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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31화 (31/200)

# 31

6화

‘이빨이 빠졌다고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

그 날의 공포를 잊을 수가 없다. 요문은 입술을 깨물면서 애써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지대익의 말대로야. 그놈은…… 다시 나타나지 않아.’

요문의 표정을 바라보던 지운경은 피식 웃었다. 그깟 사독문에 갇혀 있는 노인이 뭐가 무섭단 말인가.

그로서는 일악천을 두려워하는 다른 자들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다.

갈지혁, 그의 행보를 지운경은 재미있다는 듯이 전해 듣고 있다. 비록 지금은 단화초를 위해 도와주겠지만 결국은 베어야만 한다. 갈지혁은 그냥 놔두기엔 너무 귀찮은 존재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지운경은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기억해 내야 한다.

지운경은 웃고 있었지만 손은 강하게 쥐어진 상태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주르륵 하고 피가 흘러 내렸다.

* * *

아침이 돼서 눈을 뜬 지 어느덧 한 시진이 지나자 진검백이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뭐 재미있는 일 없냐?”

“…….”

갈지혁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신의 일에 몰입하자 진검백은 괜스레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사황에게 말했다.

“네 주인은 왜 저렇게 재미가 없냐. 너라도 내 말벗이 되어 주면 좋겠지만…… 무리로군.”

말을 마친 진검백은 검집에 검을 넣은 채로 사황의 머리를 툭툭 쳤다. 처음엔 요리조리 피하기만 하던 사황은 이내 약이 올랐는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날카로운 독아(毒牙)를 드러냈다.

하지만 곧 사황은 이빨을 감추며 갈지혁에게로 가기 시작했다. 이빨을 내밀자 용천혈에 내공을 집중시키던 진검백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주인도 그렇지만 뱀도 날 무시하는데?”

“이놈은 자기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거든.”

“그 말은…… 내가 이 녀석보다 약하다는 게 되는 건가?”

“아는군.”

다가오는 사황을 소매 속에 넣으며 갈지혁은 밖을 향해 걸어 나왔다. 갈지혁은 한동안 조용히 동굴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의 손이 더 검게 변한 것을 진검백이 놓칠 리가 없다. 동굴 안에서는 잘 몰랐지만 이곳에서 보니 확연하게 드러난다.

“며칠 조용히 있는 듯싶더니…… 이번엔 누구와 싸우러 갈 거냐?”

“아니. 다음에 겨룰 만한 놈은 아직 찾지 못했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찾아봐야겠지.”

“그럼 지금 어디를 가려고…….”

갈지혁이 한동안 조용히 있었던 것은 비단 무공 훈련 때문만은 아니다. 딱히 다음에 겨룰 만한 상대를 찾지 못한 것이다.

갈지혁이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돈 벌러 간다.”

“돈?”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지. 가지고 있던 돈은 다 쓴 지 오래거든.”

갈지혁의 말에 진검백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인들은 크게 돈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여러 곳에서 저절로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문파 자체에서 이곳저곳에 돈이 들어올 만한 장사를 펼치기도 하고, 속가제자들을 통해서도 이래저래 돈을 버는 탓이다. 그 액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진검백은 뭐라고 하려다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또한 갈지혁과 마찬가지로 빈털터리의 상황이라는 것을.

돈을 넣어 둔 짐을 그대로 화산파의 무인들이 가져가 버렸다. 실수로 달랑 검 하나만 들고 갈지혁을 찾아왔던 것이다. 갈지혁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있는 진검백에게 말했다.

“생활이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사야 될 약재가 있어서 말이야.”

“무슨 일을 하게?”

“우선은 근처의 마을로 내려가 찾아볼 생각이다.”

진검백은 무인들이 돈이 급히 필요할 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탓에 바로 대답했다.

“표사 일은 어때?”

“아니. 그건 너무 얽매이는 게 많아. 단기간에 일정 수준 이상의 돈을 버는 일이 필요하다.”

