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22화 (22/200)

# 22

22화

펑!

소매에서 독분이 터져 나왔다. 성공을 확신하면서 펼친 공격이다. 그런데.

“우웩!”

자신 있게 소매를 휘둘렀던 곽운지가 뒤로 튕겨 나가 버렸다. 그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하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다리는 후들거렸다. 독에 중독된 현상이다.

갈지혁이 독분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왔다. 이 정도에 당할 갈지혁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는 바람의 방향을 이용해 오히려 곽운지를 독에 중독시켜 버렸다.

해독약은 있지만 지금 내상까지 모두 낫게 할 수는 없다. 곽운지의 얼굴빛이 변했다. 사십이 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어린 자에게 패한 적은 없다. 그것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곽운지가 섬서 부근에서야 어느 정도 유명한 자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무인의 자부심이 있다.

그때였다.

곽운지가 피를 토해 내면서 씨익 웃었다.

“놈! 네가 밟고 있는 땅은 이미 중독되었다.”

갈지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곽운지는 계속해서 말했다.

“쓰러지면서 지향석(地香石)을 뿌렸다.”

지향석은 땅에 스며든 후에야 그 위력을 발휘하는 독이다. 튕겨 나가는 찰나에 지향석을 뿌린 것이다. 갈지혁이 걸어올 길을 아는 탓에 가능했던 행동이다.

더군다나 지향석은 독성은 그리 강하지 않지만 워낙 제조 방법이 천차만별이라 그 해독약 또한 각양각색이다. 곽운지는 승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갈지혁은 말없이 땅을 향해 몸을 굽히더니 손으로 흙을 한 줌 쥐어 올렸다. 그리고 갈지혁은 코에 흙을 가져다 댔다. 곽운지는 그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독을 처음 접하는 자가 아니라면 저런 무식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내 갈지혁의 입이 열렸다.

“흑적지네, 적사, 광대버섯…….”

“미, 미친!”

곽운지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냄새다. 냄새를 맡고 그 독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독의 냄새를 맡아 그것의 성분을 알아낸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곽운지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주, 중독되지 않았어. 이럴 수가!’

지향석의 독은 땅을 밟는 순간 독기가 치밀어 오른다.

공기를 통해 피부나 코로 스며들고 바로 구역질과 오한이 일어난다. 비록 지향석이 치명적인 독은 아니라고 하나, 이런 승부에서는 바로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유용한 독이거늘…….

곽운지는 멍하니 갈지혁을 바라보다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설마 독인?”

말을 하면서도 곽운지는 믿을 수가 없는 듯한 눈이었다. 독인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 웬만한 독에는 중독도 되지 않는 그런 자를 일컬어 독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문제는 저토록 젊은 자가 독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독인이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독인이 아니고서야 독의 냄새를 직접 맡는 저런 짓을 벌였을 리가 없다.

혹시나 했거늘 갈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길, 상대를 얕봤어. 독인의 경지에 오른 놈을 애송이라고 생각하다니…….’

애초부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상대다. 독인이라면 그 정도로도 승부를 장담할 수가 없다.

마음을 바꿨다. 혼쭐을 내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진지하게 변했다. 곽운지는 독에 능하다. 그렇지만 상대가 독인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웬만한 독은 먹히지도 않을 게다. 상대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인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상대하기가 버겁다.

갈지혁의 손이 꿈틀했다. 그 작은 행동에 곽운지는 깜짝 놀랐다.

독인이라는 이유 탓이다. 독인의 경지에 이른 자라면 독을 하독하는 방법도 예측하기 어렵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곽운지는 꺼내지 않으려던 검을 들어 올렸다. 독으로는 결코 상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검을 쓰는 수밖에…….

그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하세요.”

“아가씨!”

“곽 아저씨, 마음은 이해하지만 손을 거두세요.”

곽운지의 얼굴에 분하다는 감정이 가득 묻어났다. 섬서 지부가 당했다. 물론 이삼 일 정도 지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는 오겠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 손을 겨루면서 곽운지는 한결같이 밀리기만 했다.

