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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30화 (30/200)

# 30

5화

“빠른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운하연이 펼친 경공은 놀라울 정도다. 일전에 자신이 뿌린 독을 가벼운 소매의 움직임과 재채기로 막아 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갈지혁은 운하연이 내뱉은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있을 때 진검백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로 가득했다. 진검백은 갈지혁의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뭐야? 어떻게 저 여인을 아는 거냐?”

“말하자면 좀 길다.”

“들어줄 의향은 있다만…… 네놈이 말할 리는 없고.”

진검백의 말에 갈지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볍게 혀를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갈지혁을 스치듯 지나가면서 말했다.

“저래 보여도 여걸(女傑)이야. 우습게 보다가는 큰코다칠 걸.”

“알고 있다. 내가 무림에 나온 후 내 독을 막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호오, 그래? 그건 몰랐는데 말이야.”

“당연하지. 그런 창피한 걸 내가 말하겠나?”

갈지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진검백 또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가 있다는 듯한 얼굴이다. 그는 단순히 웃고 있지만 지금 운하연이 왜 갈지혁을 찾아왔을까 궁금해하고 있었다. 적어도 갈지혁과 운하연이 만나야 할 이유는 진검백이 보기엔 단 하나도 없다.

‘어차피 나중이 되면 알게 되겠지. 큭큭, 이놈은 재미있는 일을 벌일 것 같아.’

갈지혁의 옆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반드시 일을 벌이고야 말 것 같은 사내. 그런 폭탄(爆彈) 같은 사내이기에 함께하자고 제안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진검백은 갈지혁의 어깨를 툭 치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홀로 남은 갈지혁은 이제는 따뜻해지는 봄의 날씨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감고 있는 눈 건너로 운하연의 모습이 슬쩍 비치고 사라졌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며 마음 아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갈지혁 또한 한 사람이 생각났다.

남만에 계실 어머니. 지금쯤 모진 시련을 견디고 계시진 않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랬기에 더욱 급하다. 독왕이 된 후에야 찾아뵙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미안하지만 단화초로 만들어야 할 것이 있다.’

일악천이 건네주었던 서찰에는 단화초의 위치만 적힌 게 아니다. 그곳에는 단화초를 이용해 한 가지 독을 제조하는 방법도 적혀 있었다. 일악천은 갈지혁이 독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운하연의 단호한 모습을 생각하며 갈지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당찬 여인이니…… 다른 방도를 찾겠지.’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검백이 들어간 동굴 안으로 따라 움직였다.

겨울이 가면서 화고촌(華古村)에는 다시금 시끌벅적함이 찾아왔다.

겨울 내내 웅크렸던 아이들도 집 밖으로 나왔고, 어른들도 각자의 일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화고촌은 산서성(山西省) 지방에 있는 작은 촌락이다. 이곳에서 거주하는 사람의 숫자는 대략 삼사십 가구 정도로, 전부 합쳐봤자 이백 명가량밖에 되지 않는다. 당연히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아침부터 한 사내가 부산을 떨고 있었다.

화고촌에 들어온 지 삼 년이 된 사내다. 처음엔 다소 험악해 보이는 인상 탓에 사람들이 모두 경계를 했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지금은 잘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 그는 아침부터 대단한 것을 찾았다고 부산을 떨고 있었다.

“쯧쯧, 말도 안 되는 소릴세. 내가 오십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았거늘 그 동굴에서 금이 나온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네.”

“아이쿠! 어르신 속고만 사셨습니까? 그럼 이건 뭡니까. 제가 그곳에서 주워 왔다니까 그러십니까!”

사내의 손에는 새끼손톱만 한 금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노인의 말대로 그곳에서 갑작스럽게 이런 금이 나타났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 또한 쉬이 믿을 수 없는 듯한 눈치였다.

사내가 흥분해 침을 튀기면서 말했다.

“가 봅시다! 그럼 되잖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닌가. 더군다나 저 정도의 금이라면 아무리 재물에 욕심이 없는 자들이라고 해도 눈이 돌아갈 만 하다.

“좋소! 그리합시다!”

중년의 사내가 고함을 질렀고 마을 사람들은 그의 뒤를 쫓아 동굴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 사내가 슬쩍 웃었다. 그는 들고 있던 금을 손가락으로 튕겨 냈다. 손톱만 한 금 조각이 나무에 틀어박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무인이다. 그런데 왜 무인이 이런 외진 마을에 몸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사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까끌까끌한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서찰을 보내야겠군.’

이 순간을 위해 사내는 삼 년이라는 시간을 죽은 듯 지냈다. 그의 품에는 두 장의 서찰이 들어가 있다. 하나는 적색이고, 다른 하나는 청색이다. 적색은 실험이 성공했다는 것을 뜻하고 청색은 그 반대다.

아직은 두 가지의 서찰 중 어느 것을 보내야 할지 모르지만 더 이상 이 마을에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서찰을 보낼지는 며칠 후에 정할 일이다.

사내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치 애초부터 그곳에 없기라도 했다는 듯이.

사내가 사라졌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사내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들이 간 동굴에는 금은커녕 돈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토록 자주 다니던 동굴인데 금화가 있었다면 모를 리가 없다.

잠시 금으로 달아올랐던 마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갑게 식었다. 그로부터 칠 일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악!”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아들이 죽었다. 그리고 딸이 죽었다. 마을에서 가장 고령이었던 사람도 죽어 버렸다. 몸이 약한 사람들은 이상한 반점이 몸에 가득한 채로 말도 없이 죽어 버렸다. 그리고 죽음의 손길은 약한 어린아이나 노인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비명을 지르던 그들 또한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나무조차도 시들었다. 그들의 몸에는 알 수 없는 녹색 반점이 가득했다.

