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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37화 (37/200)

# 37

12화

“도망칠 생각이었겠지만 불가능할 걸.”

“후, 후후!”

사내가 웃었다. 거짓된 것이 아닌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미소가 사내의 입가에 걸렸다. 갈지혁은 그런 그를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슬쩍 비치는 갈지혁의 눈은 날카로웠다.

“설마 내가 이곳에서 죽을 줄이야…….”

사내의 자조적인 목소리, 갈지혁은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발 내디뎠다.

순간,

쒜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내의 가슴에 검이 틀어박혔다. 그는 입가에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갈지혁이 급히 고개를 돌리며 손을 휘둘렀다.

파파팍!

손가락 끝에서 터져 나온 지공이 허공을 갈랐다. 갈지혁이 노린 곳은 방금 검이 날아온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급히 몸을 움직였다.

지공은 빗나갔지만 갈지혁은 그대로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갈지혁의 손이 정체불명의 인물의 옷을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발이 정확하게 뒤로 뻗어지면서 갈지혁을 걷어찼다.

“윽!”

갈지혁은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면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무릎을 꿇은 갈지혁의 앞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온통 검은색 천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탓에 눈이나 간신히 보이는 것이 전부다.

“넌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누……구냐.”

“알 것 없다.”

괴인은 죽어서 쓰러진 사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품 안에서 상자 하나가 빠져나와 괴인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막 괴인을 향해 검을 출수하려던 진검백조차 그 광경에 멈칫 하고야 말았다. 진검백은 빼려던 검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허공섭물이로군.’

저 정도의 고수라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 이길 자신도 없긴 하지만 무엇보다 괜히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없는 탓이다.

진검백은 물러섰지만 갈지혁은 아니었다. 갈지혁은 멍청이가 아니다. 괜한 확률도 없는 싸움을 할 생각도 전혀 없다. 단 일격이긴 했지만 발에 실린 내공이 보통을 넘어 선다. 그냥 싸운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갈지혁은 무인이 아니다.

‘나는 독인이다.’

이 정도의 상대를 만날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기에 많은 독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괴인은 사내의 품에서 나온 상자를 자신의 품 안으로 넣었다. 그는 힐끔 갈지혁을 바라봤다. 꿈틀거리면서 일어서는 갈지혁을 보며 괴인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꼬맹아, 운 좋은 줄 알아라. 감히 내 모습을 드러내게 한 것만으로도 넌 죽어 마땅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 살려 주는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 그럼 내가 죽을 때는 언제지?”

갈지혁의 말에 괴인의 복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아마도 피식 하고 비웃음이라도 흘린 모양이다.

괴인은 비웃음을 흘림과 동시에 품 안에 있던 무엇인가를 죽어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던졌다. 던진 것이 사내의 몸에 닿는 순간 붉은 화염이 일었다.

화염은 순식간에 사내의 몸을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고서 사그라졌다.

남은 건 가슴에 박혔던 검뿐. 신기하게도 그 화염은 사내만을 태웠을 뿐 검은 마치 새것인 마냥 멀쩡해 보였다.

아마도 사내는 자신의 죽음을 알았을 게다. 그랬기에 그 같은 미소를 띠었을 테고. 그렇다면 사내와 지금 괴인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둘 모두 저 상자를 노리고 나타난 것이고.

“언제가 죽을 때냐고 물었지?”

사라진 사내가 있던 곳을 바라보던 괴인이 말했다. 갈지혁은 대답 없이 그를 응시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갈지혁은 알 수 있다. 방금 전 사내를 한 줌의 재로 만든 것은 분명 독이다.

화염이 일었다고 해서 독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갈지혁의 판단은 틀리지 않을 게다. 저만한 독과 이만한 무공이라면…….

‘이자는…… 독인이야.’

갈지혁은 독을 뿌리려던 손을 멈췄다. 독인에도 등급이 있지만 앞에 있는 자는 상당한 경지에 오른 자다. 아무런 독이나 뿌린다고 해서 중독시킬 수 없는 것이다.

“조만간. 멀지 않은 훗날 네놈은 죽을 거다. 내가 장담하지.”

“누가 날 죽인다는 거지?”

갈지혁은 일부러 말을 끌었다. 적어도 이자의 정체만은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괴인이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모르지 그게 누가 될지는. 아, 네놈을 죽이러 오는 게 나일지도 몰라. 중요한 건 다른 건 필요 없다는 거야. 단 한 가지만 알아 두면 돼. 넌 죽어. 반드시.”

말을 마친 괴인은 갈지혁이 무슨 말을 더 하기도 전에 밖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자 진검백과 갈지혁은 서로를 바라봤다.

진검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리야. 정체는 모르겠지만…… 우리 장문인이 온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어.”

갈지혁은 계속해서 그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왠지 알 것도 같은데 애매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진검백은 자신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문우령을 힐끔 바라봤다. 거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옷은 넝마가 되어 있다. 부축을 받고 있는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상처 탓도 있지만 아마도 잃어버린 물건 탓이리라.

“괜찮습니까?”

“괘, 괜찮네.”

대답은 하고 있지만 이미 그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만큼 그 물건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고.

“물건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 같은 고수가 노리는 겁니까?”

“화, 황실의 물건이었네. 그걸 잃어버렸으니 크, 큰일이군. 어떻게든 해야지. 어쨌든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맙네. 그리고 난 괜찮으니 둘이 가서 문진학을 불러 주겠는가? 자네들이 이곳에 들어올 때 실력을 점검한 그자 말이야.”

