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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24화 (24/200)

# 24

24화

무림에 나온 이후 최고의 적이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경공부터 해서 몸에 풍기는 기도까지 하나하나가 그것을 증명했다. 갈지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 모습에서 싸우자는 의지를 느낀 탓인지 구양신개 또한 당연스럽다는 듯이 검을 뽑아 들었다.

“건방지게 날뛰기에 언젠가 한번 손 좀 봐주려 했다. 마침 이렇게 찾아오니 잘되었군.”

스슥!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검이 움직였다. 검의 검로를 따라 아름다운 매화가 만개했다. 화산의 유명한 검법인 매화검법(梅花劍法)이다.

화산의 검법은 아름다우면서 현란하다. 순간적인 아름다움에 젖어들 만하면 지옥과도 같은 검법이 눈앞에 닥친다. 한순간이라도 그 모습에 혹한다면 당장에 죽음으로 이어진다.

갈지혁의 몸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독황독립문에서 배웠던 경공인 독황군림계를 펼쳐야 할 정도로 매화검법은 위협적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검이 꿈틀거렸다.

갈지혁의 손도 덩달아 움직였다. 강력한 장법이 터져 나오면서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든 검이 뒤로 밀려났다. 묵직한 위력을 손으로 느낀 구양신개의 얼굴빛이 다소 변했다. 그렇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하늘로 향해 솟구치던 검이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꿨다.

‘칫!’

갈지혁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뒤로 몸을 빼며 입술을 깨물었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다.

옷의 앞섬이 스륵 하고 베이며 그대로 반으로 갈라졌다. 조금만 늦었다면 당장에 가슴에서 피가 터져 나왔을 게다. 갈지혁은 뒤로 물러난 상태로 잘린 옷을 보며 중얼거렸다.

“돈도 없는데…….”

그 말에 구양신개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없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갈지혁의 태도에 분개한 것이다.

“이, 이노옴!”

화가 난 구양신개가 그대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갈지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에서 조그만 검은 것이 날아들었다. 구양신개는 어렵지 않게 그 검은 것을 쳐냈다.

헌데.

“헙!”

공중에서 검을 내지르려던 구양신개의 몸이 급히 비틀렸다. 그는 몸을 비틀어 뒤로 내려서고는 뒷걸음질 쳤다. 그의 얼굴색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검기를 쏟아 내려고 내공을 집중하던 찰나에 이상한 것에 당해 버렸다. 갑작스럽게 기혈이 뒤틀리자 구양신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도, 독? 이런 제길…….’

알면서도 당했다. 왜일까? 왜 상대가 독을 쓰는 자라는 걸 알면서도 당한 것인가.

단순한 암기라고 생각했다. 요즘에 무림에서 볼 수 있는 독인이라는 자들의 대부분이 그런 자들이니 당연하다. 사천당문의 무인들과 싸울 일이 없으니 딱히 독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갈지혁이 독단을 던진 순간 또한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내공이 한 군데에 모이는 순간 던져진 단환의 독기가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 찰나를 잡은 것은 운이 아니라 갈지혁의 실력이다. 이렇게 독을 쓰는 자는 현 무림에 많지 않다.

구양신개는 급히 운기를 한 덕분에 서서히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극독을 쓰지 않은 탓에 구양신개는 목숨을 건졌다. 만약 갈지혁이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 그는 게거품을 물고 숨을 거두었을 게다.

그걸 아는 구양신개이기에 그의 표정은 침울할 수밖에 없다. 주변에 있는 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갈지혁의 일수에 갑자기 안색이 변했던 구양신개가 멀쩡한 상태로 돌아온 탓이다. 하지만 함성을 들으면서도 그의 표정은 편하지 않았다.

이건 동정을 받아서 산 거나 다름없다.

“뭘…… 원하느냐.”

구양신개는 패배를 인정했다. 어차피 졌을 싸움이다. 더 싸워 봤자 구차할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원래는 이렇게 질 싸움이 아니었다. 비록 갈지혁이 강하다 하지만 구양신개는 화산파에서 정식으로 무공을 익힌 자다. 이길 순 있었어도 이같이 쉽게 당할 상대는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양신개가 손 몇 번 휘두르고 패한 것은 독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갈지혁이 원하는 것은 하나다. 명성이다. 우선은 갈지혁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높이는 것을 원한다. 화산파가 움직여 준다면 오히려 좋다. 화산파와 같은 구파 일방과 싸우고 싶다. 그들을 적당히 건드려 준다면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다.

