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11화
말과 함께 한 자루의 비수가 진검백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진검백의 몸이 휙하고 돌더니 비수를 쳐냈다.
탁!
사내가 자신에게 다시금 날아온 비수를 잡아내며 기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상보다 진검백의 실력이 빼어난 탓이다.
그가 물었다.
“뭐야? 왜 너 같은 놈이 여기서 돈 받고 일을 하려는 거지?”
“돈이 필요해서.”
“그럼 돈이나 받지 왜 여길 와. 죽으려고 환장한 건가? 아니면 의협심이 넘쳐서?”
“둘 다 틀렸어.”
사내의 손위에 들린 비수가 슬쩍 슬쩍 움직였다. 빈틈이 노리면 당장이라도 파고 들 기색이다. 사내가 경고를 하는 듯이 말했다.
“조심해. 이 비수는 눈이 없거든.”
“원한다면 상대해 주지.”
진검백이 기수식을 취하자 사내 또한 손가락 사이사이에 온통 비수를 꼽았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폭발하려는 듯한 기세다.
슬쩍 사내가 소매를 흔드는 순간 진검백의 표정이 꿈틀했다. 그의 소매에서 빠져 나오는 무엇인가를 본 탓이다. 순간 암기인가 했지만 이내 진검백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때였다.
진검백의 앞을 막아서며 갈지혁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날아들던 가루가 급히 방향을 선회하며 땅에 떨어져 내렸다.
갈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독인이 얕보이는 것이다.”
“넌…….”
사내는 갈지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눈에 단연 돋보이는 진검백과는 달리 갈지혁은 조용히 서서 항상 모두를 응시하곤 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런 그의 중압감이 이상하게도 더욱 크게 느껴지곤 했다.
그는 말없이 암기를 쥐었다.
독분을 가볍게 휘젓는 것을 보니 독에 일가견도 있는 모양이다. 갈지혁이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넌 독을 얕봤어. 진짜 독이 어떤 건지 보여 주지.”
차갑게 터져 나온 갈지혁의 말에 사내는 슬쩍 거부 문우령을 바라봤다. 거리는 삼 장 정도. 살수를 펼친다면 충분히 목숨을 거둘 수도 있는 거리다.
‘벨까?’
사내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앞에 있는 갈지혁을 상대해야 한다. 사내는 갈지혁이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다리를 믿었다. 그리고 손에 들린 짧은 비수도 믿는다.
필요하다면 몸에 감추고 있는 모든 비수를 쏟아 내면서 도망치면 그만이다.
아니, 그 비수를 모두 쏟아 내는 순간 이미 이 근방에 있는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사내가 다리를 슬쩍 움직였다.
갈지혁은 사내의 움직임에 맞추며 걷기 시작했다. 몸을 꼿꼿이 세운 채로 갈지혁은 무섭게 상대를 노려봤다. 머리카락 사이로 갈지혁의 눈이 빛났다.
암기를 쓰는 상대. 조금이라도 틈을 보였다가는 당하고야 만다. 기습적인 공격에 용이한 비수는 검보다 위협적이기도 하다.
갈지혁을 바라보던 사내가 먼저 움직였다.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듯하더니 이내 옆에서 비수가 날아들었다. 갈지혁은 발을 휘둘렀다.
탕!
갈지혁의 발에 맞은 비수가 공중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솟구쳤다. 그리고 그 비수가 떨어지기도 전에 사내의 몸이 갈지혁에게 가까이 파고들었다.
사내는 갈지혁이 어느 정도 독에 대해 알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 근접전을 벌이는 것이 유리하다. 더구나 자신의 병기는 짧은 비수가 아닌가.
짧은 비수에서 날카로운 빛이 발하며 쏜살같이 갈지혁의 허리를 노렸다.
그때 갈지혁의 다리가 움직였다.
“헛!”
사내는 급히 뒤로 물러서면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갈지혁이 독이 아닌 무공에도 능숙한 것을 몰랐기에 너무 성급하게 다가섰다.
다리로 거리를 벌리기 무섭게 한 발 내딛는 갈지혁의 손바닥이 순간 녹색으로 물들었다.
퍽!
갈지혁의 공격에 사내는 다리를 휘청이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입가를 타고 피가 흘러나왔다.
“웩!”
그는 소매로 입을 슬쩍 훑었다. 사내는 공격을 당했던 가슴 부분의 옷에 손을 넣었다. 가슴에 대고 있던 커다란 쇠붙이가 아니었다면 이번 공격에 완전히 무너져 버렸을 게다. 그는 쇠붙이를 꺼내 들고 슬쩍 보고는 갈지혁을 향해 집어던졌다.
내공이 실린 일격이었지만 갈지혁의 소매에서 이는 바람에 바로 방향이 비틀렸다.
실패했지만 발 빠른 사내의 얼굴에 아쉬움 같은 건 없었다. 애초부터 그 공격이 갈지혁을 노렸던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버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목표를 달성한 사내는 숨을 돌릴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는 앞에 있는 갈지혁의 공격을 피해야만 했다.
갈지혁의 손가락 끝에서 터져 나온 지공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칫! 귀찮은!’
몸을 뒤로 확 꺾으며 지공을 피해 내긴 했지만 사내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갈지혁은 상당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였다. 근접전을 펼치기도 수월치 않고 그렇다고 거리를 줄 수도 없다. 잘은 모르지만 독을 쓴다면 거리를 준다는 것은 언제든 독에 당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지만 위력적인 장법에 쉽게 다가설 수도 없다.
‘필살초다.’
