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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40화 (40/200)

# 40

15화

하지만 진검백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갈지혁을 잘 아는 탓이다. 이미 그는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문우령의 거처에서 일을 했던 것도 아마 사천으로 가는 여비를 벌기 위해서일 게다. 그만큼 생각했다면 맘을 바꿀 자가 아니다.

뭘 하려는 걸지 모르지만 당하고만 있을 갈지혁은 아닐 게다. 생각은 가지고 있는 자니까.

“그 지독한 냄새가 바로 가시는 것도 아니고. 잠이나 잘 수 있을지 모르겠군.”

진검백은 말을 돌렸고 갈지혁은 걷었던 옷소매를 바로 했다. 품속에 있던 사황이 차가운 물이 튀었는지 스리슬쩍 기어 나왔다.

“여비는 내가 대주지. 하지만 나중에 갚아야 돼.”

“어이, 분명 문우령이 너에게 준 돈 중 반은 내 거라고. 뭘 갚으라는 거야.”

“네 돈은 이미 재료 사는 데 다 썼고 남은 건 다 내 돈이야.”

갈지혁의 말에 진검백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은근히 장난기가 있으면서도 그걸 또 표현하지 않는다.

“지독한 놈. 그래 내가 나중에 화산파에 돌아가면 그깟 여비, 배로 돌려주지.”

진검백이 입술을 비죽이면서 말하자 갈지혁은 피식 웃었다. 그의 태도가 상당히 웃긴 모양이다.

아침 해가 뜬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진검백은 검 한 자루를 들고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그의 옆에는 작은 짐 하나를 가볍게 멘 갈지혁이 있었다.

둘은 꽤나 오랫동안 생활한 동굴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진검백이 옆에 걷는 갈지혁에게 물었다.

“육로(陸路)로 갈 거냐 아니면 수로(水路)를 탈 생각이냐?”

“수로.”

“그게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도?”

“육로로 가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서.”

그 말에 진검백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대신 그는 손가락으로 뒤편을 툭툭 가리켰다. 그러자 갈지혁이 짧게 말을 툭 내뱉었다.

“맞아.”

지금 이동하는 갈지혁과 진검백의 뒤로 정체불명의 자들이 따라붙었다.

얼마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 정도는 둘 모두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약선문의 운하연의 수하들일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또 그렇다고 보기에는 뭔가 수상한 점이 많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먼저 손을 쓸 생각은 없다.

그랬기에 수로를 택했다. 육로라면 그들은 어떻게든 몸을 감추고 쫓아올 게다. 하지만 수로를 탄다면 그들 또한 결국 몸을 드러내야 할 테니까.

“두근두근한데.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사천, 사천이라…….”

진검백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 * *

사천(泗川)은 무림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그곳은 수많은 무림의 역사들이 써진 땅이요, 또한 앞으로도 그러할 곳이다.

사천에는 무림에서 알아주는 구파일방이 무려 세게나 모여 있다.

신성한 여승(女僧)들만의 성지 아미파(峨嵋派)!

실전적(實戰的)인 무학(武學), 가볍고 표홀한 초식의 점창파(點蒼派)!

도가(道家)의 정통무예(正統武藝)를 익히는 청성파(靑城派)!

그리고 또한 구파일방과는 또 다른 의미의 무력 단체인 오대세가 중 하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사천당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천의 패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사천당문을 빼기 마련이다.

독과 암기하면 그 누구라고 해도 알아주고 오대세가의 하나로 칭해질 정도의 가문이지만 실제로 그들을 사천의 패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사천당문이 오대세가의 하나임을 부정하는 자들도 부지기수라고 해도 될 정도니…….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한낮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 선착장(船着場)에 두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의 모습은 극명하게 달랐다. 밝은색의 옷을 입고 있는 청년과, 대조적으로 어둡고 칙칙한 옷을 입은 사내가 함께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는 얼굴까지 가리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꺼려질 정도였다.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둘은 동행인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갈지혁과 진검백이었다.

“망할 갑자기 왜 비가 오고 난리야.”

“시기가 그렇긴 하지만 운도 없군. 여태까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비라니.”

비가 오는 것이 달갑지 않은 이유가 있다. 바로 배 때문이다. 비가 오면서 거칠어진 강의 물살에 쉽사리 배가 뜨지 않는 탓이다. 꽤나 큰 보수를 준다면 어떻게 당장에 움직이는 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 둘은 그다지 넉넉한 상황도 아니다.

갈지혁은 내리는 비 탓에 자꾸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이 짜증이 나는지 손으로 비를 슬쩍 가렸다.

“오늘밤에나 뜨는 배를 타야지 별수 있나.”

“그래. 그 수밖에 도리가 없군.”

진검백의 말에 갈지혁이 대답했다.

비록 비가 와서 배의 운항이 많이 줄긴 했지만 완전히 발길이 끊긴 건 아니다.

조그마한 선박들은 모두 잠시 강의 상태를 살피고 있지만 거대한 선박들까지 그런 건 아니다. 정 안 되면 표국에서 운영하는 배를 돈 좀 주고 끼어 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표국의 배는 아직 정확하게 움직일 날짜도 모르고 괜한 시비가 붙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오늘 밤 떠나는 선박에 몸을 싣는 것이 훨씬 나은 생각이라 판단한 것이다.

선박을 기다리는 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근방은 며칠 전부터 날씨가 이러했던 모양이다. 그 탓에 사천으로 가지 못한 수많은 자들이 그 거대한 선박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던 듯하다.

비는 불규칙하게 내렸다.

폭우처럼 쏟아지는가 싶다가 이내 여인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땅을 어루만진다.

