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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42화 (42/200)

# 42

17화

배의 울렁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토악질을 해대는 사람도 있다. 갖가지의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다. 무인이나, 장사꾼을 제하고도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는 자들도 수두룩하다. 아이까지 안고 있는 부부는 눈을 꼭 감고 서로를 안고 있다. 이 미칠 듯한 폭우가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게다.

나이 어린 아이 중 일부는 이런 상황이 무서운지 눈물까지 터트리고 있다.

장사꾼들도 이런 폭우에 걱정스러운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나마 무인들은 폭우에 대한 두려움은 그나마 적었지만 나름대로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점창파와 아미파로 보이는 두 패가 반대편에 앉아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최근 들어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두 문파는 이제는 앙숙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리고 그곳에는 혜정 신니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눈을 꾹 감은 채로 명상에 잠긴 듯했다. 반면 혜정 신니에게 시비를 걸었던 점창파의 절륜검 소우련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갈지혁의 독에 당해 그대로 쓰러진 탓이다.

죽지는 않지만 며칠은 복통에 시달릴 게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이 온몸을 엄습할 터이니 아마도 눈앞이 어질어질 할 게 분명하다.

절륜검 소우련이 사라진 탓인지 점창파의 무인들은 아미파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같은 구파일방의 하나지만 이제는 그런 말조차 무색할 정도의 사이다. 아미파가 멸문할 정도의 위험이 닥쳐도 점창파는 무인 하나 보내지 않으리라.

진검백이 배의 옆면에 손을 댄 채로 말했다.

“운도 더럽게 없군. 배가 뜨자마자 폭우라니.”

“…….”

갈지혁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는 지금 이곳에 있는 자들을 하나씩 살피고 있었다. 슬쩍 슬쩍 주변에 있는 자들을 보는 갈지혁의 눈은 날카로웠다.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자들을 찾기 위해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게 뒤를 주고 있다는 것이 갈지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냐.’

서생이 하나 보인다. 손에 들린 보자기 안에는 책이 있는 듯하다. 네모 모양으로 되어 있는 보자기……. 손을 보니 슬쩍 굳은살이 있다. 하지만 저건 아니다. 저건 무인의 손에 잡힐 법한 굳은살이 아니다. 붓을 잡아서일 게다.

오래 붓을 잡아서 생긴 굳은살이 은연중에 무인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지만 장담하건대 검을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는 자다.

역시 이런 곳에서 위장을 하기에는 가장 오해가 가지 않을 자가 좋은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번에 갈지혁은 한 가족을 바라봤다. 할아버지부터 해서 손자까지 무려 일곱 명이나 된다. 숫자는 얼추 맞는 것 같긴 하지만 또 그리 볼 수 없는 게 분장으로 보기엔 아이들의 덩치가 너무 작다.

아무리 좋은 인피면구를 쓴다고 해도 저렇게 체형까지 바꿀 수는 없다. 아예 신체 골격을 뜯어 놓는다면 모를까 저건 불가능하다. 물론 아이들은 잡아 올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얼굴에 공포가 없다. 눈에도 거짓이라는 게 담기지 않았다. 결코 협박 같은 것에 휘둘려 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계속해서 둘러봤지만 수상한 자는 보이지 않는다.

‘없어? 아니, 분명 있어. 내가 찾지 못한 것뿐.’

그렇게 쉽사리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던 자들이다. 물론 다른 배를 이용해 쫓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같은 폭우라면 그것보다는 변장을 해서 옆에 있는 것이 더 나은 건 당연하다.

갈지혁은 생각을 바꿨다. 등잔 밑이 어둡다 했다. 오히려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숨겨진 것을 찾는 경우도 있다.

갈지혁의 눈은 여태까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무인들에게 향했다.

아미파와 점창파의 무인을 제하니 나머지는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체격이 크거나 한 것이 내공보다는 외공에 신경을 쓴 듯한 자들이었다.

골격이 꽤나 커다랗고 주먹도 우람한 것이 한 방이면 웬만한 맹수들도 그대로 즉사할 것만 같은 자들. 그들을 하나씩 살피던 갈지혁은 이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중원인이 아냐.’

감추고는 있지만 체형부터 해서 태연한 척하는 말투, 뭔가가 어색하다.

‘남만인이군.’

평생을 남만에서 살아온 그다. 중원 말을 내뱉고는 있지만 남만인의 어투가 섞여 있다. 감추려 해도 결국은 드러나는 건 당연하다. 남만이라면 그들이 누군지도 뻔하다.

독황독립문.

남만 최고의 독가! 갈지혁이 예전에 몸담고 있었던 곳이고 그런 그를 파문시키면서 모든 꿈을 빼앗아 갔던 곳. 다행히 일수만독 일악천을 만나 독왕 이라는 꿈을 다시금 갖게 되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포기할 뻔했다.

일악천이 말했다. 무림에 나가게 된다면 독황독립문의 손길이 뻗칠 거라고.

언제나 감시하고 뒤를 쫓을 테니 주의하라고 그가 말했다.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기에 잊고 있었거늘 일악천의 말은 정확했다.

그만큼 현 독황독립문의 문주인 지대익을 잘 안다는 말도 되는 것이리라.

‘귀찮아졌어. 독황독립문이라면…… 지금의 난 건드릴 수 없으니까.’

옆에서 갈지혁의 행동을 보고만 있던 진검백이 물었다.

