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16화
“물러서시지요. 지금 전 당신과 이야기를 할 마음도, 그렇다고 싸울 마음도 없습니다.”
“그건 당신 이야기지. 난 할 말이 많단 말이야.”
“분명 물러나라 했습니다. 전 예전 당신이 알던 혜정이 아닙니다.”
혜정 신니는 단호했다. 하지만 절륜검은 그 정도에 물러설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능글맞은 미소를 흘렸다. 이곳에서 쉽사리 혜정 신니가 살수를 펼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탓이다.
진검백은 혜정 신니라는 말에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기 시작했다. 혜정 신니라면 진검백 또한 들어 본 적이 있는 여인이다. 아미파의 여승 중 하나지만 그녀가 한 많은 선행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된다.
반면 절륜검이라는 자는…….
“앉아 있어.”
“끙…….”
갈지혁은 진검백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작게 말했다. 진검백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절륜검이라면 진검백 또한 쉽게 건드릴 만한 상대가 아니다.
무공을 떠나서 그는 점창파의 인물이니까. 구파일방의 하나인 그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건드릴 수는 없는 것이다.
혜정 신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혜라는 여인과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지만 절륜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가나?”
“비키시지요.”
“어딜 가냐니까.”
“정말 당신…….”
혜정 신니의 아미가 일그러졌다. 동시에 객잔 안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지혁은 계속해서 술잔만 기울였다.
진검백은 그런 절륜검의 모습에 배알이 틀렸지만 검을 억눌러야만 했다. 비록 하는 짓은 하류 잡배 같아 보이나 절륜검이라면 점창파의 인물이니까. 무공 실력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다 하지만 결코 진검백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자는 아니다.
문제는 그가 점창파의 문주의 가까운 친인척이라는 것이다. 뒷소리가 좋지 않은 자다. 여자관계가 복잡하고, 또 정파 무인이라기에는 너무나 속이 좁고 옹졸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아직까지 무림에서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바로 점창파 문주 때문이리라.
혜정 신니는 아미파를 이끄는 여승 중 하나다. 그런 그녀에게 절륜검이 시비를 거는 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혜정 신니가 아미파에 들어가게 된 것은 바로 절륜검이라고 불리는 소우련 때문이었다. 철모르던 시절 혜정은 한 남자를 사랑했다. 그것이 소우련이었고, 그녀는 그에게 모든 걸 줬다. 하지만 얼마가 지나자 그 남자는 여인을 잊었다.
그렇게 해서 혜정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미파에 들어갔고, 지금 이렇게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무림은 평안한 상태다.
마교와 무림맹이 어느 정도 서로 공존하면서 걸어가는 길을 채택한 지금 그런 무림을 시끄럽게 할 만한 존재가 없는 건 당연했다. 종종 미친 듯한 광인의 등장이 이야기가 될 정도로 무림은 조용했다.
가장 큰 싸움이 몇십 년 전 있었던 독황독립문과의 싸움이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문제는 거기서부터 생겼다. 힘든 싸움이 있을수록 내부는 단결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 했다.
정파 무림이 자신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같은 지방에 위치한 커다란 문파들은 서로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상대를 어떻게든 깎아 내리기 위해 힘썼다. 더군다나 현재 점창파와 아미파의 관계는 최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혜정은 아미파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자다. 그런 그녀를 지금 절륜검을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함부로 자신에게 덤빌 수 없음을 알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아미파가 좋긴 좋은 모양이야. 나에게 연락 한 번 없는 걸 보니.”
“당신과 한 자리에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더러운 그 입을 짓뭉개버리기 전에 당장 비키는 게 좋을 겁니다.”
“호오, 예전엔 험한 말 하나 입에 올릴 줄 모르더니…… 아미파는 여승이 아니라 파락호를 키우는 곳인 모양이로군!”
“감히!”
혜정 신니의 만류에 끌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서혜는 다시금 내뱉은 절륜검 소우련의 말에 발끈해 버렸다. 그렇지만 소우련은 그런 서혜를 보며 피식하고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빠져 있으래도!”
“하지만 스승님…….”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그리 말했거늘 경거망동한 행동을 보일 생각이냐.”
“아미파를 욕되게 한 자를 스승님은 그냥 보고 계실 생각이십니까?”
그녀의 말에 혜정 신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혜가 무엇을 알겠는가. 화가 나고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건 서혜보다 그녀가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아야 하는 자신의 마음을…….
“……점창파와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 했다. 화가 나지만 참는 수밖에.”
혜정 신니의 사정을 모르는 서혜로서는 얼굴 가득 실망한 표정을 지은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진검백이 술잔을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꼴사납군.”
한심하기 그지없다. 무공을 익힌 자가 여인을, 그것도 여승인 혜정 신니에게 대놓고 모욕을 주고 있다. 진검백은 검의 끝을 보기를 원한다. 갈지혁이 독왕이 되기 원하는 것처럼 진검백 또한 그에 못지않은 꿈이 있다.
그런 진검백이 보기에 지금 전륜검 소우련의 행동은 마치 막 검을 잡은 아이의 치기 어린 장난처럼만 느껴졌다.
그때 막 나가는 혜정 신니에게 소우련이 말했다.
“어렵게 만났는데 그냥 이렇게 가려고? 뭐 아직도 내가 맘에 있다면 돌아와도 돼. 솔직히 말해서 당신만큼 만나는 동안 즐거웠던 여인은 없었으니까.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같이 시간을 보낼 수야 있지. 안 그런가?”
