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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27화 (27/200)

# 27

2화

스륵.

풀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아니, 사람의 은밀한 움직임이다. 마치 바람과도 같은 걸음걸이에 풀잎이 흔들린 모양이다.

그 은밀한 움직임의 주인공은 갈지혁이었다. 그는 오늘도 근처를 돌다가 밤 늦게야 거처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슬슬 날씨가 따뜻해진다고 하지만 밤의 공기는 아직도 쌀쌀하다. 갈지혁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갈지혁은 손에 든 토끼의 무게를 느끼며 오랜만에 즐거웠다. 최근 들어 이만한 식사조차 한 적이 없는 탓이다. 운이 좋았는지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토끼를 잡았다.

나무는 동굴 안에 준비되어 있었기에 갈지혁은 부담 없이 동굴 쪽으로 움직였다.

갈지혁이 동굴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의 눈초리가 사납게 변했고, 들고 있던 토끼도 옆으로 슬쩍 집어던졌다. 안에 누군가가 있다. 갈지혁은 잠시 동굴 안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나와라.”

차가운 목소리는 동굴 안을 울렸고, 이내 안에서는 나른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끼를 잡아 온 모양인데 같이 먹지그래?”

“나오지 않으면 죽는다.”

갈지혁의 말을 듣는 순간 안에 앉아 있던 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남자고, 꽤나 젊은 듯하다.

정체불명의 사내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고, 이내 달빛에 그 얼굴을 드러냈다.

꽤나 고운 얼굴이다. 얼굴 가득히 미소가 걸려 있다. 그 사내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갈지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넌 화산파의…….”

“그래. 화산파의 진검백이라고 하지.”

“무슨 일이냐.”

“거참, 딱딱하기 그지없군그래. 조용히 토끼나 먹으면서…….”

“분명 이야기했을 텐데 죽여 버린다고.”

그 말에 진검백이 피식 웃었다. 갈지혁이 우스워서도, 자신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도 아니다. 설령 목에 칼이 들어왔다고 해도 웃을 수 있는…….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나왔지. 네가 독을 뿌렸다면 동굴 안에선 나라도 버티지 못했을 테니.”

그 말에 갈지혁의 감춰진 눈이 꿈틀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짧은 순간에 그것을 알아차린 이자의 속셈이 궁금했고, 두 번째로는 지금은 막을 수 있다는 듯한 자신감 때문이다. 갈지혁은 손을 쓰려다가 참으며 물었다.

“용건은? 아까 전에 이야기가 대충 끝난 걸로 아는데?”

“화산파의 것과는 별개지. 난 개인적인 궁금증으로 너를 찾아왔으니까.”

“개인적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난 독인이기에 독을 계속해서 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물론 화산파와 싸우게 되겠지. 그러니 화산파라고 해서 내가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당장 이곳에서 사라져라.”

갈지혁은 손을 들어 올렸다. 진검백은 웃고 있었지만 손은 언제든 검에 가까이 닿아 있다. 다른 무인들도 그렇겠지만 갈지혁은 더 위험하다. 독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부담감을 준다. 자그마한 움직임 하나에도 독을 쓸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는 진검백은 너무나 태연하다.

“그렇게 안 노려보지 말라고. 나 또한 화산의 문제아니까. 낙화검 진검백이라고 불리지. 하핫!”

말을 하면서 진검백은 신난다는 듯이 웃었다. 갈지혁은 낙화검 진검백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가 중원에 나타난 지 오래 되지 않아서다.

하지만 한 가지 아는 건 낙화검이라는 별호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그건 굴욕적인 별호다. 검이 진다는 것은 무인에게 결코 좋은 의미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웃는 걸 보면 속이 없는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매화검수(梅花劍手)인가?”

진검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검수라면 화산에서 자랑하는 무인들을 이야기한다. 그 안에 들었다는 것은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런 자가 낙화검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 갈지혁의 마음을 알았는지 진검백이 말했다.

