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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21화 (21/200)

# 21

21화

곽운지가 문 옆에 서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모시고 가게.”

“알겠습니다. 가시죠, 아가씨.”

운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때였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막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가 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

곽운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아가씨도 계신데 이렇게 무례한 행동을…….”

“지, 지부장님! 지금 이상한 놈이 문을 부수고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뭐야? 그런 놈이라면 너희들이 알아서 하면 될 게 아니냐. 안 되면 약을 뿌려서라도 재워 버려.”

“저, 그게…… 독까지 살포했지만 상대가…….”

“상대가 뭐?”

키가 작은 사내가 몸을 움츠려 드니 더욱더 왜소해 보였다. 망설이는 듯하던 사내가 마침내 말을 이었다.

“멀쩡하게 독을 받아 내고 지부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제길! 어떤 미친놈이야!”

곽운지는 욕설을 내뱉었다. 가뜩이나 지금 기분도 썩 좋지 않은데 이상한 놈이 나타나 난동을 부린다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지부에 있는 수하들에 대해서도 화가 솟구쳤다. 행패를 부리는 파락호 따위를 어찌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말이다.

“무슨 일이에요?”

“아닙니다. 아가씨는 가셔서 푹 쉬시면 됩니다. 어떤 미친놈이 행패를 부리는 모양입니다. 제가 해결하지요.”

“곽 아저씨. 또 힘으로 해결하려는 거죠?”

“큭, 아가씨! 누가 들으면 제가 언제나 힘으로만 해결하는 줄 알지 않겠습니까.”

“어? 그럼 아니었던가요?”

“……아가씨는 나이를 드시면서도 그 입심만은 변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어릴 때의 기질이 다분하시군요.”

그 말에 운하연은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미소다. 그렇지만 지금 곽운지에게 그건 상당히 잔인해 보였다.

무엇인가를 할 때는 한없이 진지하지만 평소 운하연은 장난기 있는 여인이다. 그리고 지금 또 그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이다.

“같이 가보죠. 곽 아저씨가 힘으로 해결하는지 아니면 다른 수로 일을 마무리 짓는지 봐야 되겠어요.”

“맘대로 하십쇼. 절 힘만 쓸 줄 아는 놈으로 보셨다면 그 생각이 싹 바뀔 겁니다.”

곽운지 또한 운하연의 행동을 가볍게 받아쳤다. 지금 운하연의 기분을 아는 탓이다. 지금 그녀는 어떻게든 유쾌해지고 싶은 것이다.

언제나 그런 여인이다. 자신이 힘든 것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천성이 의술을 걷을 만한 인물이다. 상대에게 언제나 미소만을 보이고 기쁘게 해 주려는 것이 말이다.

곽운지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고 그 뒤를 운하연과 그녀의 옆을 지키는 풍씨 성을 가진 무사가 따랐다.

점점 정문 쪽을 향해 다가갈수록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절로 곽운지는 신경이 예민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지금 운하연과 한 말도 있고 해서 어떻게든 다른 수로 해결을 보려는 것이다.

마침내 근방에 도달한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약선문의 내부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런 개…….”

습관처럼 욕을 내뱉으려던 곽운지는 급히 말을 멈췄다. 자신의 바로 뒤에 있는 운하연 탓이다. 그녀가 재미있다는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깨끗하게도 박살을 냈네요.”

“그, 그렇군요.”

“아, 그 장본인이 저기서 걸어오네요.”

운하연은 손가락으로 곽운지의 옆을 가리켰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운하연의 말대로 전혀 본 적이 없는 자가 서 있었다.

‘뭐야? 저놈은.’

곽운지는 전혀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인물임을 확인하고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런 자는 본 적이 없다.

곽운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운하연은 땅에 쓰러져 있는 약선문의 문도의 상태를 살폈다. 맥을 짚고 이곳저곳을 살피던 그녀의 얼굴에 일순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그때 운하연의 상념을 끊고 곽운지가 움직였다.

“네놈은 누구기에 감히 약선문을 건드리는 게냐?”

“흑백쌍면 곽운지 맞습니까?”

“그래. 내가 누군지 알면서 지금 이런 짓을 벌였느냐?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당신을 데리고 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 가볍게 손을 본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신이 나왔지요.”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있어 외모는 전혀 알아볼 수 없다. 그리고 곽운지 또한 애초부터 얼굴로 그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곽운지는 정체불명의 사내의 기도를 느꼈다. 전혀 느껴 본 적이 없다. 이런 기도는.

