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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28화 (2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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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진검백은 동굴 벽에 몸을 기댔다. 그의 눈에 수많은 상념들이 오간다.

“화산파에서는 내가 삼 년간 검을 잡지 않았다고 생각했지. 후후, 틀렸어. 내가 검을 놓은 적은 단 하루도 없다. 이곳이다. 이곳에 나의 검이 있다.”

진검백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그의 눈동자가 진지하게 변했다.

그런 진검백을 향해 갈지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에 검을 두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마음이 이는 곳에 검이 있다. 바로 심검(心劍)의 단계다.

“화산의 검은 분명 강해. 여인의 손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때론 질풍과도 같지. 하지만…… 그 이상은 없어. 명문정파라는 허울에 물들어 버린 화산의 검에는 자유가 없단 말이야. 화산은 자꾸 날 얽매려 들지. 매화검수, 차기 장문인 후보……. 이런 게 싫었어. 그랬기에 난 그들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그러니 이제는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더군. 하지만 오히려 이제야 진짜 진검백으로 살게 됐다.”

진검백의 말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무인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남만에서 살던 갈지혁으로서는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불에 타버린 토끼 고기는 둘에게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깬 건 화산의 매화검수 진검백이었다.

“독왕이 되겠다 했지? 같이 마주한 인연으로 말하지. 불가능해. 전 무림을 상대로 싸워 이기기 전에는 절대로.”

결코 다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진심으로 진검백은 갈지혁에게 충고를 한 것이다. 그는 화산파의 매화검수. 비록 죽은 듯 지내고 있지만 모든 신경을 열어둔 채 무림의 일들을 주시하고 있다. 현 무림에서 독왕이라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침묵하던 갈지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희 검을 익히는 놈들은 모두 그렇게 포기가 빠르냐? 불가능하다고? 웃기지마라! 내 목숨을 걸고 달려온 길이다. 만약 전 무림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면…… 싸워주지.”

“솔직히 말해 독인이 천하 무림과 싸운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잘 생각해 봐라. 너는 무림이 아니라 화산조차 넘지 못한다. 원한다면 내가 지금 보여 주지.”

말을 마친 진검백이 손을 슬쩍 내렸다. 그의 손이 어느 때든 발검할 수 있는 위치에 놓였다. 갈지혁의 눈이 머리카락 사이로 무섭게 빛났다.

슈슉!

진검백의 손이 움직였다. 전광석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검이 어느새 갈지혁의 턱 끝에 닿았다. 진검백이 그 상태로 천천히 말했다.

“지금의 넌…… 나도 죽일 수 있다. 손만 까딱하면 넌 바로 죽겠지. 인연이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무림을 떠나라.”

“큭, 큭큭! 웃긴 놈이군.”

갈지혁은 턱 끝에 검이 닿았음에도 웃었다. 진검백의 실력은 잘 알고 있다. 결코 이 나이 대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지닌 자다. 이미 마음속의 검을 품고 있는 사내.

갈지혁은 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까불지 마라, 애송아…….”

“큭!”

진검백은 갑작스럽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유도 없이 속이 들끓기 시작한 탓이다. 그는 눈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독에 당한 게 틀림없다. 그런데 언제?

진검백은 갈지혁과 마주한 이후 한 치도 방심한 적이 없다. 독을 쓰는 자라면 필히 경계해야 한다. 그랬기에 진검백은 모든 신경을 집중했고 갈지혁이 수상한 행동을 한 것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분명 지금 자신은 중독되지 않았는가.

“어, 언제 독을 쓴 거냐.”

갈지혁은 말없이 토끼 고기를 가리켰다. 그제야 진검백은 언제 자신이 독에 중독되었는지 알아 버렸다. 애초부터 갈지혁은 토끼 고기에 독을 뿌렸다. 그 상태로 고기를 구웠고 그것을 진검백은 먹었다.

“대단하군.”

눈이 점점 몽롱해지지만 진검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끊길 뻔한 정신이 순간 돌아왔고 그 찰나에 진검백의 내공이 몸 안을 마구 돌았다. 일각 정도가 지나자 진검백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헉헉!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독을 뿌리다니 고약하군.”

“그다지 강한 독도 아니었다. 만약 애초부터 널 죽이려 했다면 운기조식을 할 때라도 가능했지.”

“알고 있어. 넌 일부러 날 살려 줬지. 아마 화산과의 불가피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일 테고.”

갈지혁의 대답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기에 진검백은 그대로 벽에 등을 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유쾌해! 넌 정말 재미있는 놈이야!”

독왕이 되겠다는 말에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한 번의 일로 진검백은 상대에 대해 파악했다. 머리가 있는 놈이다. 이런 자라면 쉽사리 쓰러지지 않을 게다. 진검백은 웃음을 거두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좋아. 본론으로 들어가지. 화산파 장문인께서 나에게 널 감시하라고 했다.”

“그런가.”

“그래. 너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고하라고 했지.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어. 그리고 그건 장문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다.”

갈지혁은 진검백을 바라봤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저의를 알 수가 없다.

“좋든 싫든 난 너와 있어야 한다. 물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난 떠나 줄 용의도 있다. 하지만 화산에서는 다른 자를 네 옆에 붙이겠지. 어때? 내가 있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제야 갈지혁은 진검백이 이 늦은 밤 홀로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산파에서 자신에게 아무런 감시를 붙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다.

화산파는 분명 갈지혁을 놔두지 않는다. 때가 아니기에 참고만 있을 뿐 갈지혁도 화산파를 피할 생각은 없다.

잠시 생각했지만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행동을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네가 있는 게 낫겠지.”

