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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26화 (2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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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 2권

1화

겨울이 갔다.

지독한 추위가 천천히 사라지며 날씨도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가 좋은지 갈지혁의 발치에서 사황이 연신 몸을 움직였다.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있던 갈지혁은 사황이 계속 발을 툭툭 건드리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황이 커다랗게 눈을 뜬 채로 갈지혁을 올려다봤다. 갈지혁은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피식 웃으며 손가락 하나로 사황의 머리를 밀었다. 그런 갈지혁의 행동에 사황은 이빨을 들이밀었지만 살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녀석. 장난이라도 치자는 거냐?”

추르릅.

사황은 혀를 움직이며 갈지혁의 주변을 계속해서 돌았다.

갈지혁은 재미있다는 듯 사황을 바라봤다. 장난기가 무척 많은 놈이다. 사황 덕분에 갈지혁은 홀로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았다.

지금 갈지혁이 머무는 곳은 그다지 깊지 않은 동굴이다.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 추위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 때문에 약 한 달 전부터 이곳으로 자취를 정했다.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입구로 향했다. 사황은 급히 움직이는 갈지혁의 다리에 매달려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선 갈지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조금 늦게 일어났나.”

새벽 늦게까지 움직이다 보니 나름대로 피곤했던 모양이다. 긴 머리를 손으로 대충 훑은 후 갈지혁은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지 않아 갈지혁은 멈추어 서야 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멀리 나무 사이를 바라봤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비록 이곳이 빼어난 산은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의 방문이 없는 곳은 아니다. 실제로 갈지혁은 이 산에서 머물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조금 다르다.

‘무인?’

갈지혁은 자신의 모습이 최대한 보이지 않게 동굴 벽에 기대며 기척이 느껴진 곳을 응시했다. 걸음걸이가 일정하고 쇳소리도 들린다. 이 소리는 농기구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무인들이 들고 다니는 검이 내는 소리다.

나무 사이를 응시하던 갈지혁의 눈에 한 사내가 잡혔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갈지혁은 사내의 전신을 훑었다. 나이는 이십 대 정도로 보이고 검을 차고 있다. 걷는 보보(步步)를 보아하니 명문정파에서 훈련을 받은 듯하다. 그리고 갈지혁이 가장 주의 깊게 본 것은 소매에 그려져 있는 매화(梅花)였다.

중원에서 소매에 저토록 매화를 수놓는 문파는 하나밖에 없다.

화산파(華山派)다. 그들의 상징이 바로 매화다.

갈지혁은 눈을 빛냈다. 화산파가 이 같은 곳에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갈지혁 때문이리라.

갈지혁은 구양세가를 꺾었고, 화산파는 그런 구양세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비록 그들이 속가의 제자라 하지만 화산파의 문도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런 구양세가가 단 한 사내에게 무너졌다. 이는 화산파로서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화산파가 나설지도 모른다 생각했거늘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용케도 알아차렸군.’

구양세가의 일이 있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그 이후 갈지혁의 거처를 알아낸 모양이다. 갈지혁은 화산파의 정보망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이 정도는 화산파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팔파일방도 마찬가지리라.

그리고 갈지혁은 그들에게서 독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내야 한다.

갈지혁은 몸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동굴 앞에 서서 당당히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는 화산파의 무인 수를 확인했다. 그 수는 고작 일곱에 불과했다.

갈지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날 얕본 모양이군.’

어찌 보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인에게 화산파 정예 고수 일곱은 과하다고 할지 모르나 갈지혁의 생각은 달랐다.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갈지혁을 화산파의 무인들이 보지 못했을 리 없다. 서로 가벼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갈지혁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갈지혁과 이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도달하자 중년으로 보이는 무인이 나섰다.

“자네가 갈지혁인가?”

“그렇습니다만?”

“예상보다 쉽게 찾았군. 자네가 숨으면 찾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

“제가 숨을 이유가 있습니까?”

“흠!”

화산파의 무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갈지혁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다. 화산파가 찾아온 이유를 알 텐데 이런 반응을 보일지는 몰랐다. 당황하는 그를 보며 뒤에 있는 젊은 화산파의 무인이 킥킥거렸다.

처음 갈지혁이 발견한 사내다. 얼굴이 준수하고 흰 편이라서 무인이라기보다는 서생이라고 보면 딱 어울리는 자였다. 그런 그를 중년의 무인은 무섭게 노려봤다. 하지만 사내는 웃음만 거두었을 뿐 여전히 장난기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중년의 무인은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긴장감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놈…….’

비록 저렇게 가벼워 보이지만 사내가 화산파에서 지니고 있는 비중은 적지 않다. 화산파 역사상 최연소 매화검수(梅花劍手)이며 최대의 기재가 바로 그다.

하지만 나이를 들어가면서 오히려 행동이 가벼워져 급기야는 문주가 이런 경험이라도 시켜 보자며 이곳까지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장난스럽기만 하다.

차기 화산파를 이끌 재목이라고도 보지만…… 중년 사내의 눈에는 철없는 애송이로 보일 뿐이다. 절대 이런 자에게 화산파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사내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한때는 화산파의 희망이었던 사내.

하지만 지금은 무공 훈련도 게을리하고, 하는 짓도 가관이다. 그럼에도 그는 화산파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장문인이 그를 감싸 안는 탓이다.

낙화검(落花劍) 진검백(眞劍白)!