“왜 그래? 갑자기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갈지혁은 진검백의 질문을 그냥 넘겼다. 독황독립문의 인물들에 대해서 진검백에게 설명해 줄 상황이 아닌 탓이다. 그것을 말하면 자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야기해야 한다. 비록 같이 행동하고는 있다 하지만 진검백은 화산의 인물이다. 그에게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갈지혁은 다시금 그들을 바라봤다. 한눈에 보기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삼류 파락호에 불과해 보인다. 그저 주워 배운 권각술 정도로 마을 하나에서나 소리치고 다니는 그런 부류 말이다. 그렇지만 갈지혁의 눈은 그런 겉모습이 아닌 진실을 쫓기 시작했다.

‘독들을 쓰겠지. 그리고 지대익이 보낸 자들이라면 강할 테고.’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의 상대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독황독립문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곳은 남만이 아니다. 중원과 남만은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아마 은신이 다소 어색했던 것은 그 탓일 게다. 아니면…… 들켜도 상관없다는 지대익의 생각일지도 모르고.

갈지혁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눈을 감고 있던 아미파의 혜정 신니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서자 주변에 있던 여승들 모두 움직였다. 이내 혜정 신니는 손을 들어 그녀들을 앉게끔 했다.

“잠깐 저쪽 시주들에게 볼일이 있으니 기다리거라.”

말을 마친 혜정 신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갈지혁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오자 진검백은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내렸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배 안에서 혜정 신니는 균형을 잃지 않고 다가왔다. 그녀가 앞에 서자 진검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니는 혜정이라 합니다. 아미파의 인물이지요.”

“압니다. 전 진검백이라 합니다. 화산파에서 왔습니다.”

“화산? 그리고 진검백이라면 혹시 매화검수 중 일인인…….”

혜정 신니는 진검백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매화검수의 한 명으로 장래가 촉망받던 화산의 기재였다.

진검백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낙화검 진검백이 바로 저 맞습니다.”

“낙화……검이라.”

혜정 신니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앞에 있는 사내에 대해서는 혜정 신니 또한 잘 알고 있다. 화산의 기재에서 문젯거리로 전락한 무인. 지금은 화산에서 그의 존재조차 지우고 싶어 할 정도로 수치스러워하는 무인. 낙화검이라는 별호가 잘 말해 주지 않는가.

그런데 말이다, 원래 못난 사람은 자신의 못남을 선뜻 인정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을 말해 줘도 되려 화를 내는 사람이 바로 못난 사람이다. 그런데 진검백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재밌다는 듯이 말하며 크게 웃어 버린다.

못난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혜정 신니는 그리 생각했다.

혜정 신니가 계속해서 쳐다보자 갈지혁이 대답했다.

“갈지혁이라고 합니다.”

“갈지혁?”

진검백과는 달리 생소한 이름에 혜정 신니는 반문하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이내 그녀는 그것이 실례라는 것을 느꼈는지 급히 말했다.

“이런, 혹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겠지요. 솔직히 말해 시주의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 거라서 그랬습니다. 혹 별호라도…….”

그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아미파의 여승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갈지혁이라면 섬서에서 행패를 부린다는 그 독을 쓰는 자 아냐?”

“맞아! 나도 들었다고!”

혜정 신니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앞에 있는 갈지혁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이름은 들어 본 적 없지만 섬서를 기반으로 오랜만에 독을 쓰는 자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앞에 있는 사내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까 절륜검 소우련을 쓰러트렸던 수법도 암기가 아닌 수상한 기운을 이용해서였다. 그것이 독이었던 듯하다.

“시주가 정말 그 갈지혁입니까?”

“독을 쓴다고 알려진 갈지혁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맞습니다만.”

혜정 신니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안색을 굳혔다. 은혜를 입었기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러 왔다. 하지만 정작 상대는 정파 무림에서 꺼리고 있는 상대다.

잠시 고민했지만 혜정은 이내 입을 열었다.

“아까 고마웠습니다. 시주 덕분에 빈니는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한 일이 아니니 고마워 할 것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 또한 나와 함께 있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제야 혜정 신니는 점창파의 무인들이 이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 이대로 갈지혁과 계속해서 이야기한다면 그것 가지고 또 꼬투리를 잡으려 들게 뻔하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굳이 할 이야기도 없는데…….”

“아미파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혜정 신니는 아미파의 여승들 사이에 다시금 가서 눈을 감았다.

모두의 눈이 갈지혁에게로 쏠렸다. 이 대화를 들은 사람 중 갈지혁을 아는 자들은 신기함과 두려움이 반반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말로만 듣던 독을 쓰는 자다.

그의 손이 닿으면 모든 것이 썩어 버리고, 손만 움직이면 몇백 명이 죽는다 했다.

갈지혁이 고개를 들어 모두를 쓱 훑어보았다. 그러자 고개를 들고 있던 모두가 눈을 내리깔았다. 무인이든, 장사치든 갈지혁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탓이다.

그만큼 독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 * *

시간이 지나며 크게 흔들리던 배가 서서히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미칠 듯이 쏟아지던 비가 멈추면서 흔들리던 강물이 잠잠해진 탓이다.

크게 불안해하던 사람들도 잠잠해지는 강물처럼 점점 마음을 놓았다. 강이 온순해지자 배는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섬서와 사천은 바로 붙어 있지만 그리 가깝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는 거리다.

순풍이 불면 반나절이면 족히 가는 거리지만 폭풍우에 시달렸으니 하루 정도의 시간은 필요할 게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아예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갈지혁은 고개를 숙인 채로 앉아 있었지만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정말로 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진검백은 아예 드러누운 채로 단잠에 빠진 상태였다.

아까 전의 미칠 듯한 폭우가 거짓이기라도 한 것처럼 배 안은 평화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런 배 안에서 아무도 모르는 미묘한 기운이 감돈다. 각자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여섯 명의 무인이 있다. 자신의 병기를 손보는 자도 있고 자는 자도 있다. 옆에 있는 자와 잡담을 나누기도 하지만 그들의 신경은 온통 갈지혁에게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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