“이 새끼가…….”

막 손을 휘두르려는 곽운지를 향해 운하연이 소리쳤다.

“아저씨! 함부로 움직이지 마요.”

“무슨 일입니까, 아가씨?”

“상대는 독을 써요. 방심하지 말아요.”

“독? 독을 쓴다는 말입니까?”

운하연의 눈은 쓰러져 있는 약선문의 문도에게서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자를 가지고 운하연은 상대가 독을 쓴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극독이 아니라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하루 정도 꼼짝하기 힘든 마비성을 지닌 독이다.

‘이 독은 홍갈의 독이야. 그리고 중원에서 이 독은 쓰이지 않아. ……그래, 남만! 남만에서 자주 쓰이는 독이지.’

마비된 것과 그 후의 상태만 보고 운하연은 상대가 어떤 독을 썼는지 알아차렸다.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독을 사용한 상대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운하연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버렸다. 앞에 있는 자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운하연의 기억력은 대단하다. 한 번 본 것은 절대 쉽게 잊지 않는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본 적이 있는 듯하다.

‘남만? 독?’

그 두 가지를 떠올리는 순간 운하연은 앞에 있는 자의 정체를 알아 버렸다.

그녀의 새파란 눈이 커졌다.

“뭐야? 당신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만난 지 육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운하연은 똑똑히 사내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사독문에서 틱틱대던 사내의 대답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갈지혁이라는 이름도.

운하연의 반응에 막 갈지혁에게 살수를 펼치려던 곽운지는 손을 멈췄다.

그가 운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가씨, 아는 사람입니까?”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는 사람이겠죠. 하지만 제가 알기에 지금 이곳에 있을 사람은 아니라는 건데…….”

갈지혁은 사독문에 갇혔다. 그곳을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사독문을 지키는 무인들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운하연 또한 사독문이 어떠한 곳인지 잘 안다. 갈지혁이 이곳에 있다는 말은 곧 사로를 걸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만 갈지혁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잠시 멈칫했던 갈지혁이 이내 무엇인가를 생각해 낸 듯이 말했다.

“그때 사독문에 왔던 건방진 여자?”

“뭐라고요?”

운하연은 눈썹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사독문에서 왔던 이라는 말에 운하연의 옆에 있던 무사가 급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또한 일전에 사독문에 운하연과 함께 왔다가 일악천에게 혼지검이 난 적이 있는 자였던 것이다. 처음엔 몰랐거늘 사독문이라는 말에 갈지혁을 기억해 낸 모양이다.

“이놈 잘 만났다. 그때는 일수만독에게 창피한 꼴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풍 아저씨, 안 되요. 아저씨는 못 이겨요.”

“아가씨! 겨우 저런 새파란 젊은 놈에게 제가 진다는 말입니까?”

운하연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운하연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그는 검을 돌리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는 탓이다. 예전에 사독문에서도 운하연이 검을 거두라고 해서 그렇게 행동했다. 양패구상이라는 말을 그때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진다고 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운하연은 답을 내렸다.

분명 그녀가 그렇다면 그것이 맞으리라. 하지만 무인으로서 인정할 수가 없다. 그 또한 독이라는 것은 하찮은 잡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아가씨, 소인을 너무 얕보시는 것 같습니다.”

“아저씨!”

“보여드리죠.”

그는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검날의 길이가 한 치 더 길다. 애초에 그 무사의 신장이 긴 탓에 그에 맞게 변형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조그만 차이가 종종 생사를 가르는 대결에서 크게 변수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때 곽운지가 소리쳤다.

“당장 멈추지 못할까!”

검을 꺼내 들었던 무사는 곽운지의 호통에 몸을 멈췄다. 운하연에게는 한없이 약한 그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나찰과도 같이 엄하다.

“건방지게 아가씨의 말을 어기고 함부로 행동하려 드느냐? 그리고 이놈은 내 몫이다. 넌 물러나 있거라.”

“……알겠습니다.”

풍씨 성을 지닌 무사는 뒤로 물러났다.

곽운지가 성큼 앞으로 다가갔다.

“아가씨와 아는 모양인데 왜 약선문의 섬서 지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말해 보게. 날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용서 못 하네.”

“후후, 당신이 독에 강하다 해서.”