“삼 년 전까지는 강했으니까.”

“지금은?”

“한번 볼래? 강한지, 아니면…… 형편없는지.”

갈지혁은 손을 흔들었다. 괜히 싸울 생각은 없다. 아무리 갈지혁이라고 해도 화산파에게는 쉽사리 손을 댈 수 없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화산파와도 싸워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만한 여건이 생긴다.

“어쨌든 난 화산파와 지금 얽힐 생각 없다. 일이 있다면 화산파라는 이름을 달고 와라. 그 전까지 너에게 볼일은 없다.”

갈지혁은 옆에 던져 둔 토끼를 집어 들고는 진검백을 밀쳤다. 갈지혁의 손이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진검백이 움직였다. 갈지혁의 손이 진검백에게 잡혔다.

“난 남이 내 몸에 손을 대는 걸 싫어해서 말이야.”

말을 하면서 진검백이 씨익 웃었다. 갈지혁은 말없이 웃는 그를 쳐다봤다.

기분이 나쁘다거나 해서가 아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 탓이다.

‘강해. 오히려 구양세가의 가주보다도.’

어떻게 이런 자가 낙화검이라는 치욕적인 명호를 얻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화산에서 이 정도 나이 대에 진검백만 한 무인은 절대 없을 것이다.

갈지혁은 모르지만 지금 진검백은 화산의 문젯거리다. 가주의 후보에 오를 정도로 대단한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삼 년 전부터 검을 드는 것을 본 사람이 없기에 모두가 그를 포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갈지혁이 보기에 진검백은 결코 약하지 않다는 거다.

갈지혁은 진검백의 사정을 모른다. 삼 년 동안 검을 든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화산에서 지탄을 받는 건 당연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누가 갈지혁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당장에 웃음을 터트릴 게다.

삼 년? 그 긴 시간 동안 검에서 손을 땐 자의 손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단 하루도 검에서 손을 놓지 않았을 게다. 그러기 전에는 이럴 수는 없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좀 있어서 그런데 식사나 함께하지.”

방금 전까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눈이 간다.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적어도 이만한 자가 왜 화산에서 그런 별호와 함께 웅크리고 있는지도 알고 싶다.

모르겠다. 본능적으로 무림에 나선 이후 최고의 강자를 만난 탓에 설레는 걸지도.

“……좋아. 들어와라.”

갈지혁은 동굴에 따라 들어오는 걸 허락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진검백이 쫓았다.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오면서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까도 그랬지만 냄새가 지독해.”

“독 냄새다.”

“허어, 여자한테 인기 없겠는데.”

그 말이 결코 악의가 없었기에 갈지혁은 대꾸도 하지 않고 동굴 구석에 있는 나무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말없이 진검백은 바라봤다. 그가 침묵한 채로 갈지혁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 뱀도 있다고 하던데.”

갈지혁이 슬쩍 진검백을 쳐다봤다. 그의 소매가 살짝 흔들리자 품속에서 사황이 튀어나오며 괴성을 질렀다.

캬아!

순간 놀란 듯했지만 진검백은 웃었다. 그는 놀랍다는 듯이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대단하군그래. 어떻게 이렇게 뱀을 훈련시켰지?”

말을 하면서 진검백은 손가락으로 사황에게 장난을 걸려 했다. 하지만 갈지혁이 급히 소매를 잡아당겼다.

“물리면 죽는다. 자리에 앉기나 해.”

“휴, 그러지.”

진검백이 웃으면서 말했다.

동굴 입구 근처로 간 갈지혁은 나무에 불을 붙였고 그 앞에 진검백은 말없이 앉았다. 장작에 불이 붙기가 무섭게 갈지혁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토끼를 다듬었다. 진검백은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갈지혁을 응시했다.

“손이 꽤나 능숙한데그래?”

“많이 해 본 일이니까.”

