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13화
한참을 말없이 걷던 문진학이 말했다.
“둘 모두 대단한 고수라고 하더군. 어르신께서 그 정도로 말할 정도라면 대단한 것인데 왜 낭인 무사에 지원을 했는가. 자네들 정도라면 부르는 곳도 많을 텐데.”
“급히 돈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진검백이 답했다. 그는 필요한 말만 딱 해 버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문우령이라는 자는 거짓말을 했다. 황실에 보낼 물건이라고 했지만 진검백이 추측하기로는 결코 아니다. 거짓을 말하는 자에게 많은 것을 내보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적이라면 그것은 크나큰 치부가 될 테니까.
“허허, 화산파의 무인이 돈이 필요해? 재미있군.”
“제가 아니라 이 친구가 말입니다.”
“아, 그런가? 갈지혁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만.”
갈지혁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부터 갈지혁을 눈여겨보고 있던 문진학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사문이 어딘가?”
“꼭 말해야 합니까?”
“이런 괜한 걸 물은 듯하군.”
문진학은 영리한 자다. 갈지혁의 목소리의 높낮이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기분을 간파해 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갈지혁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던 문진학은 생각을 바꿨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알아내야 할 것도 불가능해질 것 같다.
문진학은 스리슬쩍 말꼬리를 진검백에게로 돌렸다. 화산파의 무인답게 진검백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며 대답했다. 그렇게 걷던 중 마침내 문우령의 거처에 도착하게 되었다.
문진학이 앞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에게 물러가라는 듯 양쪽으로 손을 흔들고서야 말했다.
“자네들 덕분에 어르신이 목숨을 구했네. 그 점 깊이 감사하지. 그리고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자네들을 부른 거네. 부담 갖지 않아 주었으면 하네.”
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문진학은 먼저 올라서서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들어들 오게.”
갈지혁과 진검백은 성큼 돌계단을 밟으며 위로 올라섰다. 안에는 침상에 누워 있는 문우령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반갑다는 듯이 인사를 건넸다.
“힘든 걸음 했구만.”
“아닙니다.”
진검백은 가볍게 답하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방은 며칠 전의 일은 거짓이었다는 듯 너무나 깨끗했다. 그때 갈지혁이 말했다.
“저희를 이곳에 있게끔 한 이유가 뭡니까.”
“허허, 성격이 급한 친구로군. 먼저 자리에 앉아서…….”
“그럴 여유는 없습니다.”
문우령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문우령은 표정을 풀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거참 성격이 급하군그래. 알겠네. 나 또한 자네들을 이리 묶어 놓아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네.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그럼 우선들 앉게.”
문우령은 자신의 침상과 마주하고 있는 의자를 가리켰고, 갈지혁과 진검백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둘의 앞으로 시비가 차를 가져다 놓고 사라졌다.
진검백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들어 올려 그 향기를 맡았다. 그 모습이 사뭇 차를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학사와도 같았다. 눈으로 보고 코로 향기를 맡으며 혀는 그 짙은 맛을 음미한다.
문우령이 말했다.
“향기가 좋지 않은가?”
“좋군요. 꽤나 명차(名茶)인 것 같습니다.”
“자네는 차를 꽤나 즐길 줄 아는 듯하이.”
갈지혁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눈이 슬쩍 감겼다.
“몽정감로차(蒙頂甘露茶).”
“호오? 차에 대해 잘 아는군그래.”
갈지혁이 단박에 차의 이름을 알아맞히자 문우령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적어도 갈지혁의 외향을 보면 차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차를 마실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다만 찻잎을 먹어 본 적 있었을 뿐.”
“몽정감로차는 네 번 볶고 세 번 비비고 한 번 말리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꽤나 많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 정도라면 기본적으로 찻잎을 먹어 봤다 해도 그 맛이 변해도 수십 번은 변했을 게다. 하지만 갈지혁은 무덤덤했다.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몇 가지를 묻고 싶어서네. 그랬기에 실례인 줄 알면서 이곳에 머물게 했네. 그것은 내가 사과하지.”
“저희에게 무엇을 묻고 싶다는 겁니까?”
진검백이 되묻자 문우령은 옆에 서 있는 문진학을 바라봤다. 그에게 의견을 묻는 듯했다. 문진학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우령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화산파의 무인이라고 들었네. 맞는가?”
“맞습니다. 화산파의 진검백이라고 합니다.”
“화산파의 무인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있는가? 적어도 이 근방에서 화산파가 간여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진검백은 손가락으로 갈지혁을 가리켰다.
문우령과 문진학 모두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해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진검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화산파에서 저를 이 친구의 감시자로 붙였습니다.”
“……진담인가?”
“물론.”
진검백의 말을 믿기가 어려웠는지 문우령은 다시 물었다.
그럴 만도 하다. 분명 둘은 친한 벗처럼 보인다. 그런데 감시하는 입장이라니……. 말도 안 된다. 문우령의 눈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봐도 진검백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 탓이다.
적어도 문우령이 보기에 둘은 감시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모습 같지 않다.
“왜 감시를 한다는 건가?”
“위험한 놈이니까요.”
“위험하다고?”
문우령과 문진학은 갈지혁을 살폈다. 한눈에 보기에도 왠지 모르게 수상하다는 느낌이 가득 풍기는 자이긴 하다. 옷차림도 그렇고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름이 뭔가 자네.”