갈지혁이 말했다.

“구양세가의 가주와 싸우고 싶습니다.”

“거, 건방진!”

구양신개는 푸들푸들 떨었다. 그의 멋들어지게 자란 수염까지 덩달아 흔들렸다.

구양세가의 현 가주는 화산파와 종남파를 제하면 이 근방에 적수가 몇 없을 정도의 고수다. 그리고 이 근방에서 최고라는 칭호를 받는 구양세가의 가주라는 위명도 있다.

이런 이름도 없는 시정잡배와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가주가 너 같은 놈과 싸울 이유가 없잖느냐! 지금까지의 행동은 용서할 테니 썩 물러가거라!”

구양신개는 애써 화를 삭이며 소리쳤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구양신개가 외쳤다.

“이자를 포박하라!”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구양세가의 무인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미 그건 갈지혁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려드는 구양세가의 무인들을 힐끔 본 후 갈지혁을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양손에서 녹색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구양신개가 급히 외쳤다.

“호흡을 하지 마라! 몸에 있는 모든 구멍을 막아!”

급히 구양신개의 명대로 독기를 막아 내기 위해 그들은 숨을 멈췄지만 갈지혁의 독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내공이 부족한 자들은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고, 그나마 실력이 빼어난 자들도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십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독에 중독되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구양신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 여태까지 구양세가는 단 한 번도 다른 세력에게 이처럼 당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겨우 단 한 놈에게 구양세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겨우 독이나 쓰는 놈 하나에게!

“네, 네 이놈…….”

말을 하는 구양신개의 표정 또한 좋지 않다. 그 또한 이제 이 독을 버텨 낼 재간이 없다. 주변에 있는 무인 중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이 다섯도 되지 않는다. 구양세가가 지금 한 놈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갈지혁은 구양신개에게 천천히 다가와서 마주섰다.

당장에 손을 휘둘러 갈지혁의 머리통을 부수고 싶었지만 구양신개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움직인다 한들 지금 상태로 갈지혁의 상대가 될 턱이 없다.

갈지혁이 구양신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된다면 내 발로 만나러 가는 수밖에.”

으드득!

구양신개는 이빨을 갈았다. 몸을 돌려 걷는 갈지혁의 등을 보면서도 공격을 펼쳐낼 수 없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서다.

‘구양세가가 겨우 저따위 잡배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대낮에 들이닥친 괴인(怪人) 하나 막지 못했다. 무림에 알려진다면 결코 웃으면서 넘어갈 수준이 아닌 것이다. 무림의 수많은 자들이 비웃을 테고, 구양세가를 우습게 볼 게다. 어떻게든 가주가 손을 써서 무너트린다고 해도 이건 수치거리다.

그리고 만약 가주 또한 진다고 하면…….

‘서,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고, 벌어져서도 안 될 일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저런 자에게 무너진다는 건, 구양세가에게 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무공을 전수해 준 화산파에게도 큰 수치가 된다.

‘가주!’

구양신개는 속으로 가주를 불렀다.

절대 져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갈지혁은 그렇게 계속해서 걸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건물의 배치도로 보아 대충 가주의 거처가 어딘지는 예상이 간다. 중원은 이래저래 형식을 따른다.

그 탓에 중요한 건물들의 위치도 비슷비슷하다.

갈지혁은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계속해서 구양세가를 걸었다. 달려드는 무인은 가볍게 손이나 독으로 제압하며 그는 가주의 거처를 쫓았다. 어느새 그의 뒤를 쫓는 무리까지 생겼다.

그들은 갈지혁의 무위가 범상치 않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구양세가의 인물들이다. 갈지혁은 그들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걷기만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저런 자들이 아니라 구양세가의 가주다. 저 정도의 무인들이라면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모두 제압할 수 있다.

검이라면 불가능하지만…… 독이라면 가능하다.

갈지혁은 전방에 무인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문을 응시했다. 붉은색 담을 보는 순간 저곳이라고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구양세가에 들어오기 전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구양세가 가주의 거처는 붉은색 돌로 만들어져 있다. 현 가주가 붉은색을 너무 좋아해 거처도 그리 만들었다는 것이다.

‘쉽게 찾았군.’

붉은색이라는 특색 덕분에 갈지혁은 어렵지 않게 가주의 거처를 찾아냈다.

그의 눈이 가주의 거처를 지키고 있는 무인들에게로 향했다. 이미 정문 쪽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들었는지 그들은 무기를 꺼내 들고 살기를 풀풀 풍겼다.

