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20화
노인은 자신의 귀가 잘못 됐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반문했거늘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요?”
“말했잖습니까. 독왕이라고.”
“뭐하는 자인지 모르겠지만…… 원하니 해 주겠소. 하지만 이 후의 일은 책임지지 않겠소이다.”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은 그 흰 천을 꺼내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독왕대로행!
독왕이 큰길을 걷는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독왕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갈지혁 자신일 테고. 그는 이 천을 걸고 무림을 움직일 생각인 거다.
미쳤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무림에서 독왕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꺼내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는 일이다. 만약 이 천을 걸고 무림을 떠돈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를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압박을 받게 될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사천당문은 분노할 것이다. 무림맹은 갈지혁을 죽이려고 들지도 모른다.
물론 그걸 모를 갈지혁이 아니다. 그는 독황독립문 최고의 기재였다. 머리가 없이 단순히 재능만으로 최고라는 호칭을 얻을 수는 없다. 알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갈지혁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는 것이다.
“다 됐네.”
노인이 흰 천을 갈지혁에게 건넸다. 말없이 그 흰 천을 바라보는 갈지혁의 눈동자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독왕의 길을 걸으려 한다. 섬서성에 들어온 지금부터 갈지혁은 그 하나만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눈에 띄는 행동을 하니 독황독립문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을 죽이려고 할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쉽게 당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 주고 싶다.
‘우선은 이름을 떨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자들을 쓰러트려야지.’
비무행이다.
갈지혁이 택한 것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단순한 비무행이었다.
독황독립문 내에 긴급히 회의가 벌어졌다.
지대익이 상석에 앉은 채로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양쪽으로는 몇 명의 무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독황독립문을 이끄는 자들이다.
한 문파를 이끄는 입장에서 하루에 그가 해결해야 할 일은 한 둘이 아니다. 거기다가 무공도 익혀야 하니 지대익의 하루하루는 쉴 틈도 없이 돌아간다. 그렇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다.
자신의 관리에 철저하다는 증거다.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몇 가지 안건을 해결함과 동시에 독황독립문의 미래를 결정할 만한 중대한 일 때문이다.
지대익은 그 전의 것들을 모두 해결하고 본격적인 일로 들어갔다.
바로 갈지혁과 단화초의 이야기다.
지대익이 말했다.
“갈지혁이 빠져나갔다. 다행히도 우리가 두껍게 감시망을 짜둔 탓에 곧 발견하고 뒤를 쫓는 건 성공했다.”
“문주! 갈지혁이라면…… 사독문에 갇힌 그…….”
“맞다. 그놈이 며칠 전 사독문을 벗어났다.”
“사, 사독문을!”
회의에 모인 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갈지혁이 사독문에 갇힌 지 육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다. 그렇지만 아무도 갈지혁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가 독황독립문 내에서 있을 때의 일을 잊지 않는 탓이다.
그놈은 괴물이었다. 중원인을 멸시하는 그들에게 그런 갈지혁은 걸림돌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대부분의 수뇌부들은 그런 갈지혁을 제거하는 데 동참했다. 창피하게도 그렇게 어린놈 하나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 회생충을 이용해 내공도 쓸 수 없게 했다. 그런 갈지혁이 어떻게 사독문을 벗어난다는 말인가.
“문주님. 어떻게 갈지혁이 사독문을 벗어났다는 겁니까? 내공이 있는 자라고 해도 사로를 걷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큭큭, 갈지혁이 일악천을 만났다.”
“……!”
일악천을 만났다는 말에 모두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최악의 상상이다. 독황독립문에 악의를 가지고 있을 두 사람이 만났다. 더군다나 일악천이라면 독황독립문이 개파한 이래 최고의 고수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 그와 갈지혁이 만났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당장 죽입시다. 호랑이 새끼를 놔뒀다가는 귀찮아 집니다.”
꽤나 젊어 보이는 자다. 남만인답게 검은 피부와 단단해 보이는 근육은 그가 건장한 무인이라는 것을 보여 줬다.
“아니, 놔둘 거다. 놈은 중요한 것을 알고 있으니까.”
“문주! 일악천의 제자라면 이미 그 일신의 실력이…….”
