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19화
말과 동시에 사내와 그를 위시한 수적들이 단숨에 혜정 신니가 있는 배로 넘어왔다. 그들은 각자의 병기를 꺼내 들었다. 장강수로채의 무인답게 무기들도 일반적이지 않다. 처음 보는 갈고리 같은 무기도 있고, 물고기를 잡는 그물에 암기를 가득 단 자도 있다.
구백룡이 사내에게 말했다.
“혜정 신니는 고수다. 조심해라. 그리고 만약 점창파가 끼어들면 두 놈을 조심해라. 저기 있는 청색 옷을 입은 두 놈만.”
“흐흐, 그리하지요. 그럼 다 때려죽이면 되는 겁니까?”
“싸움에 끼지 않는 사람은 건드리지 마라. 괜한 비난을 살 필요는 없지. 아, 또…….”
막 아미파의 정 가운데로 뛰어들려던 사내는 구백룡이 말을 잇자 급히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구백룡이 손가락을 들어 갈지혁을 가리켰다.
“저놈은 독을 쓴다. 싸움에 낀다면 조심해라.”
“독을 쓴다는 말입니까? 사천당문?”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갈지혁이라고 최근 섬서를 시끄럽게 하던 놈이다. 그리고 그 옆에 놈은 화산파의 매화검수다. 이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어떻게 끼어 든 것 같더군.”
“독을 쓰는 놈에 매화검수라……. 흐흐, 형님 오늘 아우 복이 터진 것 같습니다. 제 철퇴가 오늘 피 좀 먹겠소!”
그는 자신의 애병인 거대한 철퇴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갈지혁과 진검백은 구백룡이 자신들을 지목하자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 또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진검백은 자신이 있었다. 구백룡이 장강수로채의 채주라 하나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진검백은 스스로의 검에 자신을 가졌다. 하지만 저렇게 많은 수라면 쉽사리 나설 수가 없다.
진검백은 갈지혁을 슬쩍 바라봤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표정은 알 수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괜한 일에 연루되는 걸 싫어하는 갈지혁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기도 다소 뭐하다. 굳이 목숨을 걸 생각은 없지만 보고만 있을 순 없다. 특히 진검백은 화산파의 매화검수가 아닌가.
점창파와는 달리 화산파는 아미파와 사이가 좋다. 그러니 그냥 보고 넘길 수만은 없는 건 당연했다.
“싸우다가 위험하면 도망칠 곳도 없는데 말이야.”
진검백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지금 주변은 온통 물이다. 이런 곳에서 도망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한 마디로 싸우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털이 가득한 사내가 성큼 아미파의 무인들을 향해 다가왔다. 이제 빨리 선택을 해야 한다. 도와야 할지 아니면 방관자의 입장에서 구경을 해야 할지.
“흐흐, 막는다면 뭉개주는 수밖에!”
고함 소리와 함께 사내와 그 뒤에 있는 수적들이 아미파의 여승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들은 급히 병기를 꺼내거나 지법을 날렸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의 행동이 우습기라도 한 것처럼 단숨에 막아 내며 코앞까지 다가갔다.
진검백이 검을 빼 든 채로 빠르게 흔들었다.
매화꽃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하늘 가득 피어오르는 매화꽃. 향기마저도 느껴진다.
화산파의 무인들의 무공의 성취가 높아지면 그 검을 휘두를 때 매화꽃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위로 올라서면 환영처럼 보이는 매화꽃에서 향기가 난다고 한다. 믿어지지 않지만 진검백의 검에서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코를 찌르면서도 사람을 매혹시키는 강한 매화 향이.
진검백의 검이 사방을 가득 덮으며 매섭게 쏟아졌다. 마치 검무와도 같은 아름다운 모습에 혹할지 모르나 정신을 놓는 순간 목숨을 앗아갈 게다.
“오냐!”
아미파를 향해 몸을 날리던 거구의 털북숭이 사내는 몸을 비틀며 철퇴를 휘둘렀다. 애초부터 그는 아미파의 여승보다 진검백에게 관심이 쏠려 있던 차였다. 거대한 철퇴와 검이 부닥치면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단순히 검과 철퇴의 부닥침에도 불구하고 배가 휘청였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구백룡의 눈이 꿈틀했다.