“당연한 말. 네가 인륜에 어긋나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난 너를 막지 않으며, 상부에도 그에 대해선 보고하지 않는다. 그럼 계약 성립인가?”

“계약이라……. 내가 너에게 주는 건?”

“자유다.”

그 한 마디에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습지만 둘은 함께하게 되었다. 진검백은 예의 그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진검백은 지루하다는 듯 돌 위에 앉아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향하는 곳에는 무엇인가를 섞고 있는 갈지혁이 있다. 지독한 냄새에 진검백은 눈을 찌푸렸다. 사방이 개방된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독한 냄새를 내는 건 처음 본다.

“젠장, 그것 좀 치우지그래. 아까 먹었던 것이 전부 올라올 정도야.”

“도와주지 않을 거면 조용히 해.”

짧게 대답한 갈지혁은 계속해서 일에 몰두했다. 계속해서 지독한 악취의 것을 만지작거리던 갈지혁이 이내 허리를 폈다. 아마도 다 된 모양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진검백이 물었다.

“그게 뭐냐? 독?”

“몰라도 돼.”

비록 같이 있는다 해도 갈지혁은 진검백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차갑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연하다. 무림에서는 칠 할을 보이고 삼 할을 숨겨야 한다고 했다. 그런 마당에 적이 될지도 모르는 진검백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진검백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 또한 갈지혁의 생각을 아는 탓이다.

쉽사리 모든 것을 보여 주는 자는 믿을 수가 없다. 그런 자는 이용당하기 쉬울 뿐이지 무엇인가를 이끌어나가기는 부족한 자다.

비록 갈지혁이 독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능력이 있는 쪽이 더 재미있지 않겠는가.

진검백이 갈지혁과 함께한 지 벌써 보름가량의 시간이 지났다.

그가 보는 갈지혁은 신기한 인물이다. 얼굴도 드러내지 않아 정확한 외모는 모르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 결코 추남이 아니다. 오히려 미남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가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지도 의문이다.

외형뿐만이 아니다. 같이 있으면서도 그 속내를 모르겠다. 쉽사리 마음을 보이지 않고, 그 덕분에 더욱 믿음이 간다. 더군다나 몇 번 싸우는 것을 본 입장에서 그의 독은 가히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갈지혁이 하독하는 순간은 이미 상대로서는 거의 막기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 찰나를 잡아내는 갈지혁의 능력도 놀랍고, 또한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내는 과정도 대단하다.

독뿐만 아니라 무공도 제대로 익혔다는 소리다. 단순히 독에 의존하는 자라면 상대하기 수월하다. 독을 경계는 하겠지만 하독하기 전에 손을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정 아니면 독의 거리에서 벗어난 후 장기전을 유도해 지치게 해도 된다.

제대로 된 무공 실력 없이 독을 쓰는 자는 오히려 우습기만 하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다르다. 경공은 진검백조차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 그의 휘둘러지는 쌍장은 어떻게 저런 파괴력을 낼 수 있는지 괴이하기까지 하다. 독장이라면 위력이 약해야 정상이거늘 갈지혁의 것은 상식을 벗어났다.

‘애초부터 독왕이 되겠다는 걸 보면 상식을 벗어난 놈이긴 하지.’

진검백이 보기에 갈지혁이 독왕이 되겠다고 한 말은 결코 장난이 아니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세우려고 허튼소리를 하는 것도, 단순히 무엇인가를 노리고 말하는 것도 아닌 듯싶다. 우습기도 하지만 갈지혁은 정말로 독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갈지혁은 여전히 섬서를 기준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진검백은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고 간단히 화산에 보고만 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갈지혁 또한 알고 있다. 진검백이 비록 갈지혁의 행동을 눈감아 주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것은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다.

진검백은 갈지혁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갈지혁은 섬서에서 나름대로 알려진 자들과 싸웠지만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아마도 무림 공적으로 몰리지 않기 위함이리라. 그것만 봐도 갈지혁이 어떠한 인물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확실하게 뒤처리를 하는 게 갈지혁한테도 편하다. 무림인이라는 게 은원이 강해 수치심에 못 이겨 다른 자들을 이끌고 복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갈지혁은 상대를 제압하기만 할 뿐 목숨만은 남겼다. 독에 중독시켜 게거품을 물게 하는 일은 있어도 말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굴욕적일지 모르나 갈지혁에게는 최선의 선택이다. 진검백은 계속해서 갈지혁의 행동을 살폈다.

그런 진검백의 눈이 부담스러웠는지 갈지혁이 말했다.

“뭐야?”

“아아, 걱정 마. 그냥 쳐다보는 거니까. 남색(男色)엔 취미 없다고.”

진검백의 말에 갈지혁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종종 그의 말은 받아치기 뭐할 정도로 부담스럽다. 다시금 서로의 일에 열중하던 차에 갈지혁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갈지혁이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진검백 또한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누군가가 온 모양인데. 손님일까 아니면…… 네 목을 노리는 놈일까. 내가 보기엔 후자일 확률이 높은데 말이야.”

“보면 알겠지.”

갈지혁은 그대로 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있지만 감춰진 갈지혁의 눈은 번뜩였다. 비록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해도 무림인의 자존심을 부쉈다. 그들이 그냥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더군다나 자신을 죽이러 온 자들……. 굳이 살려야 할 필요도 없다.

죽이러 왔으니 벴다. 명분이 있는 한 상대를 죽여도 상관없는 것이 무림이 아닌가!

점점 발자국 소리가 조용히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이러 왔다면 적어도 저 정도 발걸음은 숨겨야 한다. 진검백은 갈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찾아오기로 한 사람이라도 있냐? 저렇게 대놓고 걸어온다는 건 두 가지지.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너에게 악의를 품고 오는 게 아니라는 걸 보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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