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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9화 (19/200)

# 19

19화

‘저런 비렁뱅이의 주머니까지 털어야 할 정도라니…….’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오늘 종일 이곳에 있으면서 번 수입이 하나도 없는 이상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그냥 맨손으로 간다면 두목이라는 작자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리라.

“썅! 가자.”

외침과 함께 사내는 아래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뭐하는 놈들이야?’

갈지혁은 눈앞에 선 자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상한 자들이 위에 있다는 것은 예전에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갈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던 자들이 갈지혁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무기들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싸구려 것이었다.

비록 무기들을 들고 있지만 전혀 겁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 처음 만난 중원인이기에 반갑기까지 하다.

맨 앞에 있는 턱수염이 더부룩한 장한이 나섰다. 우두머리이자 산채의 인물 중 가장 머리가 좋다고 알려진 운적(暈積)이다.

“있는 것 좀 다 내놓고 가거라.”

“나에게 말하는 건가?”

“가뜩이나 추워서 귀찮은데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여기 네놈 아니면 또 누가 있냐!”

갈지혁은 자신의 중원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했다. 남만과 중원의 말은 비슷하면서도 크게 다르다. 다행히 어머니에게 어릴 적부터 중원의 언어를 배웠던 지라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갈지혁은 그제야 앞에 있는 자들이 어떠한 부류인지 알아차렸다.

“당신들 녹림십팔채?”

“미친놈.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나 본데 우린 용골채다.”

말만 번지르르하지 용골채라는 이름과 자신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녹림십팔채는 녹림도들에게는 하늘과도 같은 존재다. 그들은 무인과도 싸워서 이긴다 하니 이미 좀도둑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운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녹림십팔채의 안에 내가 있다면 떠날 생각은 안 하지…….’

녹림십팔채의 녹림도들은 적지 않은 돈을 받으며 생활한다. 그에 반해 자신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티는 것도 힘들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푼돈이나 뜯는 게 고작이지 일정 수준 이상의 무리에게는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나마 용골채의 채주가 무공을 좀 익혀 이 근방에는 적수가 없어 어깨는 피고 다니지만…….

갈지혁은 운적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독황독립문에 있는 책을 통해 녹림십팔채라는 녹림도들의 집단에 대해 알았다. 그렇지만 행색이나 반응으로 보건대 이들은 그저 산 하나를 잡고 있는 녹림도에 불과한 모양이다.

중원의 무공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달아올랐던 심장도 단숨에 식어 버렸다.

갈지혁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비키는 게 좋을 거요. 지금 손을 쓴다면 전부 후회할 테니까.”

“뭐? 이 미친놈이…….”

“캭!”

순순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갈지혁이 소매를 움직였고 동시에 사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웃으며 다가오던 운적이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힉!”

전혀 생각도 못 한 탓이다.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민 사황을 보고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린 것이다. 그는 잠시 놀랐지만 이내 얼굴이 붉어지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하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 뒤에 있는 부하들도 순간 놀라는 듯하더니 소리를 지른 자신을 보며 비웃고 있지 않는가.

“개자식, 죽여 버린다.”

운적이 자신의 병기인 쌍추를 들어 올렸다. 운적은 용골채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자다. 그렇지만 그가 용골채의 부채주에 있는 건 머리 때문만이 아니다. 나름대로 냉철한 상황 판단과 어렸을 때부터 남보다 뛰어났던 힘을 이용한 쌍추를 휘두르는 능력은 용골채 내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비록 그것이 용골채에서지만 그것만으로도 운적은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

운적의 다리에 힘이 갑작스럽게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고야 말았다. 그리고 속이 메슥거리며 토악질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평소 역사와도 같은 힘을 지녔다고 자랑하던 운적의 손에서 쌍추가 떨어졌다. 쌍추를 들어 올릴 힘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뭐야? 이게 무슨…….’

헛구역질을 해대던 운적은 뒤에 있는 자신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만이 이상해진 것이 아니다.

그제야 운적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너무 상대를 얕봤다. 지금 이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는 정확히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앞에 있는 사내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 이런 제길! 왠지 오늘 꿈자리가 안 좋더니…….’

알아차렸지만 너무 늦은 듯하다.

몇 번 보지 못한 무림의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자들은 하늘을 날고, 손으로 집채만 한 바위도 부순다 했다. 그런 자를 상대로 삼류 무공이나 조금 익힌 자신이 상대가 될 턱이 없다. 비록 채주가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이 젊은 사내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손의 움직임도 보지 못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몸을 이토록 꽁꽁 묶어 버렸다.

