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23화
“고마워요. 부탁이 있어요. 그 사내가 있는 곳을 알아봐 주세요. 지금 그가 어디 있는지를. 아마 한동안 섬서 부근에 머물 거예요. 그럼 부탁할게요.”
“그리하지요. 하지만 아가씨 그놈이 정말로 위험한 놈이라는 판단이 드시면 물러서셔야 합니다.”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죠. 하지만 아저씨 말대로 정 위험하면 피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운하연의 말을 듣고도 곽운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를 너무 잘 아는 탓이다. 막상 갈지혁이 있는 곳을 알아낸다면 그 어떠한 위험이 있다 해도 달려갈 거라는 걸.
‘귀찮아졌어. 하필이면 독을 쓰는 놈이라니…….’
현 무림에서 독인은 그 어디에서도 환영하지 않은 그러한 부류가 되어 버렸다.
* * *
추운 겨울이거늘 갈지혁이 자는 곳은 형편없는 자그만 마구간이었다. 그나마 녹림도들에게서 빼앗았던 돈도 다 써 버린 탓에 이제 더 이상의 금전적 여유가 없다. 남만에서만 살아온 갈지혁에게 추위만큼 버티기 어려운 것도 없었다.
품 안에서는 연신 사황이 꿈틀거렸다. 남만에서 살아온 사황에게도 추위는 그 어떠한 것보다 무서운 모양이다.
짚단 속에 몸을 파묻은 채로 잠을 자던 갈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게 경련을 일으키던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꿈을 꿔 버렸다. 지독한 악몽을.
“제길, 날씨 한번 개 같군.”
갈지혁은 추위를 느끼며 말했다. 짚단이 비록 어느 정도 추위를 없애준다
고는 하지만 한겨울에 밖에서 지낸다는 건 쉬울 일이 아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당장 얼어 죽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잊고 지냈는데 독황독립문에 있었던 때의 꿈을 꾸어 버렸다.
그리고 그 꿈에서 보고 싶지 않은 놈을 만나 버리고야 말았다.
지운경.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베고 심지어 어머니까지 죽이려 했던 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갈지혁의 이가 부드득 갈렸다. 얼굴의 검상은 상관없다. 그깟 검상이야 수백 개가 난다고 해도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를 죽이려 하면서 비릿하게 짓던 놈의 미소는 아직도 갈지혁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가서 그 더러운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갈지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천천히 식혔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사사로운 감정은 접어야 한다.
‘기다려라. 언젠가 네놈을 한 줌의 가루로 만들어주지.’
언젠가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휘영청 밝은 달이 하늘에 우뚝 떠 있다.
한겨울의 추위가 한층 꺾였다.
점점 부드러워지는 바람과 함께 한 사내의 행동이 무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섬서에서 시작된 사내의 이야기는 점점 무림에 조금씩 퍼졌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유희에 불과했다. 독을 쓴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무림의 촉각은 곤두섰다.
섬서에는 화산파(華山派)와 종남파(終南派)가 있다.
두 문파 모두 구파 일방의 하나로 현 무림을 지탱하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그곳에도 갈지혁의 소문이 흘러 들어간 것이 사실이다.
화산파와 종남파는 지금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섬서라는 그들의 영역 안에서 독을 쓰면서 설치고 다니는 갈지혁을 좋게 볼 리가 없다.
그러나 두 문파는 서로가 이 일을 떠맡기를 바라고 있는 입장이었다. 아직 갈지혁의 행동을 제지할 명분이 없는 탓이다. 설치고 다니는 것이 눈에 걸리긴 하지만 손수 나서기는 귀찮다. 두 문파의 생각은 같았다.
그랬기에 두 문파는 암묵적으로 갈지혁을 놔두었다.
화산파와 종남파는 모두 갈지혁을 얕봤다. 겨우 독이나 조금 쓰는 무인이라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제거할 수 있는 존재라고 판단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최고의 독문이라고 불리는 사천당문조차 화산파와 종남파라는 이름 앞에서는 끔뻑 죽는다. 오대세가에 껴 있지만 다른 사대세가와 당문의 대우는 조금 다르다.
다른 세가와는 달리 독을 쓰는 탓이다.
최고의 독문인 사천당문조차 우습게 여기는 이 마당에 이름조차 모르는 애송이에게 신경 쓸 이유는 없다.
독? 우습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올랐다면 웬만한 독은 내공으로 몰아 낼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독을 쓰기 전에 베어 버리면 그만 아닌가?
화산파와 종남파뿐만이 아니다. 정파 무림의 기둥인 구파 일방의 무인 중 대부분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애송이 하나일 뿐이다. 모두 그리 생각했다.
탕.
갈지혁은 손에 들린 긴 막대기로 땅을 두드렸다.