“갈지혁이라고 합니다만.”
“갈지혁이라면…… 갈지혁?”
문우령은 무엇인가 알아차렸는지 갑작스럽게 갈지혁을 쏘아봤다. 문진학은 그런 문우령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가만있게. 정말로 자네가 갈지혁인가? 구양세가를 단신으로 무너트렸다는 그…….”
“구양세가를 무너트린 적은 없고 가주인 구양진을 이긴 적은 있죠.”
그제야 문진학은 문우령의 반응을 이해했다. 문진학 또한 들은 적이 있다.
뱀을 품 안에 넣고 현재 섬서를 시끄럽게 하는 괴인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이렇게 볼 줄은 몰랐다. 이름은 들어 본 듯한데 설마 저처럼 젊은 사내와 구양세가를 무너트린 자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쉽지 않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자네들 정도 되는 자들이 왜 이곳에서 일을 한 거지?”
“필요한 것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
“좋네. 자네가 진짜 갈지혁이라면 화산파가 자네를 감시하는 걸 믿어 주지.
그렇지만 자네가 갈지혁이라는 걸 증명했으면 하네. 내가 듣기로 뱀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갈지혁이 가만히 발로 땅을 툭 하고 두드리자 발아래에서 갑작스럽게 무엇인가가 튀어 올랐다.
침상에 누워 있던 문우령이 채 반응도 하기 전에 그것은 이미 그의 어깨 위로 올라섰다. 고개를 슬쩍 돌린 문우령의 눈이 커졌다. 초록색의 몸이 다소 얇은 뱀이 그곳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혀를 내밀며 슬쩍 열린 입가에서 날카로운 독아가 빛났다.
“사황아, 돌아와라.”
마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사황은 다시금 갈지혁에게로 돌아가 그의 어깨에 올라탔다. 사황은 매서운 눈을 빛내며 연신 주변을 둘러봤다.
“저, 정말이군.”
“거짓말을 할 정도로 시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묻지. 갈지혁 자네 그 괴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그 괴인?”
“그때 갑작스럽게 나타나 물건을 가져간 자 말일세.”
갈지혁은 검은색으로 몸을 가렸던 괴인을 떠올렸다. 며칠 동안 줄곧 고민했던 일이다. 누구일까 고민했지만 끝끝내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갈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문우령은 집요했다.
“분명 그는 자넬 알았어. 잘 생각해 보게.”
“전혀 모르는 자였습니다. 만약 안다고 해도 복면으로 가려서 알아볼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정말인가? 자네를 아는 듯하던데…….”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갈지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왠지 낯이 익다는 둥의 이야기는 할 마음이 없다. 굳이 그런 것을 문우령에게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왠지 모르게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자다. 모든 것을 보여 줄 필요는 없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가 더 할 말은 없지.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서 그러니 혹시라도 생각이 난다면 말 좀 해 주게.”
“그렇게 하죠. 그럼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음…… 용무는 끝났으니 그래야겠지.”
“보수는?”
“문진학이 챙겨서 줄 거네. 그러니 받아서 가도록 하게. 거처로 돌아가 있게. 곧 사례금을 챙겨서 문진학이 갈 테니.”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검백도 따라서 일어섰다. 둘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문우령의 거처를 벗어났다.
둘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 조금 시간이 흐르자 문진학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냥 보내도 되겠습니까? 무력을 써서라도…….”
“안 돼. 화산파의 무인이 연루되어 있어. 괜히 건드렸다가는…… 우리가 드러날지도 몰라. 그리고 갈지혁이라는 놈 혼자서 구양세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놈이야. 소란 없이 제압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그 물건을 잃어버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알아. 어떻게든 찾아내야겠지. 찾지 못하면…… 그분이 용서치 않을 게야.”
말을 하면서 문우령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적어도 그가 말한 그분이라는 존재는 이 일을 용서치 않을 게다. 시간이 얼마 없다. 그 안에 찾아내지 못하면…… 필사다. 그는 자비를 모르는 자니까.
“돈을 넉넉하게 넣어서 보내. 우선은…… 그냥 보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문진학이 고개를 꾸벅하고는 거처를 벗어났다.
* * *
사천에는 한 가문이 있다.
수많은 문파들이 무너지고 새로 생기는 와중에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가문이 있다. 일반적으로 세가가 흥하기 위해서는 주변과의 많은 교류와 그에 합당한 무공이나 재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가문은 예외다.
사천이라는 무림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몇백 년을 초석(礎石)처럼 꿋꿋이 버텨 온 가문이지만 꽤나 폐쇄적이다. 더군다나 그 정도로 무림에서 있었다면 꽤나 대접을 받을 듯도 한데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다른 세가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탓이다.
사천당문(泗川唐門)!
편법(鞭法)과 금나수(擒拿手)에 능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 무림에서 금지되다시피 한 독을 사용하는 세가다. 그리고 그 탓에 무림에서 은연중에 모멸과 멸시를 받기도 하는 가문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무림의 원로 중 일부는 그런 사천당문이 가장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잘되어 있는 가문이라 말했다.
사천당문은 오대세가의 하나로 칭해지기는 하지만 여타 다른 사대세가에 비해서는 푸대접을 받는 이유도 독을 쓰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꿋꿋이 독에 대한 연구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것은 대대로 사천당문의 가주를 지냈던 자들의 한결같은 자존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