“……그게 다냐?”

갈지혁은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대나무를 흔들었다. 끝에 말려 있던 천이 펼쳐지며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막 손을 움직이려던 곽운지는 그 천에 적혀 있는 글자를 확인하고는 멈칫했다.

“독왕대로행? 그렇다면 네놈이 적성검 이문학을 쓰러트렸다는 그…….”

곽운지 또한 갈지혁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이유도 없다. 아무런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독왕대로행이라는 깃발 아래 싸웠고, 이제는 이 부근에서 상당히 이야깃거리가 된 사내. 그런 자가 눈앞에 있다.

“아가씨, 손 좀 봐도 되겠습니까?”

“…….”

운하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승낙의 의미라고 생각한 곽운지는 위에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던졌다. 검은색 장포를 던진 곽운지의 몸은 외공을 익힌 고수처럼 단단해 보였다.

“독이라 했느냐? 어린놈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 주마.”

곽운지의 말에 갈지혁은 눈을 빛냈다.

무림에 나와 처음으로 독에 대해진정으로 아는 자와 대결을 벌이게 된 것이다. 갈지혁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뒤로 잡아당겼다. 거치적거리는 것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반면 곽운지는 검을 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뒤쪽으로 밀어내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곽운지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갈지혁이 짧게 말했다.

“난 독인이니까.”

“검은 필요 없다, 이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갈지혁은 대답을 대신했다. 곽운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저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철없는 애송이의 난동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적어도 그런 자였다면 이만큼 독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다. 손을 섞기도 전이거늘 짜릿한 감정이 곽운지의 등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곽운지 또한 독에 일가견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쉽사리 손을 뻗기가 어려워졌다. 상대가 단순한 애송이가 아님을 느낀 탓이다.

곽운지가 씨익 웃었다.

“맘에 든다. 하지만 이곳에서 행패를 부린 벌은 받아야겠지?”

그의 눈에서 사나운 안광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곽운지의 발이 땅을 박차면서 튀어 올랐다. 공중에서 화려한 변화를 보이며 그의 발이 갈지혁의 요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갈지혁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파팍!

발을 가볍게 밀어내던 갈지혁의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의 손에 녹색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가볍게 몸을 뒤로 빼려던 곽운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상했던 것의 배 이상의 위력이 갈지혁의 손에서 느껴진 것이다.

재빠르게 몸을 빼려 했지만 갈지혁이 빨랐다. 곽운지는 몸을 빼는 대신 비틀었다.

쾅!

독장을 그대로 받은 곽운지는 그대로 굴러가면서 피를 토해 냈다. 벽에 몸이 처박히면서 외곽을 지탱하는 담이 무너져 내렸다.

“쿨럭!”

기침을 하면서 곽운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신 쉬지 않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곽운지는 급히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얼굴에 땀으로 번들거렸다.

“네놈…… 뭐 하는 놈이냐?”

독장은 중독의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갈지혁의 일장은 파괴력까지 가지고 있다. 이런 독장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다.

갈지혁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천을 가리켰다.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천이 겨울바람에 미칠 듯이 펄럭였다. 갈지혁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독왕입니다.”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갈지혁의 한 마디에 곽운지는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위에서 둘의 모습을 보고만 있던 운하연의 얼굴에도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갈지혁의 행동에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무림에 독왕이라니…….

멍청한 것인가, 아니면 순진한 것인가!

그리고 그제야 운하연은 정신을 차리고 갈지혁을 볼 수 있었다.

갈지혁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단화초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일악천의 제자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함께했을 게다.

‘알지도 몰라…… 단화초의 위치를!’

운하연은 급히 갈지혁을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 몸을 가다듬은 곽운지의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태연히 서 있던 갈지혁 또한 자신의 손으로 맞상대해 갔다.

곽운지는 상대가 강하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단숨에 절초를 펼쳤다.

십이비선장(十二飛線掌)!

길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손의 그림자가 상대를 향해 뻗어져 나간다. 물론 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동시에 소매 속에 준비된 독분이 하늘을 뒤엎는 다는 것이다.

손은 피한다 해도 독분의 거리까지 피해 내는 건 힘들다.

‘좋아! 물러서지 않았다!’

십이비선장의 유일한 약점은 상대가 뒤로 물러난다면 독분의 거리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거다. 그런데 갈지혁은 뒤가 아닌 옆으로 피해 냈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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