사내는 마음을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괜한 공격은 오히려 자신에게 위험할 뿐이다. 차라리 필살의 초식을 쏟아 내리라.
시간을 준다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의 절기를 준비했다. 몸 곳곳에 숨겨 둔 비수를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터트려 내는 것이다. 주변 오 장 이상은 비수로 뒤덮이리라. 상대가 빠져나갈 틈도 없이 사방으로 비산(飛散)하는 비수는 모든 생명을 앗아갈 게 분명하다.
그는 손을 앞으로 쭉 폈다. 이것은 단순히 비수만이 전부인 공격이 아니다.
먼저 독분을 뿌려 상대의 다리를 묶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비수를 산개하는 것이 바로 진풍비도술(鎭風飛刀術)의 절초인 진풍만개(鎭風滿開)다.
쭉 펴진 사내의 손끝이 소매로 향했다. 소매 끝에 달려 있는 이 자그마한 줄만 잡아당기면 바로 독분이 터져 나간다. 독을 사용하는 방법도 어렵지 않고, 성공 확률도 높다.
그의 손끝에 얇은 실 같은 줄이 닿았다.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그는 줄을 잡아당기려 했다.
그때였다.
“엉성한 장치야. 독분이라도 뿌릴 생각인가?”
갈지혁의 한 마디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어도 상대에게 한 수를 읽혔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태에서는 왠지 모르게 몸이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는다. 필살의 초식인 만큼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그런데…….
‘제길, 겁을 먹어서 뭘 하겠다는 거냐!’
자신 있게 펼쳐야 할 필살의 초식인데 오히려 망설이는 모습에 그는 속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상대는 겨우 한 수를 읽었을 뿐이다. 실전에서 그 후의 공격을 읽힌다는 것은 치명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성공한다. 자신감만 가진다면…….’
왠지 모를 불안한 기분이 몸을 엄습했지만 그는 애써 부정했다.
갈지혁은 사내를 바라보다가 뒤에 서 있는 진검백을 향해 말했다.
“뒤로 물러서. 독분이 날아올 거다.”
“그러지.”
진검백은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다친 문우령을 부축하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런 진검백을 막지 않았다. 아니, 막을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갈지혁을 상대하는 것도 그에겐 버거웠던 것이다.
‘천천히. 한 놈씩.’
사내는 마음을 다잡듯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모두 죽이면 그만 아닌가. 할 수 있다.
적어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다면 이 두 다리가 있다. 도망친다면 설령 그게 누구라 해도 상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림에서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전광무영(電光無影)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 잡히지 않을 게다.
이미 읽혔다 하지만 다른 수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소매 끝에 달린 조그만 실을 잡아당겼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무색의 독분이 흘러 나왔다.
“하압!”
사내는 고함 소리와 함께 손바닥을 쫙 펴고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거센 바람이 터져 나오며 독분이 갈지혁을 향해 쏟아졌다. 그는 독분이 넓게 퍼지지 않고 갈지혁 하나만을 향하게 손을 쓴 것이다.
심혈을 기울인 공격이거늘 갈지혁은 태연히 그 모습을 바라만 봤다. 독분이 날아들었지만 갈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독분이 갈지혁을 감싸 안는 순간 사내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이렇게 쉽게 상대가 당할 줄은 몰랐다. 성공 확률은 반의 반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움직이지도 않고 독분을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진풍비도술의 필살초인 진풍만개를 펼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이 독분만으로도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사내는 급히 절초를 펼치려다가 몸을 멈췄다. 독분 속에 서 있는 갈지혁의 안색이 너무나 편안해 보인다.
‘실패?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독분 안에서 갈지혁이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내의 머릿속에 믿어지지 않는 단어가 떠올랐다.
“마, 만독불침지체(萬毒不侵之體)!”
모든 독이 피해간다는 신체, 말로만 들었지 그런 신체를 직접 본 적은 없다. 사내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착각일 게다.
한눈에 봐도 젊다는 것이 확 느껴지는 자다. 그런 자가 말로만 회자되는 경지인 만독불침지체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늦었지만 이미 시작된 싸움이다. 멈출 수 없다.
“죽엇!”
고함과 함께 사내는 진풍만개를 펼쳤다. 소매를 비롯해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비수들이 갈지혁의 몸을 꿰뚫을 게다. 독은 실패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손을 들어 올리던 사내의 다리가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큭!”
그는 급히 무릎을 땅에 대면서 쓰러지는 것은 면했지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의아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독을 만져 본 그는 단박에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중독된 것이다. 독에.
“언제…….”
“언제 독에 당했냐고 묻고 싶은 거냐?”
갈지혁은 사내를 차갑게 바라봤다. 독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자다.
갈지혁이 보기에 그는 독을 그저 살상의 용도로만 생각하는 애송이일 뿐이다. 진짜 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갈지혁이 입을 열면서 말을 내뱉었다.
“내 앞에서는 숨을 쉬어서도 안 돼. 눈을 감아서도 안 돼. 입을 여는 건 물론이 안 되지. 피부에 있는 구멍까지도 막기 전까지는 넌 날 못 이겨. 왜냐하면 너와 달리 난 진짜 독인이니까.”
갈지혁의 말에 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다.
비록 갈지혁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왠지 모를 무게와 함께 사내를 내리누르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움직이지 않아.’
다리를 강하게 눌렀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다리가 마치 돌덩이라도 된 냥 무겁기만 하다. 들어 올리려고 힘을 주던 사내는 이내 갈지혁을 노려봤다.
애초부터 노렸던 것이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적어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정 안 되면 도망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도망치는 거라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슨 독인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름대로 독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독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