갈지혁은 크게 숨을 쉬었다. 그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풍려산(風驢酸)…….”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을 가로막고 있던 무인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무려 오 장이다. 그 먼 거리를 단지 손을 뻗는 것으로 제압했다.

풍려산이라는 것은 마비독이다. 풍려산을 들이마시게 되면 온몸의 힘이 풀린다. 다리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머리는 띵하고 울린다. 중독당하면 두 시진 정도는 꼼짝도 하지 못한다.

갈지혁의 뒤를 쫓으며 살기를 띠우던 구양세가의 무인들은 그 모습을 똑똑히 바라봤다. 막 독기를 제압하고 달려온 구양신개의 놀람은 더했다.

비수를 날린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력을 쏟아 내 공격을 가한 것도 아니다. 단순히 손을 들어 올렸을 뿐인데 구양세가의 단련 된 무인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구양신개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것이…… 독이란 말인가.’

단 한 번도 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현 무림의 정세가 그렇다. 독을 쓰는 자는 배척당하고 정도를 넘어서면 위험인물로 간주해서 제압하거나 죽이려 든다.

그 탓에 백여 년 전부터 독에 관련된 문파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현재에 와서는 사천당문만이 간신히 그 명목을 유지하고 있다.

구양신개는 왜 무림맹이 독을 쓰는 자들을 탄압했는지 알아 버렸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가.

단순히 손을 흔듦으로써 단련된 무인들이 모두 나뒹굴었다. 독인이 되는 길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길인지 모르는 구양신개로서는 갈지혁의 무위가 단순히 독을 통한 요행으로 보였다.

풍려산 덕분에 갈지혁은 가주의 거처에 무혈입성(無血入城)했다. 두리번거리던 갈지혁은 사람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그쪽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연못을 지나 갈지혁은 멈추어 섰다. 한 사내가 등을 보인 채로 난을 바라보고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덩치에,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희끗희끗한 흰머리는 그의 연륜을 느끼게끔 한다.

그는 뒤에 갈지혁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마치 갈지혁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갈지혁이 예상하는 인물이 맞다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구양세가의 가주 구양진(歐陽陳)!

갈지혁도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뒤에 선 채로 갈지혁은 상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시간이 흘렀다.

일각, 이각, 그리고 한 시진…….

둘 모두 말이 없다. 그 둘을 바라보는 구양세가의 무인들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왠지 모를 이 정적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느낌이다.

난을 바라보던 자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갈지혁이라고 합니다.”

“갈지혁?”

등을 돌린 사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갈지혁의 이름을 불러봤다. 이 정도의 실력자라면 소문도 날만 하거늘 갈지혁이라는 이름이 너무 생소했던 것이다.

이번엔 갈지혁이 물었다.

“기도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묻지요. 구양세가의 가주인 구양진 어르신이 맞습니까?”

“그래. 내가 바로 구양세가의 가주인 구양진이네.”

갈지혁은 힐끔 뒤를 바라봤다. 구양세가의 무인들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다. 아마 당장 무기를 뽑아 들고 싶지만 참는 모양이다. 가주가 앞에 있는 탓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 무기를 꺼내 들고 달려드는 건 가주에 대한 모욕이다.

구양진이 난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찾아온 목적이 있을 텐데…….”

“당신과 싸우러 왔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갈지혁이 대답했고 순간 구양신개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이, 이 무례한 놈! 네놈을…….”

“신개! 물러나라.”

구양신개는 가주의 외침에 찔끔하며 입을 닫았다. 구양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갈지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한 문파를 이끄는 종사(宗師)의 기백으로 가득했다.

부드러운 외모, 하지만 안광을 잘 갈무리되어 있으면서도 날카롭다. 약한 자는 분명 아니다.

그가 갈지혁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머리카락으로 가리고는 있지만 젊어 보이는군. 서른도 되지 않는 듯한데 내 말이 맞는가?”

“맞습니다.”

갈지혁의 대답에 뒤에 있는 무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스물이 갓 넘은 무인에게 구양세가가 이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됐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것이 무림에 알려지게 된다면 그 후의 일은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자네에 대해서는 조금 들었네. 독왕대로행이라는 깃발을 들고 섬서를 횡단하고 있다고 하더군.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독왕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다인가?”

“그게 다가 아니라, 그게 저의 전부입니다.”

그 말에 구양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갈지혁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지만 눈동자가 똑똑히 보인다.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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