채주의 무공은 잘해 봤자 이류다.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던 운적은 갑작스러운 호통소리를 들었다.

“뭐하는 놈이냐!”

그와 동시에 운적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제길! 채주다!’

차라리 오지 않으면 나았을 게다. 채주의 등장 탓에 막 떠나려는 사내가 다리를 멈추지 않았는가. 운적은 오히려 채주의 등장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멍청한 놈! 힘만 무식하게 쌔 가지고는 상황판단도 못하긴!’

이 정도의 인원을 알 수 없는 수법으로 단순에 제압한 자다. 아무리 채주를 높게 쳐도 승산은 저쪽으로 기운다. 그런데 그건 생각도 안 하고 나선 것이다.

용골채의 채주인 배우창(配優脹)은 호랑이 같은 사내다. 물론 호랑이의 제왕과도 같은 기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는 단지 호랑이처럼 광폭하기만 하다. 무공은 어느 정도 되지만 머리가 없어 운적은 언제나 그의 옆에서 골머리를 썩곤 했다.

괴로워하는 운적과는 달리 갈지혁은 새로 모습을 드러낸 자를 바라봤다.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짓고 있는 배우창은 천천히 아래로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걸어오면서 쓰러져 괴로워하는 수하들을 하나씩 살폈다. 그가 마침내 갈지혁의 앞에 마주섰다.

“넌 누군데 내 수하들을 건드린 거냐?”

“당신의 수하들이 내 길을 막아서 가볍게 손을 본 것뿐이요.”

지금 갈지혁은 빨리 이곳을 뜨고 싶었다.

남만에서만 자란 그에게 이 정도의 추위는 난생처음 접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당장 이 자리를 떠서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이고 싶다.

“어떻게 내 수하들을 쓰러트린 거지? 검상도 없는데…….”

“독.”

“뭐? 독이라고? 겨우 그딴 걸로 내 수하들을 모두 쓰러트렸다고?”

그 말에 가만히 있던 갈지혁이 꿈틀했다. 그런 갈지혁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배우창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이 머저리 같은 새끼들아! 겨우 독에 당하고 쓰러져 있는 꼴이라니 한심하구나!”

소리를 지르는 배우창을 바라보던 운적이 마침내 고개를 떨궜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갈지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운적은 속으로 배우창의 무식함을 욕했다.

독을 깔아뭉개는 말에 이빨을 간 갈지혁이 천천히 배우창에게 말했다.

“겨우? 그딴 거? 당신이 독을 아나?”

“흐흐. 알지, 알고말고. 내가 무림을 떠돌아다닐 때 독을 쓴다는 놈들을 수많이 만났다. 그리고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지. 독을 쓰는 놈들은 겁쟁이라 이 어르신만 보면 덜덜 떨었거든!”

자신 있다는 듯한 배우창의 말. 갈지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딱 보아하니 빼어나지도 못한 자다. 지금 갈지혁이 가지고 있는 독 중 하나를 뿌리기만 해도 맥없이 죽어 나자빠질 놈이 분명하다.

갈지혁이 용골채의 녹림도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독이 없어서가 아니다. 쓸데없는 살생은 피하고자 해서였다. 그리고 이들 정도라면 굳이 독을 쓰지 않고 손으로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다. 비록 그들보다 강해 보인다고는 하지만 배우창 또한 갈지혁의 입장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처음엔 그저 가볍게 제압하고 끝내려 했지만 그 말에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좋아. 보여 주지. 당신이 그토록 우습게 보는 독이 어떠한 건지 말이야.”

갈지혁이 천천히 소매를 내려트렸다.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배우창은 낮게 웃었다.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병기인 거도를 들어 올렸다.

갈지혁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어 버렸다. 배우창이 생각하는 독이라는 것이 어떠한 건지 알아 버린 것이다. 그는 단순히 독이 묻은 암기를 생각한 게다. 그렇기에 도로 쳐내려고 하는 것이고.

멍청한 짓이다. 암기에 독을 발라서 던지는 것은 살수들이 자주 하는 짓이지 독인들이 하는 게 아니다. 독인은 손, 발, 피가 모두 독이다.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이유도 없고 한다 해도 오히려 실용성이 떨어진다.

갈지혁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겨우 저런 놈에게 무시당할 정도로 독은 하찮지 않다. 순간 갈지혁의 손이 움직였다.

움찔했던 배우창이 멍하니 갈지혁을 바라봤다. 아무런 이상도 없는 탓이다.

