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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35화 (35/200)

# 35

10화

문우령의 거처의 하루는 별반 다를 게 없이 지나갔다. 교대로 움직인 탓에 오전에는 잠을 자거나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해가 질 무렵부터면 창고를 지키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그렇게 삼 일째가 되자 모두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문우령의 거처는 창고까지 다가오는 길 또한 경비가 삼엄하다.

이미 그쪽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는 생각 탓이다. 그랬기에 긴장이 풀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 일을 하기로 한 것은 사 일이다. 아무런 일도 없어 지루할 정도의 이 일이 내일이면 끝나는 것이다.

진검백은 지루한 일이 끝나간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기쁜 모양이다. 그는 오히려 일이 터졌으면 하고 바라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삼 일째의 밤도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문우령의 거처에 있는 수많은 무인들이 눈을 빛내면서 창고를 지켰다.

“지루한데.”

진검백은 중얼거리면서 창고를 바라봤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낮에도 문우령의 거처는 침묵이 감돌았다. 수많은 상인들이 오가는데도 불구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보다는 절제된 듯한 느낌이 더 크다.

모두가 방심을 하던 그때였다.

“불이다!”

장백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멀리에서 불이 일고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밤을 밝히기에는 충분했다. 모두가 그쪽으로 움직이려 할 때 진검백이 소리쳤다.

“자리를 뜨지 마라!”

움직이려던 네 명의 무인들이 멈칫 했다. 은연중에 그들은 진검백에게 눌려 있는 형편이었다. 장백을 단숨에 쓰러트린 그의 무위는 이 안에서 아무도 상대할 자가 없었다.

진검백의 눈에서 무서운 기광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맡은 일은 이 창고를 지키는 일이다. 저쪽은 다른 놈들이 맡아.

우린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된다.”

“제엔장! 도둑놈을 잡으면 몇 배나 되는 돈을 준다고.”

“그렇지만 괜히 그곳을 갔다가 이쪽에 일이 생기면 네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지.”

고함을 질렀던 도를 쓰는 무인은 진검백의 말에 찔끔하고는 꺼냈던 자신의 병기를 집어넣었다.

갈지혁이 천천히 기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때면서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화적산(火迪酸)…….”

진검백은 갈지혁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갈지혁이 단순하게 말했다.

“독의 일종이야. 우습게도 물을 이용해 불을 갑작스럽게 터지게 하는 효과를 가진.”

“어떻게 안 거지?”

“냄새가 나.”

갈지혁은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진검백으로서는 단순히 그리 생각할 수만도 없다.

진검백의 코에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토록 단련된 무인인 진검백이 느끼지 못했다는 건 자신 또한 이런 독에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독을 모르는 애송이야. 그저 흉내나 조금 내는 수준?”

“이유는?”

“바람을 등져야하는데 오히려 마주섰어. 독을 쓰는 자의 기본이지.”

갈지혁은 불이 나는 곳을 바라보다 계속해서 말했다.

“불은 곧 꺼질 거다. 시선을 끌어들이기 위해 쓴 모양이군. 화적산으로 인해 붙은 불은 곧 꺼지거든.”

갈지혁의 말을 듣고 모두가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불이 천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무인들은 모두 갈지혁을 바라봤다. 그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입이 열린 것은 진검백이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計).”

병법의 하나로 자주 이용되는 것의 하나다. 동쪽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상은 서쪽을 공격한다는 것.

문제는 동쪽은 알았지만 진짜 목표인 서쪽을 알아내는 것이다.

어느 쪽일까?

진검백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펑!

뒤쪽 창고에서 무서운 폭음이 울렸다. 창고를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제일 먼저 창고에 도착한 것은 갈지혁이었다. 다른 방향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은 대부분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간 탓에 창고에 온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창고 안은 이미 쑥대밭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모두 터져 나갔다. 무인들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이 안에 그들이 그토록 지켜야 할 물건이 있지 않은가.

갈지혁은 말없이 벽을 만져보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화약은 안에서 터졌다. 벽이 너무 두꺼웠던 탓에 잘 밀폐된 창고에서는 화약 냄새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화약을 터트린 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화약을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자라면 오히려 물건을 훔치고 가는 게 나을 게다.

그리고 이렇게 건물 안을 터트려야 했을 필요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쪽에 시선을 집중하게끔 하는 꼴이 되니.

이런 경우에 나오는 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모든 일을 끝마치고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아니면 이것 또한 성동격서의 계에 불과하다면…….

‘애초부터 이곳엔 물건이 없었다?’

갈지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곳을 지키게 함으로서 눈을 돌리게 하고 정작 그 물건은 이곳의 주인인 문우령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가 알아냈다면 지금 같은 일을 벌인 것도 가능하다.

갈지혁은 아까 불이 났던 곳과 지금 창고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한 부근을 바라봤다. 그는 옆에 서 있는 무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큭! 뭐, 뭐야!”

“저쪽. 저쪽에 뭐가 있냐?”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이 손 놓지 못…….”