“으…….”
거대한 철퇴와 얇은 검이 충돌하면 당연히 밀리는 건 검 쪽이다. 그런데 상황은 오히려 반대다. 사내가 뒤로 물러섰고, 진검백은 태연히 검을 든 채로 기수식을 취했다.
털북숭이 사내가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름이…… 뭐냐?”
“진검백이라고 하지. 낙화검 진검백.”
“네가 낙화검?”
사내의 얼굴에 놀랍다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낙화검이라는 별호는 무림에서 유명하다. 오죽하면 재능이 있는데 노력을 하지 않는 아이에게 낙화검처럼 되려고 그러냐며 호통을 치겠는가.
그렇지만 아니다. 손을 마주해 보니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내 그는 생각을 접으며 말했다.
“난 우석청(牛石請)이다.”
“알아. 아무리 장강수로채에 인물이 많다 해도 그 같이 거대한 철퇴를 휘두르는 자가 우석청뿐이라는 건.”
“흐흐! 아미파의 여승들과 싸우려면 시시할 거라 생각했는데…… 재미있는 놈이 나타났군. 역시 싸움은 이래야지.”
재미있다는 듯 우석청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는 거대한 철퇴를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
“와봐. 머리통을 으깨주지.”
“무식하긴.”
가볍게 대꾸하며 진검백은 손에 놓여져 있던 검을 빠르게 움직였다.
쉐엑!
철퇴를 높이 치켜들면서 저절로 생겨난 빈틈인 목젖을 노리며 검이 날았다. 그렇지만 우석청 또한 녹록지 않은 상대다. 장강수로채에 몸담고 있으면서 수많은 싸움을 해 본 그다. 경험으로만 치자면 진검백을 훨씬 웃도는 게 바로 우석청이다.
진검백과 같이 공격하는 자들과 한두 번 싸워 본 게 아니다.
우석청은 손에 들려 있는 철퇴를 아래로 휘둘렀다. 정확하게 철퇴는 검 위로 떨어졌고 진검백은 방향을 틀었다. 방향을 바꾼 검은 가슴을 노렸다. 그렇지만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우석청은 철퇴를 가슴까지 잡아당겼다.
탱!
검을 정확하게 막아 내며 그대로 우석청은 철퇴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며 철퇴가 매섭게 내리 꼽혔다.
쾅!
아슬아슬하게 진검백의 앞머리를 스치며 떨어진 철퇴가 뱃전을 부쉈다.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우석청은 민첩했다. 그대로 그의 철퇴가 진검백의 단전을 노렸다.
그에 진검백은 몸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그대로 검을 쭉 내뻗었다.
우석청은 그 공격을 급히 피해 내긴 했지만 뒤로 급히 물러서야만 했다. 그만큼 간단해 보이는 그 공격이 빈틈을 파헤쳤던 것이다.
구백룡이 소리쳤다.
“끌 시간이 어디 있느냐! 네 목적을 잊지 마라!”
그 말에 우석청은 당황하던 표정을 급히 거뒀다. 구백룡의 말대로다. 지금 그는 진검백과 무공을 겨루고 있을 시간이 없다. 끼어들지 않았다면 무시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상대다. 지금 우석청이 해야 할 일은 수로왕의 딸인 진려희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길을 막는 자를 베야 하고.
우석청은 그제야 주변의 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미파와 싸우기 시작한 그의 수하 중 일부가 뒹굴고 있다. 다른 자들은 어떻게 상대할 수 있는데 혜정 신니의 무공이 예상을 훨씬 웃돌았던 탓이다. 그녀의 손속은 부드러우면서도 위력이 담겨 있다.
혜정 신니의 손이 가는 곳마다 우석청의 수하들이 튕겨져 나갔다. 수하들에게만 맡기면 피해가 만만치 않으리라. 어서 지금 앞을 막고 있는 진검백을 뭉개 버리고 혜정 신니를 쓰러트려야 한다.
그걸 우석청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니미, 누군 그걸 모르냐고.’