단기간에 꽤 되는 돈을 버는 일이라는 말에 진검백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몇 없다. 물론 무공을 이용한다면 정 없는 건 아니지만 개중에서 갈지혁이 할 만한 일이 없다는 게 문제다.

“가장 돈이 되는 건 사람을 죽이는 일이긴 한데…… 그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말이지.”

“그건 나도 사양이다.”

“그럼 별수 있나. 마을에 내려가 봐야지.”

진검백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상황에서 갈지혁의 말대로 단기간에 많은 돈을 번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런 일이 있다면 너도나도 달려드는 건 당연하다.

갈지혁이 아래로 걷기 시작하자 진검백이 옆에 따라붙었다. 그의 눈이 슬쩍 주의를 살폈다. 그의 눈에 구석에 있는 몇 명에게로 향했다. 진검백이 갈지혁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자들 어떻게 할 거냐?]

[알아서 떨어지겠지. 제 풀에 지칠 때까지 놔둘 생각이다.]

[약선의 손녀가 왜 이렇게까지 자네에게 매달리는지 모르겠군. 뭐야? 궁금한데?]

[시끄러워. 몰라도 된다.]

갈지혁 또한 힐끔 약선문의 무인들을 바라본 후 못 본 척 계속해서 걸었다. 그들이 뒤에 따라붙었지만 갈지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귀찮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운하연의 마음은 안다. 그 역병 때문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도 안다. 의술의 길을 걸으면서 어머니를 눈뜨고 그냥 죽어 가는 걸 보면서 흘렸던 눈물을 잊지 못해 이토록 매달리는 건 알지만 단화초만큼은 안 된다.

갈지혁은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사황을 달래며 아래로 계속해서 걸었다.

갈지혁과 진검백이 간 곳은 장안의 북동쪽에 위치한 신풍(新豊)이라는 곳이었다. 술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으로 꽤나 일거리도 많은 곳이다.

진검백이 갈지혁을 이리로 이끌었다. 갈지혁은 모르지만 진검백이 이곳에서 하고자 하는 게 있어서였다. 술이 있다는 것은 곧 이래저래 유흥거리가 많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진검백은 이곳에서 도박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수중에 있는 돈은 없지만 옷에 달린 몇 가지를 팔면 그래도 아주 조금의 돈은 나온다. 그걸로 도박을 해서 돈을 벌어 보자는 속셈이었다.

신풍에 도착한 것이 막 밤에 들어서는 시간이었던 탓에 마을은 꽤나 시끌벅적했다. 술을 마시러 외지에서 온 사람부터 해서 거래를 하러 온 상인들까지…….

“우선 옷에 달린 거라도 좀 팔아서 객잔이라도 잡지?”

“그러지.”

진검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건물 하나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노인은 문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진검백이 옷에 달려 있는 장신구 몇 개를 때면서 내밀었다.

“가격 좀 쳐 주십시오.”

“알겠소이다.”

노인은 이리저리 장신구를 보다가 이내 돈을 진검백에게 건네주었다. 몇 푼 되지 않는 돈이지만 진검백은 그것을 품 안에 소중히 넣었다. 노인은 진검백의 뒷모습을 보면서 작게 말했다.

“나이도 젊은 것 같은데 장신구까지 팔아서 술이라니, 쯧쯧.”

진검백이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한 말이었지만 그는 화산파의 매화검수다. 그 정도의 목소리도 듣지 못할 리가 없다. 진검백이 몸을 돌려 웃으며 말했다.

“이래 봬도 말술입니다. 겨우 이 돈으로 만족할 만큼 술을 마실 수도 없죠. 어쨌든 이왕 이 마을에 온 김에 술 한 잔은 할 생각입니다.”

“허허!”