고함을 지르던 무인은 갈지혁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머리카락으로 가린 얼굴이 왠지 모르게 상대를 압도한다. 잠시 멍하니 있던 사내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때맞춰 갈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가 있냐고 물었다.”

“따, 딱히 중요한 것은 없다. 그냥 이곳의 주인인 문우령의 식솔들이 머무는…….”

“칫.”

갈지혁은 끝까지 말도 듣지 않고 멱살을 놓았다. 사내는 켁켁거리면서 목을 움켜쥐었다. 갈지혁의 아귀힘에 숨이 막혔다.

진검백은 갈지혁을 보고 있다가 이내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갈지혁이 허튼 짓을 하는 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아는 탓에 이미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지.”

진검백이 갈지혁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들의 일이 이곳을 지키는 거라고는 하지만 이미 창고는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줄 사람이 죽어서는 완전 헛고생만 한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어설프게 독을 쓴 것이 갈지혁의 심기를 건드렸다.

진검백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갈지혁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몸이 문우령의 거처가 있는 쪽으로 화살처럼 쏘아졌다.

그리고 그 뒤를 진검백이 빠른 속도로 쫓기 시작했다.

문우령의 거처까지 가는 길은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많은 무인들이 양쪽으로 갈라진 탓에 정작 문우령의 거처는 텅텅 빈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갈지혁은 단숨에 눈앞에 있는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문우령의 거처일 거라는 확신이 섰다.

주변에 있는 건물과는 그 크기와 위용부터가 다르다. 갈지혁의 옆에 선 진검백이 조용히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화산파의 매화검수. 검광(劍狂)이라고 불리던 진검백의 눈이 가라앉았다.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한 여인과 어려 보이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 둘은 덜덜 떨면서 구석에 몸을 감추고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진검백이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둘은 몸을 움츠렸다.

진검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문 대협은 어디 계십니까?”

“모, 몰라요.”

여인은 크게 도리질 쳤다. 나이를 먹긴 했지만 꽤나 미색을 지닌 여인이다.

아마도 문우령의 아내일 게다. 그리고 이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그의 아들일 테고. 아이는 막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휴우.”

진검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우령의 아내는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너무 뻔히 드러났다. 진검백은 감췄던 소매를 보이며 말했다.

“화산파입니다.”

“아!”

여인의 눈이 일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이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죽어 가는 목소리로 여인이 말했다. 진검백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물었다.

“도와주러 온 겁니다. 어디 계십니까?”

“저, 저쪽에…….”

여인이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진검백은 그곳에 침상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말없이 서 있던 갈지혁이 발로 침상을 밀어냈다. 그러자 아래에는 통로로 보이는 듯한 입구가 있었다.

“저곳 맞습니까?”

“맞아요. 제발 제 남편을 살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우선 서둘러 보죠.”

말을 마친 진검백은 갈지혁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갈지혁은 그 통로 안으로 움직였다. 그 뒤를 진검백은 급히 쫓았다.

통로의 계단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계단에서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 둘은 안력을 돋워 주변을 살폈다.

조용하지만 미약하게나마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이 동굴의 길이가 상당한 모양이다. 둘은 급히 몸을 움직였다.

동굴인데도 불구하고 둘의 다리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만큼 둘의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다. 긴 동굴이 끝날 갈 무렵 눈앞에는 커다란 장소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낯이 익은 자가 있었다.

갈지혁과 진검백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상대방 또한 놀란 모양이다.

이미 문우령은 다리가 꺾인 상태였다. 그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반면 상대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문제는 문우령을 그리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자 또한 낯이 익다는 거다.

“이거 참.”

진검백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눈앞에 있는 자가 자신과 함께 이곳에 들어왔던 발 빠른 사내임을 알아차린 탓이다.

진검백이 서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발 빠르던 사내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는 이곳에 와서 별반 말도 하지 않고 내성적인 모습을 보였었다. 그렇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그것들은 모두 거짓이었던 모양이다.

인상은 평범하고, 왠지 모르게 착해 보이는 외모에 모두가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은 듯하다.

진검백은 슬쩍 문우령의 앞에 섰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살초를 막아 내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발 빠른 사내는 그런 진검백의 행동을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

“갑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몰랐어. 언제 사라진 거냐?”

“창고가 터진 직후.”

“그래. 너 정도의 경공이라면 그 이후 이곳까지는 금방 이었겠지.”

분명 사내 또한 그때 모든 실력을 보인 게 아닐 게다. 그 정도라면 능히 이곳에 나타나 문우령을 쓰러트리고도 남을 시간이다.

물론 그가 문우령을 훨씬 웃도는 고수일 때나 가능한 일이지만.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볼 때는 분명 사내는 문우령을 훨씬 웃도는 고수다.

기껏해야 검을 겨룬 지 반각도 되지 않았을 터다. 그런데도 이렇게 월등하게 기운 것을 보면 그 정도야 쉽게 알 수 있다.

“뭐 하는 놈이냐?”

진검백의 물음에 사내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가 말했다.

“알아맞춰 봐.”

“좀도둑놈.”

“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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