거대한 건물이 눈앞에 있다. 장원의 크기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고 웅장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거각(巨閣)들이 위용을 뽐냈다.
구양세가(歐陽世家)!
당당하고 힘찬 네 글자가 정문 입구에 걸려 있다. 이곳이 바로 섬서에서 이름난 구양세가다. 오대세가보다는 아래라 하지만 아무도 구양세가를 우습게 보지 않는다.
그들은 강하다. 무공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빼어나다. 황궁 쪽과도 관련이 있고 섬서의 우두머리라 해도 좋을 화산파와 아주 긴밀한 관계이기도 하다. 실제로 구양세가에서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이를 화산파에 오 년 정도 맡기곤 한다.
비록 그들이 속가제자로고는 하지만 그들을 통해 결국 화산과 엮이게 된다.
또한 화산파의 무공만이 아니다. 구양세가의 가전 무공 또한 무림에서 알아주는 절기다. 뛰어난 무인들이 많은 무가. 그리고 갈지혁이 용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말없이 구양세가를 바라보던 갈지혁은 꿈틀거리는 소매를 느꼈다. 사황이 고개를 내밀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황의 머리를 쓰다듬던 갈지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황은 아직도 추운 날씨가 익숙하지 않은지 이내 몸을 숨겼다. 중원으로 온 이후 사황은 제대로 힘도 못 쓰고 축 늘어진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종종 날카롭게 빛나는 사황의 눈을 볼 때면 꼭 약해진 것 같지는 않다.
사황이 고개를 집어넣자 갈지혁은 앞을 응시했다. 거대한 건물의 위용이 대단했지만 위축됨 따위는 없다.
‘슬슬 시작해 볼까?’
갈지혁은 천천히 구양세가의 정문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남루하고 얼굴을 가려 정체조차 알 수 없는 갈지혁이 다가오자 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당연스럽게 길을 막아섰다.
무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비록 상대의 행색이 다소 남루했지만 구양세가의 무인답게 절도가 있다.
갈지혁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문을 지키던 무인들의 눈이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구양세가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갈지혁이 천천히 말했다.
“저 현판을 부수러 왔다.”
“……뭐?”
빠악!
갈지혁의 발이 바로 앞에 있던 사내의 무릎을 꺾었다. 주변에 있던 무인들이 모두 무기를 꺼내 들고 갈지혁을 둘러쌌다. 열 명에 달하는 자들이 동그랗게 갈지혁을 감쌌다. 위험한 상황이거늘 갈지혁은 오히려 너무나 태연해 보였다.
“와봐.”
갈지혁이 손을 까닥거렸고 기다렸다는 듯이 무인들이 움직였다.
그러나 달려든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그들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컥!”
단발의 비명 소리와 함께 하나둘씩 벽에 틀어박혔다. 독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갈지혁의 손은 그들이 감당하기 너무 벅찼다. 결을 이용한 그의 장법은 힘을 실지 않아도 위력적이었다.
열 명 정도의 무인을 단숨에 때려눕힌 갈지혁은 그대로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한 손에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깃대를 꼭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정도의 소란이 일었는데 아무런 일도 없을 리 없다. 이미 정문 쪽으로 구양세가의 많은 무인들이 달려 온 상태였다.
중년으로 보이는 사내가 자신의 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뭐 하는 놈이냐!”
갈지혁의 행색은 분명히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갈지혁이 이곳에 온 이유 또한 좋은 것이 아닌 건 사실이다.
“구양세가를 꺾으러 왔습니다.”
“제정신이냐?”
사내는 주변에 있는 자가 갈지혁 하나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갈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순히 미친놈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단순한 미친놈에게 당할 정도로 구양세가의 무인들은 약하지 않다.
하지만 단신이다. 단신으로 구양세가에 찾아와 도발을 하고 있다.
제정신이라면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그렇지만 상대가 미쳤던 아니던 상관없다. 지금 이자가 구양세가의 무인들을 건드렸고, 또한 그 이름에 도전을 했다.
도전을 해 왔다면 상대를 해 준다.
구양세가만이 아니라 무림 그 어떠한 문파라도 마찬가지리라.
“오냐, 덤벼봐라. 네놈이 누군지 모르겠다만 구양세가를 얕본 대가를 톡톡하게 치르게 해 주지.”
갈지혁은 독왕대로행이라고 써진 깃발을 펼치고는 앞에 있는 상대들을 바라봤다. 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지도 않았다. 이 정도로 패해서는 독왕이라는 길을 걸을 수도 없다.
갈지혁은 손을 늘어트렸다.
손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긴장을 풀었고,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상관없다. 갈지혁은 자신이 있다. 일악천에게 배운 무공은 천하의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해 주었다.