낙화가 의미하는 건 꽃이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암암리에 그리 불리는 낙화검이라는 별호는 그의 검이 꺾였다는 것을 말한다.

왜 그가 그리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 불과 삼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검의 길을 미친 듯이 걷는 검광(劍狂)이었다. 처음 진검백이 변했을 때는 모두가 걱정했지만 이제는 그런 자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그런 진검백을 바라보는 중년의 무인은 유삼문이라는 자다. 무림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화산파 내에서는 매화검법을 가장 아름답게 펼치는 몇 명 중 하나로 꼽힌다.

유삼문은 진검백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는 갈지혁과 이야기를 하러 온 입장이다. 그가 보는 갈지혁은 위험인물이다.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어 표정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고집이 있어 보인다. 이런 자는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유삼문이 말했다.

“난 화산의 유삼문이라고 하네. 이렇게 자네를 찾아 온 것은…… 구양세가의 일 때문이네.”

갈지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유삼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구양세가는 우리 화산과 아주 긴밀한 관계네. 더군다나 자네는 독을 쓴다고 하더군. 그래서 찾아왔네.”

“결국은 독이 문제라는 소리군요. 내가 검이나 주먹만으로 구양세가를 무너트렸다면 당신은 이렇게 찾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틀렸습니까?”

그 말에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유삼문이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무림은 독을 원하지 않아.”

갈지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것이 어떠한 감정의 표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독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너무나 우습다. 갈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독인. 검객이 검을 쓰듯 독인은 독을 쓴다. ……문제 있습니까? 당신들이 잡은 것이 검이고, 내가 잡은 게 독이라는 차이뿐입니다.”

“독은 사술이야. 어린 아이도 독을 잘 쓰면 무인을 죽이지. 무인이 몇십 년 검을 갈고 닦아도 그런 독에 당해서 죽을 수도 있어. 독을 쓰는 자들은 쉽게 강해져서 무림을 어지럽게 하지. 그걸 막기 위해서야. 자네도 계속해서 독을 사용한다면 무림이 용서치 않을 게야. 오늘 내가 온 것은 경고를 위해서네.”

나름대로 살기를 담아서 한 말이지만 갈지혁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은 상태다. 유삼문의 말 중에서 그의 심기를 건드린 말이 있다.

“쉽게라……. 웃기는군. 뭘 안다고 쉽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군.”

갈지혁이 고개를 수그림과 동시에 온몸에서 살기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유삼문은 호흡을 거뒀다. 갈지혁의 몸에서 저절로 독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호흡만 잘못해도 독에 중독된다.

장난기 있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진검백의 표정이 변했다. 만약 유삼문이 지금 그의 표정을 보았다면 삼 년 전의 그를 다시 볼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몸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제길! 이런 놈이 무림에…….’

독을 쓴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정도라면 조금만 움직여도 무인들이 죽어 나자빠질 게다.

‘안 돼! 이놈은 위험해. 절대 놔둬선 안 될 놈이야!’

그런 유삼문의 속과 달리 갈지혁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검게 변해 버린 손. 죽을 것만 같았던 시절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갈지혁은 자신할 수 있다. 그 시간들이 결코 검을 익히는 무인들의 백 년에 못지않았음을. 하루하루가 죽음과의 싸움이었다. 죽고 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오로지 근성으로 버텼고, 그래서 지금 이곳에 있다.

“독인이 되기 위해서는 만 가지 독을 먹어야 한다. 독인이 되기 위해서는 내 운명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도…… 쉬워 보입니까?”

그 말에 꿈틀한 것은 유삼문이 아니라 진검백이었다. 그의 표정이 슬쩍 굳어지면서 갈지혁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갈지혁의 그 말에 의해서.

죽었던 무인의 감각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유삼문은 갈지혁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자신을 훨씬 웃도는 것을 알아차렸다. 믿을 수 없지만 이런 어린 자에게 기 싸움에서 밀려 버린 것이다. 이 상태라도 싸우려고 든다면 싸울 순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이런 곳에서 화산파의 정예 고수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문제다. 차라리 지금은 피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유삼문이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경고했네. 자네가 계속해서 이 같이 독으로 무림을 어지럽게 한다면…… 우리 화산의 검이 자네를 용서치 않을 것이네.”

“용서?”

갈지혁은 기도 안 찬다는 듯이 반문했다. 하지만 유삼문으로서는 더 이상 갈지혁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 화산의 입장을 전했고, 그 후는 갈지혁의 몫이다. 유삼문은 더 이상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곳에서 싸워 봤자 이기든 지든 손해를 보는 것은 화산파다.

화산파 무인 모두가 몸을 돌렸지만 오직 진검백만은 달랐다. 그는 계속해서 갈지혁을 노려봤다. 그러자 먼저 내려가던 유삼문이 소리쳤다.

“어서 오너라!”

“……그러지요.”

진검백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장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갈지혁은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마음이 읽히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다. 깊게 수련을 했다는 증거다. 적어도 상대의 눈을 보면 그가 독기를 품었는지, 아니면 피하려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내는 아니었다.

화산파에서 꽤나 명망 받는 후기지수 중 하나일 게다. 갈지혁은 조용히 소매를 들어 올리며 몸을 돌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걷던 진검백이 막 고개를 돌린 건 갈지혁이 동굴 안으로 몸을 감춘 바로 그 직후다. 그의 얼굴에서 다시금 장난기가 걷혔다. 진검백의 눈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의 눈이 좇는 곳은 갈지혁이 사라진 바로 그 동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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