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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25화 (2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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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구양진은 시종을 불렀고 그는 붉은색 검집에 씌어져 있는 검을 들고 나타났다. 구양진이 그 검을 들어 올리자 시종은 급히 자리를 떴다.

“가주!”

구양신개의 외침에 구양진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금 구양신개는 가주와 갈지혁이 싸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만약 구양진이 저런 어린 자에게 패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몇 년은 무림에서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버린다.

어차피 정당하게 찾아온 자도 아니다. 합공을 하여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구양신개는 가주의 눈을 보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마음을 알아 버렸다. 구양신개는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저 갈지혁이라는 자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에 대한 그의 책임은 크다.

지금 가주는 모든 책임을 떠맡으려는 것이다. 아마 이 싸움에서 패한다면 가주는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해도 구양세가가 서른조차 되지 않은 무인 하나에게 무너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구양진이 책임을 지고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적어도 무림은 구양세가를 비웃지 못한다. 자진해서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난 구양진 때문에라도 겉으로 그런 감정을 내보일 수는 없다.

슬슬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 날 때가 된 듯하이.

구양진은 최근 들어 구양신개에게 이런 말을 자주 내뱉곤 했다. 그리고 구양진은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구양신개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며 구양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애초에 하고자 했던 것과는 정 반대되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지 마십시오, 가주!”

구양진은 슬쩍 웃으며 검을 뽑아냈다. 붉은색의 검신이 기이한 빛을 토해 냈다. 피 같은 붉은색이지만 요사스럽지 않고 오히려 맑아 보인다.

구양신개의 생각대로 구양진은 지금 패하게 된다면 구양세가를 위해 가주의 직위에서 물러날 생각이다. 이미 자식들도 대성하여 세가의 뒤를 잇는 것도 무리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질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비록 상대가 독을 쓴다고 하지만 자신이 아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화산파에 입문하여 정식으로 무공을 사사 받은 구양진이다. 그의 실력은 섬서에서 알아주지 않는가.

검을 든 구양진의 눈이 빛났다.

“가지.”

슉!

‘속전속결(速戰速決)!’

독을 사용하면 귀찮을 거라는 생각에 구양진이 먼저 움직였다.

구양진은 화산파에서 무공을 익힐 당시에도 상당한 재능을 뽐냈다. 그런 그의 손에서 익숙한 검법이 터져 나왔다. 백팔식광풍쾌검(百八式狂風快劍)이라는 검법이다.

빠른 공격을 위해서 펼친 검법으로 화산파에서도 유명한 쾌검이다.

번쩍 하고 빛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무너트릴 만한 패도적인 기세가 검에서 터져 나왔다.

흰색에 감싸인 검이 미친 듯이 춤을 췄다.

갈지혁의 눈동자가 급히 검의 뒤를 쫓았다. 화산파가 자랑하는 쾌검에 걸맞게 그 속도와 위력은 대단했다. 갈지혁은 독황군림계를 펼치며 뒤로 몸을 뺐다. 그의 손에서 독분이 퍼져 나갔다.

초록색 독분이 뻗어 나가는 순간 구양진의 검에서 무서울 정도의 바람이 일어났다.

검풍(劍風)이다. 갈지혁의 독분을 알아차리는 순간 구양진은 검풍을 뻗어 낸 것이다. 그리고 검풍을 터트리기가 무섭게 갈지혁의 뒤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독가루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바람이다.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면 그 독은 오히려 자신을 향해 날아온다.

갈지혁은 몸을 솟구치며 구양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갈지혁 또한 일악천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단순히 독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무공도 익혔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독을 더 절묘하게 쓰는 과정을 만들기 위해서일 뿐이지만.

파팡!

갈지혁의 쌍장이 연속으로 움직였다. 구양진은 손을 교차하면서 그 장력을 막아 냈지만 허공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야 말았다.

쿵!

발로 땅을 디뎠지만 구양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내공은…….’

독을 쓰는 자라고 해서 그것만 주의하면 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내가기공의 위력도 심상치 않다. 가볍게 휘두른 장법을 간신히 막아 냈다. 결을 이용했기에 그 파괴력이 배 이상으로 뛴 것을 모르는 구양진으로서는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의 내공이라면 구양진을 웃돌 정도다.

‘독을 쓰는 놈이 무공도 이 같은 경지라니!’

가뜩이나 독을 쓰는 자라 상대하기 껄끄러운 이 마당에 무공까지 이 정도라면 이길 수 없다. 막 머리를 굴리는 구양진에게 갈지혁이 달려들었다.