비록 작았지만 사람이 사는 활기가 느껴지던 화고촌에서 생명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무도 그 죽음의 손길은 피해 갈 수 없었다.

화고촌이 그렇게 죽음의 장소로 변한 지 이틀 정도가 지난 후 한 그림자가 그 근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입을 틀어막았다. 지독한 악취다. 그리고 아직 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아는 탓이다.

그는 얼마 전 이 마을에서 도망쳤던 바로 그 사내였다. 그는 죽어 나자빠져 있는 사람들을 보며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트렸다. 그는 품속에서 청색의 서찰을 꺼내서 찢기 시작했다. 사내는 서찰을 갈기갈기 찢은 후에 허공을 향해 던졌다. 나무 위에서 던진 찢겨진 서찰은 바람을 타고 사방을 향해 퍼져 나갔다.

그의 품에 남겨진 적색 서찰. 그것은 사내를 이곳에 보낸 자의 손으로 가게 될 것이다. 거사가 슬슬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림은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하제일인이라고 해도 막을 수 없다.

‘흐흐! 오랫동안 꿈으로만 여겼던 무림일통이 코앞에 닥쳤다!’

사내는 계속해서 웃었다. 미칠 듯이 웃던 그의 웃음이 멈추는 순간 그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발에 적색 서찰을 단 새 한 마리가 허공을 날았다.

커다란 상석. 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입에는 황금빛 여의주가 물려 있다.

그 의자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척 봐도 강해 보일 것 같은 기도를 풍기는 노인은 독황독립문의 문주인 지대익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쪽으로 몇 명의 무인들이 서 있다.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 자들로 독황독립문 내에서도 잘 활동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전대 기인이라고 봐도 되는 그들이 이토록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리고 그런 노인들과는 별개로 한 젊은 사내도 앉아 있다. 피부는 까무잡잡하지만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인 사내다. 그가 바로 지대익의 손주인 지운경이다. 그는 입가에 슬쩍 미소를 달고 지대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색 옷에 길게 수염을 기른 노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힘이 없어 제 몸조차 간수하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안다면 아무도 그리 말할 수 없을 게다.

요문(曜門)이라고 불리는 노인으로 그는 독잎 하나로 수백 명에 달하는 자들을 죽인 경험이 있다. 요문은 마을 사람들이 쓰는 우물에 독을 탔다. 독은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를 죽였다. 그 독을 푼 이유도 단순히 재미 때문이라고 하니 그 속내가 얼마나 지독한 자인지 알 수 있다.

“이보게 문주, 왜 우리를 이 자리에 모은 것인가.”

“때가 된 탓이네.”

“때가 되었다? 그 말은…….”

“성공이야. 화고촌이 깨끗하게 정리됐어. 저번에 이은 두 번째 성공일세. 이제 성능은 확실하네.”

요문이라는 노인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일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일 때를 제하고는 표정조차 변하지 않는다는 그다. 그런 그가 이토록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다.

그만큼 이 일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게다.

“때가 된 것인가?”

“그래. 큭큭.”

지대익을 바라보며 지운경 또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지대익이 저토록 좋아하는 것을 지운경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독황독립문은 남만을 벗어나 중원으로 뻗어 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언제나 중원을 제압하는 것은 실패로 그쳤다.

마지막으로 독황독립문과 중원이 싸웠을 때, 그때는 일악천이 있었다. 그의 무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의 경지였다. 하지만 그는 무림을 잡아 삼킬 기회를 버렸다. 그랬기에 그때도 실패를 한 채로 독황독립문은 돌아서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중원에는 역병이 돌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역병이라고 보기도 뭐하다. 바로 독황독립문 내에서 만든 독이니까. 다만 형태가 역병과도 같고, 공기를 통해서도 퍼지기에 모두가 그리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증상 또한 역병과 같아 오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고의 의술로 유명한 약선문 또한 그리 알고 있지 않는가.

“섬서부터 시작해서…… 광서까지. 온 무림을 뒤덮을 것이다.”

알아도 당할 수밖에 없다. 치료를 할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로 그 역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약초가 단화초이기 때문이다.

지대익이 단화초를 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단화초의 독도 필요하지만 지금 역병으로 위조시켜 돌리는 이 독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약초도 필요하다.

요문이 물었다.

“갈지혁이라는 꼬맹이는?”

“섬서에서 설치고 다닌다고 하더군. 너무 설치고 다녀서 구파일방의 눈에서 슬슬 벗어나는 모양이야. 그래도 죽게 할 수는 없지. 내가 수하들을 보냈지. 정 위험하면 도와줄 게야. 그놈은…… 죽어선 안 되니까.”

“크크! 우습군. 결국은 우리의 손으로 죽일 놈을 지금은 오히려 살려 주려고하는 꼴이 아닌가.”

“어쩔 수 있나. 일악천의 성격으로 보아 분명 단화초의 위치를 그놈에게 알려 줬을 게야.”

일악천이라는 말에 요문의 몸이 움찔했다. 그가 독황독립문에서 손꼽히는 고수라고는 하지만 일악천에 비하면 한참 아래다. 그는 전성기 때 일악천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도 있다.

“일악천은…… 조용한가?”

“후후, 그라면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결코 사독문에서 나오지 않을 테니까. 설령 자신의 제자인 갈지혁이 죽는다 해도.”

“물론 그렇긴 하지만 일악천이 만약에 나오기라도 한다면 일이 뒤틀려지니까.”

“걱정이 너무 많군. 그는 분명 강했지. 하지만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해. 신경 쓸 필요 없지.”

요문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속은 달랐다. 그의 머릿속에 몇십 년 전 일악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봤던 일악천은 요문으로서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 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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