사독문에서 지내는 동안 수천 번이 넘게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것은 갈지혁의 무공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강하게 만들었다.
진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진다. 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승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독인이다. 독인에게는 독이 있으니까 무인과는 다르다.
독, 무인들은 모두 얕보지만 갈지혁에겐 전부다.
갈지혁을 노려보며 기회를 얕보던 사내가 달려들었다.
머리카락에 감추어진 갈지혁의 눈이 빛났다. 한눈에 봐도 상대의 보법이 범상치 않은 탓이다. 그것이 바로 화산의 신법인 구궁보(九宮步)다.
순식간에 갈지혁의 눈앞까지 도가 밀려들어왔다. 갈지혁의 발이 뒤로 반보 물러섰고, 도는 다시금 그의 그림자를 쫓았다.
성난 파도처럼 도가 밀어닥쳤지만 갈지혁은 어렵지 않게 피해 냈다. 신법은 괜찮지만 뒤를 받쳐주는 도법은 그저 그런 수준이다. 신법은 빠름과 변화를 추구하는데 맞추어 주는 도법은 단지 강맹하기만 하다.
위력적이지만 맞지 않는 두 개의 무공은 오히려 서로의 장점만 깎아먹었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면서 도를 피하던 갈지혁이 움직였다.
쒜엑!
갈지혁의 손이 정확하게 어깨를 움켜쥐었다. 도의 간격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의 사내는 급히 도를 버리며 쌍장을 휘둘렀다. 좋은 판단이었지만 갈지혁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퍽!
가볍게 움직인 손에 맞는 순간 중년의 사내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우웩!”
중년의 사내는 그대로 주저앉고야 말았다. 중년의 무인의 무너지는 모습에 주변에 있던 무인들이 소리쳤다.
“구양청(歐陽淸) 어르신!”
모두의 눈에 놀람과 당혹이라는 감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비록 구양청이 이곳 구양세가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접객당을 맞고 있는 무인이라 하나, 결코 이름조차 모르는 무인에게 패할 정도의 약자는 아니다. 상대의 모습이 괴이하고, 뭔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구양청이 패할 거라는 생각을 가졌던 이는 이중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무인들은 급히 구양청을 부축하면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운이 좋았는지 호흡은 끊어지지 않은 상태다. 아니, 애초부터 갈지혁이 살초를 펼치지 않았다고 해야 옳다.
구양청의 몸을 살피던 다소 젊어 보이는 사내가 부릅뜬 눈으로 갈지혁을 노려봤다. 생긴 게 꽤나 준수해 검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 해 보인다.
갈지혁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는 사내를 보며 직감적으로 이자가 살초를 펼칠 거라는 걸 느꼈다.
강하게 검을 쥔 손, 하지만 아직 손이 검과 익숙하지 않다. 막 검을 잡은 햇병아리다.
갈지혁은 젊은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함부로 검을 빼지 마라. 검을 뺀다는 건 목숨을 걸었다는 걸 의미하니까.”
“큭!”
젊은 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멈추어라!”
말과 함께 멀리서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무인이 이곳을 향해 날아들었다.
떡 벌어진 어깨, 흰머리는 단정히 쓸어 올렸고 눈은 매서울 정도로 날카롭다. 그자의 모습을 갈지혁이 슬쩍 바라보고 있는데 무인들이 함성을 질렀다.
“구양신개(歐陽申凱) 어르신이다!”
구양신개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갈지혁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철혈검노(鐵血劍怒)?’
갈지혁이 말한 대로 그는 철혈검노라고 불리는 구양세가의 인물이다. 구양세가 내부의 규율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다.
갈지혁이 구양신개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낸 것은 그가 단순히 싸움만 하고 돌아다니는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지혁은 이미 구양세가 내부에 있는 인물들에 대해 알아 놓은 상태다. 조금만 노력하니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쉽사리 알아낼 수 있었다.
“자네는 누군가? 그리고 이곳의 방문 목적은 무엇이지?”
점잖게 말하는 듯하지만 구양신개의 손은 이미 자신의 검에 닿아 있었다.
언제든 발검할 수 있는 위치다. 갈지혁이 조금만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당장에 벨 것이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방문한 자가 좋은 의사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할 리가 없다.
그때 구양신개의 눈에 뒤에 세워진 깃발이 들어왔다.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다섯 글자를 보는 순간 상대의 정체가 누군지 알아 버렸다.
세 달, 비록 모두가 우습게 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갈지혁에 대한 이야기는 섬서에 가득히 퍼진 상태다.
구양신개는 눈을 부라렸다.
“네놈이 요즘 섬서를 돌아다니며 비무행을 벌인다는 미친놈이냐?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저따위 깃발이나 들고 다니는 놈이라면 뻔하지.”
갈지혁은 말없이 구양신개를 계속해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