어느새 거리를 줄이면서 다가선 갈지혁의 손가락에서 지법이 터져 나왔다. 나선형을 그리며 날아드는 지력을 구양진은 검을 휘두르면서 막아 냈다. 손에 묵직한 충격이 일었지만 구양진은 버텨 내면서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흐아압!”

쒜엑!

검이 그대로 앞으로 뻗어져 나갔고 앞으로 달려들던 갈지혁은 몸을 비틀었다. 구양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급히 검을 회수했다. 검에 미묘한 느낌이 일지만 치명타는 아니다. 이 상태에서 거리를 좁히게 된다면 필패(必敗)다.

오히려 기세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거늘 구양진은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상대인 갈지혁이 독인인 탓이다. 예상대로 갈지혁의 몸이 꿈틀했다. 구양진은 그래도 막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신법을 펼친다면 뒤로 물러설 수 있다. 그 후에 바로…….

그때 의외의 변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가 기습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채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구양진은 그대로 몸을 뒤로 잡아당겼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옷이 찢겨 나갔다. 뒷걸음질을 치던 구양진이 간신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상치 못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갈지혁의 소매 속에서 뱀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뱀의 입에 물려 있던 구양진의 찢겨진 옷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구양진은 절로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녹색 뱀이 혀를 꺼낸 채로 마구 흔들어댔다.

갈지혁은 사황의 머리를 슬쩍 눌렀다. 그러자 소매 속으로 사황은 다시 몸을 감추었다. 구양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뱀은…….”

“제 유일한 벗입니다.”

“동물까지 이용하다니…….”

구양진은 지금 눈앞에 있는 갈지혁이라는 사내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다. 독인이다. 그러면서 무인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맹독을 지니고 있는 동물까지 수족처럼 부린다.

이 같은 자가 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여태까지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비록 상대가 나이에 비해 빼어났다 뿐이지 질 리는 없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정말로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갈지혁이라는 상대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구양진은 자신의 소매를 바라봤다. 완벽하게 녹아내렸다. 이 정도의 독이라면 물리는 즉시 죽는다.

그는 자신의 붉은 검을 치켜들었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은 싸워야 할 때다. 저 뱀에 눈이 혹해 가장 중요한 갈지혁을 등한시할 수는 없다. 결국 결론은 갈지혁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이다.

구양진은 몸을 날려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상대에게 독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줘서는 안 된다. 가뜩이나 무공 실력 또한 우습지 않은 상대다. 독까지 사용하게 해서는 절대 이기지 못한다.

화산의 신법을 이용해 갈지혁의 안으로 파고든 그는 연신 검을 휘둘렀다. 갈지혁은 용케 피해 내고는 있었지만 그 또한 선뜻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화산의 검법은 빨랐고, 빈틈이 없었다.

마구 휘몰아치던 구양진은 갑작스러운 미묘한 움직임에 급히 뒤로 몸을 뺐다. 다시금 사황이 이빨을 들이민 탓이다. 뒤로 물러서던 구양진의 안색이 돌변했다.

‘아차!’

사황의 이빨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섰지만 그로 인해 갈지혁에겐 절호의 기회를 주어 버린 것이다. 구양진은 급히 용천혈에 내공을 집중하며 튀어 올랐다. 지금은 재빨리 피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그리고 피한다 한들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예상대로 갈지혁의 두 손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퍽!

공중으로 몸을 날렸지만 너무 늦었다. 단전 부분을 정확하게 가격 당한 구양진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간신히 땅에 선 그의 얼굴이 노랗게 변하더니 급기야는 호흡조차 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급히 내공으로 감싸 안아 단전이 파괴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기혈이뒤틀렸다. 이 상태로는 몸에 침입한 독기를 밀어낼 수 있을 턱이 없다.

단 일장에 구양진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버렸다. 갈지혁의 일장에 구양세가의 가주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구양신개는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가주!”

그의 몸이 날듯이 구양진에게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구양진의 상태는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욱 심각했다. 얼굴까지 점점 검어지는 것이 독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다.

갈지혁을 단순히 독을 쓰는 자라고 생각하는 구양신개로서는 지금의 상황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절묘한 기회였고 피해 내기 까다로울 거라고 알고는 있었다. 갈지혁의 손이 구양진의 단전에 닿을 때까지만 해도 버텨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독장은 파괴력이 약하다. 그리고 구양진은 내공이 심후하다. 다소 물러서는 것이 고작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그리고 방금 전 갈지혁의 공격에 구양진이 밀려났던 것도 떠올랐다.

‘말도 안 돼! 저런 새파란 놈의 공력이 가주를 웃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구양신개의 상념이 품 안에서 꿈틀거리는 구양진에 의해 깨졌다. 구양신개의 눈이 다시금 구양진을 살폈다. 눈을 감은 채로 의연하게 버티고 있지만 얼굴은 땀으로 가득하다. 이대로는 결코 일각을 넘지 못한다.

