통해 조용히 바라봤다.
그는 집 안의 풍경을 살폈다. 너무나 쓸쓸하게 변해 버렸다. 한 놈이 떠났을 뿐인데 마치 세상을 잃은 듯한 기분이다.
오랫동안 외로움을 잊고 있다가 다시금 느껴 버렸다. 예전에 느끼던 외로움보다 지금이 훨씬 더 쓸쓸하다. 잊고 지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버린 후에 다시금 찾아온 외로움 탓이리라.
‘잘 가거라.’
독왕이 되겠다 했다. 그랬기에 독에 대해 가르쳤고, 독왕이 되라며 떠나보냈다.
그렇지만 불가능하다. 현 무림에서 독왕이라는 별호를 받는다는 건. 그들에게 여태까지 지켜온 자존심이 너무나 강하기에 독왕이라는 별호를 줄 리가 없다.
하지만…….
‘넌 되어야 한다. 아무도 될 수 없지만…… 너는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갈지혁은 되어야 한다.
재능이 있고, 끈기도 있다.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갈지혁이라면.
‘후후, 이제부터 또 혼자로구나.’
말을 마친 일악천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 *
섬서성에는 유림(楡林)이라는 곳이 있다. 토지가 각박해서 농작물은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매년 쏟아지는 비의 양도 적고, 기후까지도 한랭하다.
당연스럽게 유림은 농사가 아닌 가축을 이용한 모피가 발달했다.
가을을 지나 겨울이 다가오는 마당에 유림의 날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웠다.
턱수염이 더부룩한 사내 하나가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아주 얼어붙겠네.”
이곳의 추위는 몇 십 년을 지낸 그에게도 익숙해지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오늘 같이 손님이 뜸한 날은 더욱 그렇다.
‘확 접어 버릴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마을에 자리 하나 잡고 장사나 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의 상관은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사내는 옆에 있는 자신의 수하들을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는 그들의 행동은 눈으로 보기 꼴사나울 정도였다.
늘어져라 퍼 자고 있는 놈이 있는가 하면 각종 음담패설로 시간을 죽이고 있다. 막 혀를 차던 사내의 눈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내는 발로 퍼져 있는 자의 배를 퍽 걷어찼다.
코까지 골며 자던 자가 황급히 일어났다.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일이다. 정신 차려.”
말을 마친 사내는 아래쪽을 지나가는 자의 모습을 살폈다.
행색은 남루하고 머리도 엉망이다. 분명 가진 것도 얼마 없는 자일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