“뭐야? 왜 아무것도…….”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코로 피가 쏟아져 내렸다. 그제야 배우창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당신이 우습게 봤던 독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이고 싶었지만 일부러 시간을 두면서 죽는 독으로 하독했다. 한 시진을 버틸 수 없을 거다.”

말을 마친 갈지혁이 몸을 돌렸다. 배우창은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급히 소리쳤다.

“자, 잠시만!”

갈지혁은 말없이 자신을 부른 배우창을 쳐다봤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얼굴에 역력하다. 아마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독에 당한 것은 처음일 게다.

“내가 미안하네. 마, 말을 잘못한 듯하이. 제발 목숨만은…….”

“미안하지만 해독약이 없어.”

“그,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죽어야겠지.”

“이, 이보게! 내가 잘못했다 하지 않았는가. 해독약을 만들 방법은 있을 것 아닌가. 돈이라면 있는 걸 모두 줄 테니 제발 해독약을 만들 방법이라도 알려 주게.”

갈지혁은 말없이 배우창에게 손짓했다. 다가오라는 갈지혁의 손짓에 배우창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갈지혁은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조그맣게 무슨 말을 했다. 배우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 정말 그걸 먹어야 하는가?”

“그게 아니면 해독약은 없다. 그리고 돈이라면 얼마든지 준다고 했지? 이 옷으로 버틸 재간이 없어서 그런데 조금만 줬으면 하는군. 날씨가 너무 추워서 말이야.”

실제로 지금 갈지혁은 남만에서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상태였다. 중원의 것과도 맞지 않고, 너무나 얇아서 추위를 버티는 것도 어렵다.

배우창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돈을 준다는 게 억울하지만 지금 그런 걸로 시간을 끌 여유는 없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이다. 배우창은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서 갈지혁에게 모두 주었다.

“이, 이거면 족할 걸세.”

“고맙게 받지. 그리고 독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놈에게 무시 받을 정도로 독의 길은 우습지 않아.”

“그리하지. 그, 그럼 이만 가봐도 되겠나?”

“그래. 어서 가서 약을 구해먹어야지. 안 그러면 목숨이 위험할 테니. 그리고 당신의 부하들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테니 딱히 약 같은 건 필요 없을 거야.”

말을 마친 갈지혁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고, 배우창은 급히 마을을 향해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갈지혁이 말해 준 해독약을 먹기 위해서였다.

얼마를 걷던 갈지혁은 자신이 말해 준 약재를 찾고 있을 배우창을 생각하며 웃어 버리고야 말았다.

애초부터 갈지혁이 하독한 독은 생명을 위험하게 하는 건 아니었다. 피를 토해 내긴 했지만 잠시 어지럽다가 그대로 사라질 독이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이런 일을 계산하고 그리 행동한 것이다.

지금쯤 배우창은 신나게 동네 마구간을 뒤지고 있을 게다. 갈지혁이 말한 해독약은 그곳에 있을 테니까.

거짓으로 말한 해독약은 바로 말의 분비물이다.

갈지혁의 다리가 향하는 곳은 커다란 천을 파는 곳이었다. 옷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갈지혁은 마을을 돌면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들을 의식해야만 했다. 행색은 남루하면서도 독특했다. 더군다나 얼굴은 가리고 있어 수상하게까지 보인다. 시선이 가는 건 당연하다.

그랬기에 갈지혁은 말없이 동네를 돌면서 천을 파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이각 정도를 돈 후에야 목표한 곳에 도착했다. 그는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나이를 지긋이 먹은 듯한 노인이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갈지혁은 노인의 앞에 다가가 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음?”

꾸벅 꾸벅 졸던 노인은 잠에 깨 갈지혁을 보고는 순간 화들짝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노인이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요?”

“옷 하나를 구하려고 하는데 있습니까?”

“아, 물론이지요.”

노인이 가리킨 곳으로 간 갈지혁은 그곳에 있는 옷들을 살폈다.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소매가 꽤나 넉넉한 것을 고른 갈지혁은 옷의 값을 계산하면서 물었다.

“천도 팝니까?”

“크기가 얼마나 되는 천말이오?”

“십 자[尺] 정도면 되는데 가능합니까?”

“뒤로 따라오시오.”

말을 마친 노인은 뒷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밖에는 가득 천들이 걸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갈지혁은 말없이 천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흰색 천 앞에서 갈지혁은 멈춰 섰다. 노인이 옆에 와서 물었다.

“이거면 되겠소?”

“물론. 그런데 글자도 써 주시겠습니까?”

“글자? 어떻게 말이오?”

“한 가운데부터 아래로 쭈욱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독왕대로행(毒王大路行)이라고.”

“뭐, 뭐요? 독왕대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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