자존심의 문제다. 지금 물러서면 패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하지만…… 거뒀다. 운하연의 말이라면 곽운지는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곽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곽운지의 마음을 알았는지 운하연은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 또한 곽운지의 평소 모습을 아는 탓이다. 누군가에게 지고는 절대 살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그이니까. 그렇지만 자신 때문에 손을 거두어 준 곽운지가 못내 고마웠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곽운지는 검을 다시 허리에 찼지만 앞에 있는 갈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막 재미있어지려는 찰나에 방해를 받은 탓이다. 그가 사나운 눈으로 운하연을 노려봤다. 그렇지만 그 같은 눈빛을 운하연은 가볍게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요?”

“난 없는데?”

“차라도 한 잔 할래요? 무슨 차 좋아해요?”

갈지혁의 눈이 꿈틀했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얼굴도 일그러졌다.

상당히 기분이 나쁜 탓이다.

“우선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이봐, 난 차나 마시러 이곳까지 온 게 아니야.”

운하연은 갈지혁을 바라봤다. 그녀의 이색적인 파란색 눈동자가 신기하게 빛났다. 갈지혁은 문득 그 눈빛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난 싸우러왔다. 한가하게 차나 마시려고 이렇게 오지 않았어.”

“하지만 전 당신과 싸울 맘이 없는 걸요?”

“누가 너랑 싸운다고 했나? 내가 상대하려는 자는 곽운지라고 불리는 저자다.”

갈지혁은 시선을 돌려 곽운지를 바라봤다. 앞에 있는 여인의 무림에서 유명한 약선의 손녀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지금 갈지혁의 관심거리는 그녀가 아니다.

“강한 사람과 싸우는 걸 원한다면 곽 아저씨가 아닌 저랑 싸워야죠.”

“아가씨! 안 됩니다.”

곽운지가 급히 소리쳤지만 운하연은 계속해서 웃었다. 갈지혁은 그런 곽운지의 반응에 말없이 운하연을 살폈다. 분명 약선의 손녀라면 강할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에 결코 그녀는 강해 보이지 않았다.

“네가 저 사내보다 강하다고?”

“해 보면 알겠죠.”

자신 있다는 듯한 어투다. 갈지혁은 아무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슬쩍 움직였다.

그의 소매 속에서 하얀 가루가 조금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가루는 바람을 타고 운하연에게 날아들었다.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은밀한 움직이었다.

그런데.

“에취!”

운하연은 재채기를 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갈지혁을 바라봤다.

재채기 탓에 슬며시 날아들던 가루가 급히 방향이 뒤틀렸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절묘하다.

“전 당신과 싸울 마음이 없어요. 다시 한 번 부탁하죠. 대화 좀 하고 싶은데요?”

“……좋아.”

갈지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이내 승낙했다. 어차피 더 이상 곽운지와의 싸움은 이어질 것 같지 않았던 탓이다. 그토록 하고자 하는 대화를 들어 보기로 갈지혁은 마음먹었다.

운하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걷기 시작했고 그 뒤를 갈지혁이 따랐다.

곽운지가 급히 운하연의 옆에 붙어 전음을 날렸다.

[아가씨, 저놈은 누굽니까? 실력이 보통이 아닌데……]

[저도 자세한 것은 몰라요. 예전에 한 번 본 게 다니까요. 그리고 제 추측이 맞다면 아마 당문에 있는 몇 명을 제하고는 독으로는 아무도 상대할 수 없을 거예요. 일수만독의 제자니까요.]

그 전음에 곽운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일수만독이라는 이름 탓이다. 지금 세월이 흘러 많은 사람이 그를 잊었지만 약선문의 문도들의 대부분은 일수만독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그의 무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일수만독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무림에서 천천히 그의 이름은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일수만독의 제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곽운지는 채 무슨 말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목적지까지 도착한 운하연이 웃으며 갈지혁을 바라봤다.

“안으로 들어가죠.”

갈지혁은 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방 안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운하연의 옆에 서 있는 곽운지의 표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 정파 무림에서 일수만독이라는 별호는 금기시 될 정도로 입에 담기 꺼린다. 그런 그의 제자가 지금 눈앞에 있다.

도대체 일수만독의 제자가 무슨 이유로 중원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갈지혁과 마주 앉은 운하연이 웃으며 물었다.

“어떤 차를 좋아해요?”

“차는 필요 없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나에게 묻고 싶다는 게 뭐지?”

시녀를 부르려던 운하연은 마음을 바꾸고 갈지혁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운하연의 눈을 갈지혁은 피하지 않았다.