갈지혁은 그의 말의 의도를 잘못 파악했다. 진검백은 갈지혁의 칼을 다루는 솜씨를 보고 한 말이다. 요리사와는 다르게 무인은 검을 잡는 방법이 다르다. 갈지혁은 독을 쓰는 자인데도 불구하고 검을 잡는 것이 제대로다.

작은 것이지만 진검백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검도 잡아 봤다는 건가?’

믿기가 어렵다. 그만한 독공을 익힌 자가 검까지 익힐 이유가 없다. 그러나 분명 저 손은 검을 잡아 본 자의 것이다.

갈지혁은 토끼를 다듬어 불 위에 올리며 말했다.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해 보지그래.”

“거참, 너무 급하단 말이야.”

장난기 있는 진검백의 말투, 하지만 이내 그는 말을 시작했다.

“화산이 널 놔두지 않을 거다. 지금 그들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거든.”

“알고 있다. 그리고 두렵지도 않고. 그런데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뭐지?”

이미 알고 있었던 바다. 그리고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화산파의 무인인 진검백이 갈지혁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진검백이 말했다.

“아까도 말했잖아? 난 화산파의 문젯거리라니까. 그것보다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다닌다고 하던데…… 설마 독왕이 되겠다는 건 아니겠지?”

“네 말대로.”

갈지혁은 계속 불을 쑤시며 대충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진검백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뭐? 진짜 독왕이 되겠다는 생각에 그런 깃발을 들었다고?”

진검백의 웃음을 마주하면서도 갈지혁은 계속해서 불만 들쑤셨다. 그는 이상한 사내다. 비웃는 듯하면서도 그 웃음이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얼굴이 편해 보이는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호감이 가는 건 그 특유의 분위기 탓이리라.

“무림과 싸우겠다는 건가?”

“필요하다면.”

“큭큭, 자신감이 아주 강하군그래.”

진검백은 웃으면서도 눈은 계속해서 갈지혁을 살폈다. 가장 눈이 가는 건 역시 머리카락으로 가린 얼굴과 색이 변해 버린 양손이다. 아까 전 갈지혁이 했던 말 중 만 가지 독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진검백은 기억해 냈다. 저 같은 손을 만들기 위해 갈지혁은 죽을 고비를 셀 수도 없이 넘겼을 게다.

토끼 고기가 대충 다 익은 듯하자 진검백은 다리를 쭉 찢어 입에 가져다 댔다.

그는 토끼 고기를 우물거리며 다시금 말을 시작했다.

“내가 왜 찾아왔냐고 물었지? 독인이 되기 위해서는 내 운명을 포기해야 한다……. 라고 했던가?”

그 말이 자신이 화산파의 유삼문에게 했던 말임을 알고 있는 갈지혁은 대답 대신 토끼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진검백 또한 갈지혁이 듣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 말에 끌려서 왔지.”

“그게 날 찾아온 이유라고?”

“우습지만 그거뿐이야.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거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너와. 왠지 모르게 우리 둘은 같을 것 같아서 말이야.”

한눈에 봐도 둘의 상황은 다르다. 무림에서 알아주는 명문정파인 화산파의 매화검수인 진검백, 그리고 환영받지 못하는 독인 갈지혁. 그 누가 이 둘을 같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진검백은 그리 생각하는 모양이다.

진검백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묻지. 너는 자유로운가?”

“……?”

갑작스러운 진검백의 말을 갈지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자유롭냐고 묻는 것일까? 그때 갈지혁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가 바로 말했다.

“나는 검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검이야말로 진정한 검이지.”

“……너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지. 내 스승.”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갈지혁은 진검백을 보는 눈을 달리했다. 일악천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저 사내가 그대로 말했다. 더욱더 저런 자가 화산파의 문젯거리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 뭐 때문이냐.”

“히유! 대단하군그래.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간파하다니……. 장문인 빼고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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