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4화
갈지혁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땅을 응시했다. 걸음걸이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을 때 놀랍다는 듯 진검백이 말했다.
“어? 여자?”
여자라는 말에 갈지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그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갈지혁의 앞까지 다가온 자의 수는 다섯. 그렇지만 갈지혁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갈지혁의 눈에 여인의 신발 하나가 보였다.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갈지혁의 귀를 간지럽혔다.
“잘 지냈어요?”
갈지혁은 예상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느꼈다. 이런 곳까지 자신을 찾아올 여인이라면 운하연을 제하고 누가 있겠는가. 갈지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란색 눈의 여인이 눈앞에 있다. 그의 옆에는 낯이 익은 자도 있고 생전 처음 보는 듯한 자도 있었다.
“흠흠, 오랜만이네.”
“오랜만입니다.”
약선문의 섬서 지부를 맡고 있는 곽운지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 외에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갈지혁은 운하연을 바라봤다.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갈지혁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말해 줄 수 없는 이상 갈지혁은 함구할 것이다.
“무슨 일이지. 날 찾아올 이유는 없을 텐데.”
“아실 텐데요. 아, 그런데 옆에 계신 소협은…….”
“하하! 진검백이라고 합니다.”
“화산파의 진검백?”
“어떻게 아시는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갈지혁 이 친구가 어떻게 약선 어르신의 손녀를 아는지 모르겠군요.”
그 말에 운하연은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름다운 외모를 떠나서 그녀의 푸른 눈만으로도 이미 운하연은 무림에서 널리 알려진 상태다. 그랬기에 운하연은 가볍게 미소로 넘겼다. 그녀 또한 진검백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한때는 화산의 최대 기재였지만 지금은 검을 놓아 버린 무인.
알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비록 무림에 공공연한 소문이라 해도 당사자 앞에서 그런 속마음을 내비칠 수는 없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할 게 조금 있어서요.”
“하아, 자리를 피해드려야겠군요.”
“그래주시면 고맙죠.”
진검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운하연과 곽운지를 스치면서 지나갔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그 다섯 모두를 살폈다. 찰나였기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의 행동을 유독 관심 있게 바라보던 갈지혁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잠룡(潛龍). 일어나면 천하를 흔들겠지.’
갈지혁이 보는 진검백은 잠에 빠져 있는 용이다. 만약 그가 제대로 날아오른다면 무림엔 커다란 신성이 등장하는 것이리라.
진검백이 눈에서 사라지자 운하연이 갈지혁에게 말했다.
“당신밖에 없어요.”
“뭐가?”
“단화초요. 당신은 알고 있어요.”
“질긴 여자군. 분명 모른다고 했을 텐데?”
갈지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단화초만은 결코 말해 줄 수 없다. 그것은 일악천에게 손수 부탁 받은 것이다. 설령 하늘에 있는 천신(天神)을 죽이라 해도 갈지혁은 그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만큼 일악천에게 받은 은혜는 죽어서도 갚을 수 없을 정도다.
“당신이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저희 할아버님이 말씀하시길 일수만독 어르신은 결코 단화초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분은 사독문에서 나오실 생각이 없죠. 그럼 답은 뻔한 것 아닌가요? 당신이겠죠. 당신에게 단화초를 어떻게 하라고 했을 거예요.”
“……재미있군. 소질이 있어. 이 기회에 이야기꾼이 되는 건 어때? 그리고 약선이라는 자가 우리 스승님을 그리 잘 아나?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틀렸어. 일수만독 어르신은 모든 걸 자신의 손으로 하는 분이야.”
“당신이 쉽게 말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저희 할아버님과 일수만독 어르신의 인연에 대해서 모르시나 보죠? 그 둘은 긴밀한 사이였어요.”
“뭐?”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갈지혁은 되물었다. 그는 오히려 약선과 일악천의 사이가 좋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수만독 어르신의 목숨을 구했던 것이 바로 저희 할아버지인 약선이에요.”
“목숨을 구했다? 너희 할아버지가 나의 스승님의?”
운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갈지혁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네요. 하지만 거짓이 아니에요.”
“아니, 믿는다. 다만 예상외라서 그렇지.”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비록 서로가 보는 곳이 다르기에 적대시하고는 있지만 거짓을 말할 여인 같지는 않다. 그리고 설령 약선이 일악천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해도 이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만약 그런 일에 흔들려 단화초의 위치를 가르쳐 줄 것이었다면 일전에 일악천이 직접 말했을 게다.
운하연이 곧 말했다.
“물론 그런 것을 가지고 단화초의 위치를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려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말하려는 것은 당신과 내가 적대시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적대시할 필요가 없다? 이봐, 아가씨. 분명 귀가 있다면 내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지금 섬서에서 독을 사용하며 헤집고 다니는 것이 바로 나야. 내 주변에서 알짱거리다가는 당신에게 좋을 건 없어.”
비록 그들이 갈지혁을 놔두고는 있지만 곱게 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 어느 정도 선을 넘게 되면 그때부터 무림은 갈지혁을 잡으려 들 게다.
“우리 약선문은 겉으론 중원 무림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애매한 입장이에요. 무림이 그토록 경멸하고 있는 독황독립문과 저희가 약하게나마 연을 맺고 있는 탓이죠.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입어서 참고 있는 것뿐이에요.”
약선문은 무공이 강한 문파가 아니다. 비록 몇 명은 무림에서 알아 줄 정도의 고수지만 전체적인 수준은 구파일방의 반 정도도 되지 못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림에서 큰 대접을 받는다. 그들이 가는 곳에선 환자가 사라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다.