신비한 파란 눈.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단화초의 위치 알고 있죠?”

“궁금한 게 그게 단가? 몰라. 그럼 이만 나가보지.”

갈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운하연은 옆을 스쳐 걸어가려는 갈지혁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아뇨. 당신은 알고 있을 거예요.”

“모른다고 했지? 손 놔. 안 그러면 고운 얼굴 망가진다.”

갈지혁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애초부터 마음에 안 드는 여인이었다. 이야기를 듣겠다고 온 것도 독을 뿌린 것을 재치 있게 받아넘긴 그녀의 행동이 썩 재미있어서였다.

분명 단화초의 위치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절대 말해 줄 수 없다. 그건 일악천과의 약속이다. 단화초는 갈지혁 본인의 손으로 제거해야 한다.

살기 어린 갈지혁의 말에 곽운지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 검을 움켜쥐었다. 만약에 갈지혁이 움직인다면 그 또한 바로 검을 출수할 것이다. 비록 무림에서 알아주는 고수는 아니지만 약선문 내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실력자다.

문파 자체가 무공보다 의술에 치중하니 약선문의 고수라 해도 무림에서는 크게 알아주지 않는 형편이다.

“후, 좋아요. 모른다고 해 두죠. 그리고 안다고 해도 말해 줄 리도 없고. 하지만 전 꼭 단화초가 필요해요. 그 약초가 없으면 셀 수도 없는 사람이 죽어요. 그 안에는 저의 소중한 사람들도 있어요. 전 그들을 살리고 싶어요.”

“미안하지만…… 난 그 단화초가 어디 있는지 몰라.”

갈지혁은 소매를 잡은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독황독립문에서도 단화초를 찾고 있다. 하지만 지금 만난 운하연과 독황독립문의 지대익은 단화초를 정반대 되는 입장에서 사용하려고 하고 있다. 한 명은 천하를 가지기 위해 단화초를 필요로 하고, 다른 한 명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단화초를 원한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당히 찜찜하다. 소중한 사람을 구하고 싶다며 자신을 바라보던 새파란 운하연의 눈빛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을 그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제길, 괜히 이야기를 들었군.’

갈지혁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차라리 빨리 약선문을 나가는 것이 나을 듯하다.

갈지혁이 나간 후 반 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방 안은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그곳에 있는 셋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운하연도, 곽운지도 풍씨 성을 지닌 무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운하연은 조용히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을 지루하게 바라보던 곽운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가씨, 괜히 얽히는 건 좋지 않을 듯합니다.”

“알아요. 하지만…….”

운하연은 갈지혁이 단화초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판단했다. 분명 알면서도 감추는 게 분명하다. 단화초가 없으면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죽는다. 반드시 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도 꼬리조차 밟지 못했다. 그 말은 곧 앞으로도 찾을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거다. 잡아야 한다. 갈지혁은 이제 거의 마지막 단서라고 봐도 무방하다.

“위험한 놈입니다. 독을 쓰면서 무림을 횡행한다는 건 불가능하죠. 무림맹이 놔두지 않을 테니. 아마 일 년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지금 상태에서 조금 더 설친다면 반년이 고작이겠죠.”

“과연 그럴까요?”

“강하긴 하지만…… 무림맹에는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 독은 쓰이는 용도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이다. 일수만독 정도의 경지에 오른 독인이라면 모를까 그 전에는 무림맹의 힘 앞에 굴복해야 한다.

곽운지는 말없이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는 운하연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안 됩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죠?”

“아가씨와 알게 된 지 이십 년입니다. 절대 안 됩니다.”

지금 말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운하연이 어떠한 짓을 벌일지는 뻔하다.

분명 갈지혁을 찾아가서 다시 만날 것이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런 위험한 자는 안 만나는 게 낫다. 그렇지만 운하연과 눈이 마주친 곽운지는 머리를 감싸 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마음을 정했어.’

그의 말대로 이십 년이 넘게 옆에서 본 여인이다. 일거수일투족으로도 운하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라는 소리다.

곽운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는 말려도 될 순간을 넘어 버렸다. 저렇게 확고한 눈빛을 지었다면 반드시 그대로 하고야 마는 게 바로 운하연인 것이다.

“……휴, 알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