이번에 나선 것은 지대익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무인이었다. 그 말은 곧 일악천과 같은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이다. 그는 두렵다는 듯이 손을 덜덜 떨었다. 일악천의 무위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공중을 덮던 그 독분에 독황독립문을 밀어붙이던 무인들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그때 본 일악천은 신이었다. 그 누구라 해도 이길 수 없는 태산이었다. 그런 일악천의 제자라니…….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놈은 분명 단화초의 위치를 알 것이다.”
“단화초라니…….”
단화초라는 말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지금 이 안에 있는 자들 모두 지대익이 얼마나 단화초를 원하는지 아는 탓이다. 정확히 용도는 모르지만 지대익은 천하를 휘어잡는 것과 단화초를 구하는 걸 동급으로 쳤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리라.
“난 일악천을 알지. 분명 제거하지 않으면 내가 마침내 찾아낼 거라는 것도 알 게야. 그럼 답은 하나지. 단화초를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들 게야. 그렇지만 자신이 나가지 않는다면 답은 뻔하지.”
갈지혁이다.
분명 갈지혁은 단화초가 있는 곳으로 갈 게다. 그리고 그때까지 갈지혁은 살아줘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갈지혁의 뒤를 봐준다. 놈이 죽으면 안 되니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자가 있다면 말해 보게.”
말을 마친 지대익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도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못했다. 비록 웃고는 있지만 지대익의 성격을 익히 아는 그들이다. 지대익이 그리 말한다면 이미 답은 내려진 게다.
“그럼 회의는 이만 마치지.”
말을 마친 지대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섬서성을 기점으로 자그마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괴인에 대한 게 바로 그것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아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다. 다만 목소리를 통해 젊다는 것 정도를 추측하는 게 다다. 비록 행색이 신비하다고는 하지만 그게 소문이 퍼질 이유는 아니다.
이유는 하나였다. 알 수 없는 비무행. 그리고 손에 들려진 대나무에 묶여 있는 독왕대로행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처음엔 웃었다. 아무도 그 괴이한 사내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섬서성에 있는 무인들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섬서성의 작은 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적성검(赤星劍) 이문학이 쓰러졌을 때부터 그 사내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작은 도장의 주인이라 하지만 적성검 이문학은 그 부근에서 상당히 이름을 날리는 자였다.
화산의 속가제자답게 검에 대해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화산은 구파 일방 중에서도 검에 대해서는 손꼽히는 문파다. 그런 곳의 속가제자인 이문학이 결코 약할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단 일초에 쓰러졌다.
그 대결을 보던 사람들은 사술(邪術)이라고 소리쳤다. 아무도 정체불명의 사내가 휘두르는 무엇인가를 보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독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 후로는 사내의 행보를 사람들은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음엔 누구를 쓰러트릴까?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사내의 정체에 대해서 아는 자도 없다. 그저 모두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의 행보를 주시할 뿐이다.
“흐암!”
갈지혁은 길게 하품을 했다. 섬서의 추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역시 추운 건 체질에 맞지 않는 듯하다. 오랜 남만 생활 탓인지 추위를 버티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막 잠에서 깨어났지만 추위 탓인지 단숨에 정신이 멀쩡해진다.
갈지혁은 사황이 매달려 있는 팔을 들어 올렸다. 이 녀석 또한 추위가 견디기 쉽지 않은 모양이다. 사황은 거의 대부분을 시간을 갈지혁의 옷 안에서 보냈다.
이해는 간다. 사황 또한 남만에서 살아오던 뱀이다. 이곳의 날씨가 사황이 버텨 내기에는 너무 추운 것도 사실이다.
“조금만 버티거라. 중원은 사계절이 있어서 추웠다가 이내 따뜻해진다고 하니까.”
실제로 갈지혁이 눈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내리는 눈을 보고 무척이나 신기했다. 정말로 이야기대로 차가운지 손가락까지 대보고 심지어 먹어 보기까지 했다.
중원인이지만 남만에서 자랐고, 남만의 습성이 몸에 베였다. 중원의 모든 것이 갈지혁에게는 다소 특이해 보이고 신비의 대상이었다.
‘이러다가 말로만 들어 보던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겠군.’
갈지혁은 가벼워진 주머니를 느꼈다. 여태까지는 어떻게 전에 만났던 녹림도에게 뜯어냈던 돈으로 버텨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돈도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이런 날씨에 밖에서 자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정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부터 고생 좀 하겠구나. 그래도 용서해라.”