문제는 앞에 있는 진검백이라는 사내가 그리 우스운 상대가 아니라는 거다. 단순한 한 번의 찌르기에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고야 말았다. 그것은 경험이 풍부한 우석청 또한 쉽사리 하지 못한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저런 자가 낙화검이라는 별호를 얻은 것인가. 자신의 병기를 놓은 자의 검이 아직도 이렇게 매섭단 말인가!
모르는 자라면 그저 대단하구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석청 정도 되는 자는 고개를 젓는다. 검을 놓았던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진 않다. 하루만 검을 놓는다 해도 변하는 것이 바로 무인이다.
만약 진검백이 검을 놓았었다면 지금 이 같은 일이 벌어졌을 리가 없다.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건 알지만 구백룡이 말했다. 그가 말했으면 따라야 한다. 빠르게 끝낸다. 그것이 구백룡이 내린 명령이다.
‘속전속결!’
우석청이 발을 구르면서 동시에 그가 딛고 있던 배의 일부가 부서졌다. 튀어 오른 우석청의 몸이 빠르게 진검백을 향해 쏘아졌다. 우석청은 호흡을 멈췄다.
단숨에 모든 것을 토해 내기 위해서다. 그의 철퇴가 진검백의 단단한 검 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려 열세 번의 공격을 호흡 한 번 쉴 정도의 짧은 시간에 모두 쏟아 낸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조금만 늦게 대응해도 단숨에 병기를 놓치고 그대로 온몸이 터져 버린다.
철퇴라는 무기 자체가 날카로움보다는 묵직한 타격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미칠 듯이 휘둘렀지만 끝내 철퇴는 진검백의 검을 뚫어 내지 못했다. 진검백의 호리호리한 몸을 보면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거늘 너무 수월하게 막아 냈다.
되려 물러서는 우석청에게 진검백이 매화검법(梅花劍法)을 펼쳤다.
화산파 검공의 기본이 되는 매화검법이지만 펼치는 사람에 따라 사뭇 그 위력이 다르다. 진검백이 펼치는 매화검법은 어디서나 보아왔던 그런 것들과는 그 격이 달랐다.
우석청은 급히 자신의 철퇴를 마구 휘둘렀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진검백의 검을 막아 내기에 우석청의 철퇴는 역부족이었다.
“흐으! 흐으! 네놈이 진짜 낙화검이냐?”
“사람들이 그리 부르더군.”
“믿어지지 않는군. 왜 네가…….”
중얼거리던 우석청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중요한 부분이나 팔다리 등은 지켜냈지만 몇 군데 자잘한 검상을 입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필패다. 우석청은 어떻게든 싸움의 종지부를 내려는 듯 철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물러서라. 네 상대가 아닌 듯싶다.”
“형님!”
“매화검수라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내가 상대하겠소! 지금 이렇게 물러서면 제 자존심이…….”
“네 자존심이 뭐?”
말을 하면서 구백룡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우석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수그렸다.
장강수로채에서 구백룡에게 대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상대를 알아보는 것도 실력이야. 저자는 너보다 강해. 의의 있나?”
“……없수.”
“그럼 물러서. 그리고 네 수하들이나 간수해. 저러다가 다 죽겠어.”
“그리하겠소.”
우석청은 몸을 돌렸다. 그로서는 구백룡의 명을 따라야만 한다. 분했지만 한편으로는 진검백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상대가 구백룡인 탓이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구백룡은 그 이상이다.
여태까지 장강수로채에서 이만한 인물이 나온 적이 없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구백룡은 기재였다.
‘내 손에 죽었으면 시체나마 남았을 것을……. 다 네 운명이라고 생각해야지.’
그는 손속이 잔인하다. 구백룡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잔혹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지금 진검백은 그런 구백룡과 싸워야 한다.
구백룡이 천천히 진검백에게 다가왔다.
“실력이 대단해. 왜 낙화검이라고 불리는지 전혀 모르겠더군.”
“지금 구백룡 당신의 행동은 정파 무림에게 도전을 하는 거요.”
“정파 무림? 지금 무림에 그런 게 있나? 다들 서로의 이익이나 노리는 늑대들뿐이지.”
현 무림의 상황을 구백룡은 단숨에 꼬집었다. 그의 말대로 현 무림은 서로의 이익만을 보고 있다. 그렇지만 그건 그들만의 일이다. 진검백과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