“그리하죠.”

말을 마친 진검백은 갈지혁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 신호에 갈지혁은 말없이 진검백을 따라 걸었다.

동굴을 거슬러 걸어가던 중 진검백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어. 황실의 물건이라면 굳이 우리 같은 낭인 무사들을 뽑을 필요는 없었겠지. 황실에서 무인들을 보내 줬을 테니까.”

“상관없지.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니까.”

“그것도 그렇군. 신경 꺼야겠어.”

진검백은 말을 마치고 깍지를 낀 손으로 기지개를 폈다. 태평하게 하품을 하는 진검백과 달리 갈지혁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상관없다고 말은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건에 관해서 이야기다.

그 정체불명의 괴한은 별개다.

갈지혁에게 죽을 거라고 말했다. 분명 그자 또한 갈지혁을 알고 있는 자이리라. 갈지혁은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아직도 그에게 맞은 가슴이 욱신거린다.

욱신거리는 통증처럼 무엇인가가 생각날 듯 말 듯 왔다 갔다 한다.

‘누구냐.’

속으로 중얼거리며 갈지혁은 계속해서 동굴을 걸었다.

왠지 모를 불안한 느낌이 연신 몸을 감싸왔다.

문우령의 거처는 침묵에 잠겼다.

셀 수도 없이 오가던 상인들도 발길이 끊겼고, 시끌벅적한 소리도 사라졌다. 외부에서 온 대부분의 객들은 문우령의 거처에서 나갔다. 심지어 하인과 시녀들조차 제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함부로 나돌아 다니지 말라는 명이 내려진 탓이다.

깊은 침묵이 감도니 마치 누군가가 죽기라도 한 듯하다.

고용되었던 대부분의 무인들은 돌아갔지만 갈지혁과 진검백은 문우령의 거처에 있었다. 원래는 그 둘 또한 다른 무인들과 함께 보수를 받고 이곳을 나가려 했지만 갑작스럽게 문우령이 보낸 서신 탓에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이다.

갈지혁은 귀찮은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그의 청을 받아들여야 했다. 보수도 보수지만 진검백 탓이다. 그가 문우령의 아내에게 화산파의 표식인 매화를 보였다. 그걸 보인 이상 진검백이라는 존재 자체가 화산파라고 봐도 무방하다.

진검백은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없으니 상당히 지루한 모양이다. 평소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가만히 앉아 있던 진검백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쉬익!

허리에 차여 있던 검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검끝에서 하얀 섬광이 터져 나왔다.

검은 화병(花甁)에 꼽혀 있던 꽃 앞에서 멈추었다. 그런데 진검백이 천천히 검을 거두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멀쩡했던 꽃잎들이 갑작스럽게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분홍색의 꽃잎이 방 안을 가득 채우며 휘몰아쳤다. 꽃잎이 땅에 모두 내려앉자 진검백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때?”

“심심한 모양이군. 평소에 잘 뽑지도 않는 검을 뽑는 걸 보니.”

“후후. 잔재주 하나 부려 본 것뿐이야.”

말을 하면서 진검백은 갈지혁을 살폈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에 만난 자 중 최고라고 자부해도 될 정도의 상대다.

진검백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는 사내다. 자신의 재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검을 쥐었다. 그렇지만 앞에 있는 갈지혁은 그런 자신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자다.

문우령의 거처에서 화염에 휩싸여 죽은 사내가 한 말을 진검백은 놓치지 않았다. 분명 만독불침지체(萬毒不侵之體)라고 했다.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진검백이 왜 모르겠는가.

독을 쓰는 자들의 입에서나 전해지는 단계로 모든 독들이 피해간다는 신체다. 입으로 전해지는 정도라면 그만큼 그 경지에 오른다는 것이 꿈같은 일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갈지혁은 만독불침지체일 게다.

서른도 되지 않은 사내가 독을 쓰는 자들의 입에 회자는 전설의 단계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갈지혁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정체불명의 괴인.

갈지혁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가 분명 있었다. 갈지혁을 아는 듯도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진검백은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갈지혁을 살필 뿐이다.

그 일이 벌어진 지 벌써 삼 일이 흘렀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갈지혁이지만 그 날 이후 더욱 그는 말을 아꼈다. 대신 갈지혁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슬슬 짜증이 나는군. 언제까지 묶어 둘 생각이지.”

“거야 나도 모르지.”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렇게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 떠나 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화산과 마찰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아직 화산은 갈지혁이 건드릴 부분이 아니다.

“왜 묶어 두는지 모르겠군. 귀찮은 일에 연루될 마음은 없…….”

말을 하던 갈지혁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진검백 또한 아무런 말도 없이 빼 들었던 검을 허리에 찼다. 그때 문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는가?”

“마음대로 하시죠.”

진검백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이 열리면서 문진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다가 갑작스럽게 표정이 굳어졌다. 엉망이 되어 버린 방 탓이다.

“이, 이건…….”

“뭐 별일 아닙니다. 그나저나 저희가 이곳에서 꽤 오랫동안 있었는데 이제 슬슬 그 이유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찾아 온 것이네. 지금 둘 모두 문우령 어르신께서 부르시니 같이 가지.”

진검백이 바라보자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은 일이라면 빨리 해결하고 이곳을 나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탓에 아무런 말도 없이 수긍한 것이다.

문진학이 밖을 향해 걷자 그 뒤를 둘은 말없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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