갈지혁은 사황에게 중얼거리고는 이내 짐을 챙겨들고 객잔을 나섰다.
중원에 나와서 비무행을 펼친 무인의 수가 대략 열 명 정도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갈지혁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랬기에 오늘은 다소 다른 상대를 골랐다.
약선문이라는 문파에서 배출된 인물이 근방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약선문이라면 독보다는 의술에 치중한 문파지만 어차피 그 둘은 한끝 차이다.
약을 쓴다는 것은 곧 독을 쓸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더군다나 이 근방에 있는 약선문의 인물은 독에 대해 상당히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독을 펼치기만 하면 쓰러지는 자들보다는 한결 나으리라.
옷 속에 있는 사황이 꿈틀거렸다. 갈지혁은 손으로 조용히 사황의 머리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녀석, 얌전히 있어라. 곧 끝낼 테니.”
얼마를 걷던 갈지혁의 다리가 멈췄다. 꽤나 거대해 보이는 건물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현판에는 약선문이라는 세 글자가 강인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갈지혁의 손이 가볍게 문에 닿았다. 순간 약선문의 정문이 폭발하듯이 튕겨 나갔다.
결을 응용한 갈지혁의 공격은 가벼웠지만 강했다.
갈지혁은 성큼 약선문의 섬서 지부에 들어섰다. 머리카락에 감춰진 갈지혁의 눈이 빛났다.
그 눈빛은 상처를 입은 맹수의 것과도 같이 날카로웠다.
약선문의 섬서 지부는 조금 독특한 곳이다.
약선문이라는 자체가 의술로 유명한 곳이지만 유독 섬서 지부는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독에 대한 연구를 한다. 애초부터 약선문의 섬서 지부는 독에 대해서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곳이다. 그랬기에 수많은 독도 있고, 그에 대한 파해법도 알려져 있다.
더군다나 섬서 지부를 맡고 있는 흑백쌍면(黑白雙面) 곽운지(藿云池)는 의술뿐만이 아니라 독으로도 유명한 자다. 그랬기에 그가 섬서 지부를 맡을수 있게 된 것이기도 했다.
의술을 펼치기 위해서는 독을 알아야 한다. 독과 약은 전혀 다르면서도 또한 비슷하다. 이게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랬기에 약선문의 무인들 중 일부는 독을 쓰기도 했고 흑백쌍면 곽운지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흑백쌍면이라는 별호는 그의 양면적인 모습 탓에 생긴 별호다.
의술을 펼치는 백의 모습, 독을 뿌리는 흑의 모습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규율에 엄격하고 그걸 어기는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벌을 주기로 유명한 그다. 그렇지만 그런 그도 한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곽운지를 그토록 만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나이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현재 약선문의 문주인 운구룡의 손녀인 운하연이다.
어제 저녁에 찾아온 그녀는 아직까지 곽운지가 준비해 둔 책들을 읽기 바빴다.
그건 곽운지가 독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것들을 나열한 것이었다.
옆에서 운하연을 바라보는 곽운지는 절로 감탄을 내뱉었다.
‘대단한 집중력이야! 여자만 아니었다면 능히 약선문의 문주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을…….’
책에 신경을 집중한 지 어언 세 시진이 훨씬 지나 버렸다. 그 긴 시간 동안 운하연은 단 한 번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연신 책을 훑었다. 그렇게 시간일 지나고 마침내 운하연이 책에서 눈을 뗐다.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원하시는 소득은…….”
운하연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곽운지는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부터 약선과 운하연이 찾는 약재를 위해 많은 것을 조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틀린 모양이다.
“괜찮아요. 언젠가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예, 그렇겠지요. 아가씨도 그리 편히 생각하시지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운하연의 표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 그녀가 짐작하건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길어야 삼 년이다. 그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곽운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당히 피곤하신 듯합니다.”
“아, 자지도 않고 달려와서 그런가 봐요. 조금만 쉬면 괜찮아지겠죠.”
운하연은 애써 웃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찾을 수 있는 단화초였다면 이미 예전에 그 약초가 있는 곳을 알아냈을 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섬서 지부의 힘도 이용해 봤지만 역부족이다.
‘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죽을 정도로 달렸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