구양신개가 고개를 돌려 갈지혁을 바라봤다. 지금의 구양신개는 이 독을 제압할 수가 없다.

그 말은 곧 이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건 갈지혁뿐이라는 소리다. 멀리서 다른 누군가를 데려올 시간도 없기에 구양신개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부탁하네. 가주님의 독을 해독해 주게.”

“해독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구양신개가 대답할 것이 아니지만 이미 가주의 마음도 알고 있다. 여기서 추한 모습을 보인다면 설령 구양진이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해도 정파 무인들의 손가락직을 받을 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주의 목숨도 끝나 버린다.

이빨을 으드득 갈며 구양신개가 말했다.

“구양세가는…… 자네에게 졌네.”

어렵사리 내뱉은 말, 주변에 있던 구양세가의 무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비록 가주가 패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인원이라면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인 모양이다.

오산이다.

차라리 강한 무인이라면 검이라도 들이 대 볼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독인이다. 단 일수에 이 주변의 생명을 모두 앗아갈 수도 있다는 소리다. 실로 두려운 능력이다. 이런 일 때문에 정파 무림은 독을 쓰는 자를 배척했을 게다.

구양신개는 웅성거리는 소란을 들으면서도 눈을 감고 있었다. 도저히 두 눈으로 지금 상황을 볼 수가 없다.

갈지혁은 말없이 조그만 통을 던졌다. 구양신개가 그 통을 들어 올리고서야 갈지혁은 말문을 열었다.

“지금 당장 통 안의 해독약 반을 투여하고, 이각 후 나머지를 드시게 하십시오.”

말을 마친 갈지혁은 몸을 돌렸다. 그때 구양진을 안고 있는 구양신개가 이를 갈며 말했다.

“갈지혁이라 했겠다? 오늘의 수모…… 잊지 않겠다. 우리가 가만히 있는다 해도 무림은 널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바라던 바입니다.”

갈지혁은 고개만 슬쩍 돌리고 말했다. 입꼬리 끝이 올라간 것이 슬쩍 웃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머리카락 대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 구양신개는 정확한 표정을 알 수 없었다.

구양신개를 뒤로하고 갈지혁은 걸었다. 그가 움직이는 방향에 있던 무인들은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만들었다.

갈지혁의 무시할 수 없는 무위를 본 탓에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구양세가라는 자존심 때문인지 그들은 여전히 살기 가득한 눈으로 갈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회만 온다면…….

모두가 눈을 번뜩이고 있을 때 구양신개가 외쳤다.

“모두 물러서라! 가주님의 행동을 욕보이는 자는 나 구양신개가 용서치 않겠다!”

규율을 담당하는 구양신개의 외침에 무인들은 검을 내렸다. 그리고 그 덕분에 갈지혁은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으며 구양세가를 벗어났다.

갈지혁은 구양세가의 문을 나선 후 힐끔 뒤를 바라봤다.

사황 덕분에 쉽게 가주를 제압하긴 했지만 실로 화산의 검법은 매서웠다. 공격할 기회라고 생각하며 움직이면 재차 검이 날아든다. 그 때문에 공격을 하려다 몇 번이나 손을 거두었다.

비록 강하다 한들 화산의 속가제자인 구양진이다. 진정한 화산의 고수라면 구양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할 게다.

그리고 이제 갈지혁은 그런 자들과 싸워야 한다.

애초에 구양세가를 건드릴 때부터 화산파와의 싸움을 생각하고 있던 터다. 아마 화산파는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갈지혁이 원하던 것이기도 했다.

‘애초부터 원했던 바.’

갈지혁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독공을 익히느라 거무스름한 색이다. 보기 흉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겠지만 갈지혁에겐 자랑스러운 손이다.

화산파의 검, 갈지혁의 두 손. 누가 강한지 겨루어 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두 개 중 하나가 꺾여야 한다면…… 화산의 검을 꺾으리라.

갈지혁은 품속에서 빠져 나오려는 사황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걷기 시작했다.

구양세가가 한 사내에게 무너졌다.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무림은 그런 고수의 등장을 환영하기보다는 오히려 긴장해야만 했다.

구양세가를 단신으로 무너트린 사내가 독을 쓰는 자인 탓이다. 무림의 눈은 당연스럽게 섬서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구양세가라면 섬서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그리고 그들은 화산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무림의 눈은 서서히 화산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화산파는 움직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수상한 사내와, 그 사내의 소매 속에 살고 있다는 뱀. 그 둘의 이야기는 섬서에서부터 천천히 무림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기묘한 동행을 하고 있는 그 둘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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