노인은 들을 거라고 생각 못 했던 탓에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진검백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밖에선 갈지혁이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갈지혁의 모습은 주변의 이목을 확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다소 남루한 행색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 걸인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외향이다. 그런데 걸인과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갈지혁에게는 있다. 그 탓에 갈지혁은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잡아끄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가지. 몇 푼 되진 않지만…… 방 하나와 술 한 잔 정도는 가능할 거야.”

받은 돈의 삼분지 일만 보여 주며 진검백이 말했다. 나머지 돈은 이미 도박으로 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술을 됐고 일거리나 찾았으면 좋겠군.”

“늦었어. 지금 바로 일거리를 찾는 건 무리야. 객잔이나 찾지.”

진검백이 앞장서서 걷자 갈지혁은 말없이 뒤를 쫓았다. 그는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마을이다. 모두가 술에 취해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될 정도로 모두의 얼굴이 붉어 보인다.

객잔을 찾아 걸어가던 갈지혁이 갑자기 진검백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래?”

진검백은 어깨를 잡은 갈지혁의 손을 때어 내며 물었다. 그가 말없이 손가락으로 큰집의 담벼락을 가리켰다. 갈지혁이 가리킨 것이 벽보라는 걸 확인한 진검백은 천천히 다가가 그것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벽보의 내용을 다 읽은 진검백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인을 구한다? 보수도 상당하고…….”

“그리 오랜 시간 할 일도 아니니 적당한 것 같은데? 네 생각은?”

“다 좋은데 말이야 무슨 일인지 나오지 않았어. 뭔가 비밀스러운 냄새가 나는데.”

“그런 거야 상관없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 나는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그도 그렇군. 이 일을 하려고?”

갈지혁은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진검백은 벽보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훑었다. 딱히 이상한 것도 없고, 이 집의 주인이 내건 일인 것 같다.이 정도의 집의 소유자라면 마을에서 이미 알려진 자일 테니 딱히 수상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래도 무엇인가 감추고 있는 듯해서 꺼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진검백은 곧 웃었다.

그게 무슨 일이든 상관없지 않는가. 갈지혁 정도라면 그것이 어떠한 일이라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게다.

“아직 뽑고 있으니 날이 밝으면 찾아오자.”

“그렇게 하지.”

“아마 꽤나 많은 사람이 모일 텐데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럼 화산파로 돌아가서 기본부터 배워. 겨우 이 정도에서 떨어질 놈이라면.”

“큭! 한 방 먹었군그래. 핫핫!”

진검백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웃음을 멈추고 집을 슬쩍 훑어봤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을 대비해 건물의 구조 정도는 확실히 봐두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뒤를 쫓고 있는 약선문의 무인들을 바라본 후에 말했다.

“저 친구들도 고생이야. 하필이면 널 따라다니니.”

진검백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다. 고생문이 훤하게 열린 저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신풍에는 예상외로 거부가 많다.

술이라는 게 어떻게든 돈과 연결이 되어 그것을 잘 이용한 사람들은 큰 부를 얻곤 했다. 술로 유명한 신풍에 그런 거부들이 없을 턱이 없다. 그리고 오늘 갈지혁과 진검백이 가고자 하는 곳도 그런 부류 중 하나다.

거부 문우령(雯佑嶺). 신풍의 상권을 장악했고, 일 년에 벌어들이는 돈이 이 마을 전체 수입의 반 정도라고 하니 이미 할 말은 다 한 것 아닌가. 신풍에서 그의 손길이 안 닿는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신풍 내에서 꽤나 인정이 많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능력도 있고, 사람을 도울 줄도 아는 자라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를 말하곤 한다. 그리고 그 외에도 문우령에 대한 자잘한 이야기들이 종이에는 가득 적혀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갈지혁이 알 리가 없다. 그는 약선문의 무인이 건네는 서찰을 받고서야 알게 된 것들이다.

“아가씨께서.”

“…….”

서찰을 다 읽은 갈지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운하연의 도움만은 피하고 싶은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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