그 말에 화를 참고 있던 혜정 신니가 폭발했다.
“뭐가 어쩌고…… 어째?”
그녀의 손이 꽉 움켜쥐어지면서 당장이라도 뻗어질 것처럼 내공을 모았다. 그러자 전륜검은 뒤로 슬쩍 물러나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애초부터 소우련은 혜정 신니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혜정, 당신은 마음이 약해. 비록 지금은 강한 척하고 있지만 결국 본성은 변하지 않아. 그게 사람이거든. 당신은 날 못 죽여. 하지만 난 당신을 죽일 수 있지. 물론 죽이겠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자신 있다는 듯 소우련은 말했다. 사람이라는 것은 쉽사리 본성을 바꾸지 못한다. 마음이 약했던 사람은 아무리 독한 척해도 결국엔 속내를 보이게 된다.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 그렇다면 답은 뻔하다.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
소우련 또한 그녀를 죽일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비록 아미파와 사이가 좋지 않다 하지만 구파일방의 하나다. 적당하게 무너트리는 선에서 점창파라는 이름이 아미파의 위에 있음을 다시금 보여 주려는 것에 불과하다.
소우련은 자신의 검에 내공을 주입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올라야 가능하다는 검기를 펼쳐내려는 것이다. 그렇게 검에 내공을 주입하던 소우련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어?”
쓰러지려는 몸을 검으로 간신히 버틴 그는 이내 자신의 팔까지 축 늘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입가에서는 구역질이 치밀었다.
“웩웩! 콜록 콜록!”
그는 구토와 함께 기침을 토해 냈다. 소우련의 얼굴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옆에 있던 서혜가 외쳤다.
“멍청한 놈! 내공을 운용하는 방법도 모르는 모양이군!”
“개, 개소리! 콜록!”
소우련은 서혜의 말대로 자신이 내공을 잘못 운용한 것인가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 또한 무인이다. 그 정도를 모를 리가 없다. 더군다나 지금 몸속에 있는 내공은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다. 다만 왠지 모르게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가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 소우련의 모습에 혜정 신니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의 눈이 슬쩍 갈지혁을 스치며 지나가다 멈추어 섰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모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갈지혁은 분명 눈이 갈 만한 자다. 그렇지만 혜정 신니는 뭔가 다른 눈빛으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개를 슬쩍 숙이고 있던 갈지혁을 제하고는.
혜정 신니는 옆에 있는 서혜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나가자. 어차피 상대해 봤자 쓸데없는 자다.”
“알겠어요. 스승님.”
뭔가 속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서혜는 혜정 신니의 말에 바로 그녀의 뒤를 쫓아서 사라졌다. 객잔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급히 몇 명이 달려가 소우련의 상태를 살폈고, 이내 그가 죽지 않은 걸 확인하자 급히 객잔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말없이 술만 마시던 진검백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가만히 있으라더니 손을 썼군그래.”
“굳이 점창파와 정면으로 싸울 필요는 없지.”
“대단한 놈이야 넌.”
“그다지.”
“왜 도왔지? 넌 남의 일에 무신경한 것 같은데 또 은근히 생각을 많이 한단 말이야.”
갈지혁은 진검백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앞에 있는 소면을 떠먹었다. 갈지혁은 계속해서 진검백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결국엔 입을 열었다.
“그놈이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소면을 먹지 못해 불어터졌잖아. 입 좀 막은 거다.”
“천연덕스럽게 거짓말도 잘하는군.”
“마음대로 생각해. 그나저나…….”
갈지혁은 태연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점소이에게 무엇인가를 주문이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였지만 그 의미는 다른 데 있었다.
자신들을 쫓고 있는 자들을 찾는 것이다. 객잔에는 꽤나 많은 사람이 있어 한눈에 딱 들어오는 자는 없지만 이 근처에 그들이 있는 건 확실하다. 갈지혁은 고개를 돌리고 계속해서 죽엽청을 시켰다. 병이 비면 다시금 시키고를 아홉 번을 반복한 후에야 해가 지고 배가 출항할 시간이 되었다.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객잔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독한 놈.”
진검백은 머리를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소면 하나만 시켰던 채로 위에는 열 개의 죽엽청 병이 놓여 있다.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진검백이지만 이렇게는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갈지혁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뒤에서 작은 소리로 궁시렁 대면서 그는 밖으로 나와 배가 서 있는 곳으로 걸었다.
빗줄기가 다소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강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바람이 강하다. 아마 자그마한 배가 지금 강에 떴다가는 산산조각이 날 게다.
“어서 타시오!”
타려고 했던 배 앞에 이르자 위에서 굵은 고함 소리가 들렸다.
갈지혁이 진검백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가지.”
“오냐, 그래 가자. 뱃멀미나 안 했으면 좋겠군. 속이 아주 뒤틀려.”
진검백은 엄살을 부렸다.
철썩!
요동치는 강물이 옆구리를 치자 배가 휘영청 흔들렸다. 배가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선원들은 분주히 움직여야만 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빨리 움직이라고!”
성난 사내의 목소리가 갑판 위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배를 타고 있는데 몰아치는 폭우는 무섭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물뿐이라 더욱 그렇다.
평소엔 잔잔하지만 한 번 성이 나면 미칠 듯이 몰아치는 것이 바로 물이다.
분주한 위와 아래는 다소 달랐다.
진검백은 미칠 듯이 흔들리는 배 때문에 벽에 손을 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