봄이 된 지 조금 시간이 지났으니 다소 느린 비다. 그래도 이 비를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감사할 것이다. 적어도 이 비 때문에 이번 년 농사가 완전 흉작이 되지는 않을 테니.

“가지.”

“어디로 가게?”

진검백의 말에 갈지혁이 손가락으로 옆의 건물을 가리켰다. 오늘 같이 배 시간을 기다리는 손님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객잔이 그곳에 있었다.

“어차피 식사도 해야 하니까 객잔에서나 시간을 죽이는 게 나을 것 같다.”

“뭐, 이곳에서 이런 꼴이나 하고 있는 것보다야.”

진검백은 자신의 꼴이 한심스럽다고 생각하며 객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객잔은 좋은 자리에 위치한 것에 어울리게 큰 규모를 지녔다. 아마 이 자리를 잡으면서 돈 꽤나 벌었을 게다.

문을 열고 들어선 객잔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의 목적은 오늘 밤 떠나는 배에 있었다. 사천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다.

무림과도 관련이 깊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 사천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랬기에 길거리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무인들의 모습도 간간이 비쳤고, 장사꾼들이나 학문을 연구하는 서생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류의 인물들이 이곳에 모였을 게다. 이 중에서는 크게 한 탕 하기 위해 사천으로 가는 도둑이 있을지도 모른다.

몇몇의 사람들은 갈지혁과 진검백이 들어서자 그들에게 눈을 돌렸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데 바빴다. 눈을 돌린 사람들은 갈지혁의 특이한 모습에 신기한 눈길을 보냈다.

그 둘은 그런 주변의 시선을 깨끗이 무시하고 객잔의 구석으로 갔다.

“뭐 드실래요.”

열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갈지혁에게로 달려와 물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간단히 말했다.

“소면 둘.”

그러자 소년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안 돼요. 소면 두 개 시켜 놓고 배가 떠날 때까지 시간을 보낼 생각이죠? 그런 손님은 받지 말라고 주인 아저씨가 말하셨단 말이에요.”

너무나 당돌한 소년의 말에 진검백은 크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는 갈지혁을 바라봤다. 갈지혁이 어떻게 반응하나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거나, 아니면 무슨 일인가를 벌일 거라고 생각했던 진검백이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갈지혁이 소년에게 되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안 쫓겨나도 될까?”

“다른 걸 주문해요. 술을 시켜서 시간을 보내도 되고요. 아, 대신 한 병 시켜서 찔끔 찔끔 마셔도 안 돼요. 그럼 저 주인 아저씨께 혼나요.”

“그래, 우선 그럼 죽엽청(竹葉靑) 두 병 부탁하지.”

“금방 내올게요.”

말을 마친 소년은 다른 주문을 받기 위해 달려갔고 진검백은 갈지혁을 쿡 찌르며 말했다.

“정말 마실 생각이야?”

“왜? 못 마실 것도 없잖아.”

“술이야 환영이긴 하다만…… 더군다나 이런 비가 오는 날이면 의당 술 한 잔이 생각나긴 하지.”

진검백은 술을 꽤나 즐긴다. 취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 술이라는 것의 미묘한 감각을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그가 사준다는 술을 마다할 리가 없다.

“안주가 형편없긴 하지만 뭐 그게 대순가.”

진검백은 은근히 다른 요리를 시켜 주기를 바랐지만 갈지혁은 그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갈지혁의 태도에 진검백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소면이라는 간단한 음식을 주문한 탓에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식탁에는 요리와 술이 날아왔다. 술잔을 들어 올린 진검백은 갈지혁에게 내밀었다.

“한 잔 따라보라고 친구.”

갈지혁은 슬쩍 진검백을 바라보더니 이내 앞에 놓여 있는 죽엽청을 들어 올려 그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내려놓는 죽엽청을 바로 건네받은 진검백이 갈지혁의 잔을 채웠다.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죽엽청은 꽤나 독한 술이지만 그 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금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렇게 몇 번 돌면서 소면을 먹고 있는 둘의 바로 뒷자리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랜만이군. 혜정 신니.”

“절륜검(絶侖劍)?”

“이야기는 들었어. 혜정, 당신이 아미파에 가서 여승이 되었다는 걸. 그리고 지금은 신니라는 호칭까지 붙일 정도로 아미파에서 당신의 위치가 높다는 것 정도는.”

일반적인 대화였기에 갈지혁과 진검백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미파의 누군가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자를 만난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감히 어디서!”

혜정 신니라고 불린 여인의 옆에 있던 젊은 여인의 손에서 검이 출수됐다.

빠르게 날아든 검은 절륜검이라고 불린 중년의 사내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그 둘의 실력의 차는 너무나 컸다.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검을 피해 낸 절륜검이라는 사내는 손가락으로 검 끝을 쳤다.

“우욱!”

여인은 입술을 비틀면서 검을 거두었다. 가볍게 친 일격이었지만 그것이 여인에게는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함부로 나서지 말거라.”

“짐승만도 못한 놈! 네놈이 어디서…….”

여인의 말을 끊으며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섰다. 바로 혜정 신니였다.

“서혜야! 물러서라. 네가 상대할 만한 자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만.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들출 필요는 없다. 내 과오이기도 하니까.”

말을 마친 혜정 신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쯤 되자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서혜라는 여인이 검을 휘두를 때부터 이미 객잔 안의 모든 이목은 이쪽으로 쏠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혜정 신니 또한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랬기에 그녀는 급히 나서서 이 싸움을 중재한 것이다. 지금 이렇게 눈이 많은 곳에서 싸울 마음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아미파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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