약선문의 인물들이 수많은 곳에서 의술을 펼치는 탓이다. 개중에 무인이 있는 건 당연하다. 무림에 있는 무인들의 반수 이상은 어떻게든 약선문에 은혜를 입는다.
구파일방은 약선문과 독황독립문이 연을 맺는 그 순간부터 조금씩 압박을 가해 오고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 약선문의 약선은 그 말을 깨끗이 무시했다. 약과 독은 따로 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일악천의 목숨을 구했고, 그때부터 독황독립문과 연을 맺었다.
지금 약선은 곧 닥칠 재앙을 막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재앙을 막기 위해선 독을 잘 아는 곳은 필수다. 당문도 있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독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살아왔다. 더군다나 그들과 거래를 하게 되면 지금 약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정파 무림에 넘어가게 될 것이고 일대 혼란이 몰아닥칠 게다.
그리고 약선의 움직임이 크게 제한받을 건 당연지사다. 그랬기에 약선은 당문이 아닌 독황독립문과의 인연을 더욱 두텁게 했다. 그 모습을 정파 쪽에서 좋게 볼 리가 없다. 다른 곳도 아니고 독황독립문이라면 그들은 이를 갈기 때문이다.
“의외로군. 약선문이…….”
“잠시만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운하연은 중얼거리는 갈지혁을 뒤로하고 말했다. 운하연의 뒤에 서 있던 네 명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진검백이 사라졌던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약선문 내에서도 곧 닥칠 재앙에 대해 아는 자는 한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리고 지금 운하연과 함께 온 자 중 그 사실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 정도의 비밀이지만 운하연은 갈지혁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고 한다.
“단화초가 없으면 무림뿐만이 아니라, 천하가 죽어요. 곧…… 역병이 퍼질 거예요.”
“병이 퍼질 거라는 건 들었다. 하지만 굳이 단화초여야 하나? 그건 내가 알기로 독초야. 그게 없다고 해도 분명 방법은 있을 거다. 단화초를 찾을 시간이면 차라리 다른 방도를 찾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 또한 다른 방법이 있다면 찾고 싶어요. 하지만…… 없어요. 저희 할아버님의 말씀이 맞다면 절대로.”
갈지혁은 운하연을 바라봤다. 그녀의 파란색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감 있던 여인이다. 어떻게 보면 건방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갈지혁에겐 상당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남만의 여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운하연을 보면서 갈지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중원의 여인인가.’
갈지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을 보면 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여인은 간절하게 단화초의 위치를 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갈지혁의 마음에 변화는 없다.
“미안하지만 몰라. 그러니 날 찾아올 시간에 다른 방법으로 그 역병을 치료할 방도를 궁리해 보는 게 나을 거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직 역병이 퍼지기 시작한 것 같지는 않으니 시간은 좀 있을 거다.”
“아뇨. 이미 퍼지기 시작했어요.”
운하연의 눈빛이 파랗게 빛났다. 그 눈빛은 왠지 모르게 요력(妖力)을 담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듯한 느낌이다.
“이미 퍼지고 있다고?”
“그래요. 이미 마을 하나가 깨끗하게 죽었어요. 사람뿐 만이 아니에요. 기르던 개, 말……. 심지어는 벌레들까지도 모두. 하지만 아무도 몰라요. 그저 마을 하나가 이상한 일로 인해 죽고 말았다고 생각하죠.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의 여유는 없어요.”
갈지혁은 돌에 걸터앉은 채로 침묵했다.
그 역병이라는 것에 호기심도 동했다. 벌레까지 모두 죽일 정도라면 역병이라고 부르기도 뭐하다. 역병이 있는 곳에는 벌레가 꼬인다. 사람들의 시체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벌레들까지도 죽다니……. 역병이 맞는 건지 의문까지 든다.
갈지혁이 말을 툭 던졌다.
“누구지?”
“무슨 말이죠?”
운하연은 갈지혁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갈지혁이 말했다.
“주변의 누군가가 그 병에 걸렸을 게 분명해. 맞지? 아무리 약선문이 환자를 치료해 주는 문파라 해도…… 그 이상이야. 너의 눈에는 다른 게 보여. 그 이상의 것이 말야.”
“……무섭군요. 당신의 말이 맞아요. 그 지독한 역병에 걸린 건 저희 어머니예요. 아니, 걸렸던 것이라고 해야 정확하겠군요. 이제 세상에 없으시니까요.”
어머니라는 말에 갈지혁은 쓴 입맛을 다셨다. 다른 건 몰라도 갈지혁에게조차 어머니라는 존재는 특별했기 때문이다.
“괜한 걸 물었군. 미안하다.”
“당신이 사과도 하네요? 예상외네요. 호호!”
운하연이 웃었다. 그런데 웃는 그녀의 파란 눈에 슬쩍 물기가 비치는 것을 갈지혁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운하연은 끝내 눈물을 보이지도, 흘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담담한 듯이 말했다.
“어머니 같은 사람이 다시 나오질 않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치료 방법을 알아요. 이번에도 똑같은 사람이 나오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요. 어머니 때문이라도, 의술의 길을 걷는 한 의원으로서도.”
“후우, 몇 번째 말하는 건지 모르지만 난 단화초의 위치를 몰라. 그리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가 안다 해도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포기해.”
갈지혁이 계속해서 모른다고 하니 운하연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갈지혁을 내려다봤다.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이런 자들은 한번 정한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운하연은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신은 모른다고 하고 전 단화초가 필요하니 방법은 하나뿐이겠군요. 내일 봐요.”
“뭐?”
갈지혁은 운하연이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몸을 돌리고 아래쪽을 향해 걸어가자 급히 돌 위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채 운하연을 잡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아래로 사라졌다. 갈지혁은 다시금 돌 위에 걸터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