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22화
그녀는 스스로의 못남을 탓했다. 불도에 귀의한 지 이십 년이 넘게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러한 말이나 내뱉다니 낯이 화끈거린다.
혜정 신니가 말했다.
“빈니가 실언을 한 듯합니다. 시주 뜻대로 하시지요.”
혜정 신니는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구백룡은 계속해서 갈지혁만 바라봤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가려진 얼굴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았다.
갈지혁은 고개를 돌려 구백룡에게 말했다.
“나에게서 해독약을 받고 나서 바로 장강으로 돌아가라.”
“어렵지 않군.”
“내가 너에게 바랄 게 없으니까. 아니면 후로 미뤄도 좋겠지.”
“흐흐, 그래 너와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대신 그 소원들 들어줄 때 넌 나와 싸워야 돼. 이긴다면 들어주지.”
갈지혁이 피식 웃었다. 독을 쓰지 않은 상황에서도 동수를 이뤘다. 독을 쓴다면 필승을 자신할 수 있다.
“난 독을 쓰지 않았어. 백골환은 너에게 통하지 않지만……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수많은 독이 있거든.”
“……그래? 자신할 수 있나? 내가 중독될 거라고.”
“당연하지. 난 독인이거든. 무인이 아니라.”
그 말에 구백룡은 갈지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내 그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갈지혁의 무인이 아니라 독인이라는 말이 맘에 든 탓이다.
갈지혁이 구백룡에게 품에서 약병 하나를 빼서 집어던졌다. 안에는 액체가 아닌 가루가 들어 있었다.
“물에 풀어서 써. 두 방울 정도면 될 거야.”
“좋아.”
그는 배에 남아 있는 수하들을 불러 쓰러져 있는 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구백룡이 슬쩍 고개를 돌려 갈지혁을 보고는 이내 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반대편 배로 넘어가려던 구백룡이 멈췄다.
“네가 독을 쓰지 않았다고 했지? 나도 한 가지 이야기하지. 난 원래 조를 쓰지 않아. 설마 오늘 너 같은 놈이 올 줄 몰랐거든. 알았다면 이렇게 조만 덩그러니 들고 나오진 않았지. 난 검을 쓴다. 다음에 만날 때는 조가 아닌 검으로 싸우지. 그럼.”
말을 마친 구백룡은 반대편 배로 몸을 날렸다.
구백룡이 사라진 배는 일순 적막만이 감돌았다.
위험한 순간이 모두 지나간 것이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장강수로채의 배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백룡은 약속을 지켰다.
배의 선장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해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적은 피해로 장강수로채가 물러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배가 조금 부서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고치면 그만이다.
죽은 사람도 아미파에 국한되어 있다.
아미파의 혜정 신니는 죽은 시체들의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로 합장했다. 그녀의 지시대로 부상을 입은 여승은 급히 옮겼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갈지혁의 옆에 다가선 진검백이 말했다.
“수투 낀 건 처음 보는군.”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숫자도 많았고.”
“그래? 어쨌든 네 덕분에 살았군.”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진검백은 독의 위력에 내심 놀란 상태다. 갈지혁이 독을 쓰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만한 위력을 가졌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단 한 번 손을 움직임으로서 수십 명의 무인들이 쓰러졌다.
대단한 위력이다.
내심 진검백이 독의 위력에 놀라고 있는 동안 선장은 잠시 멈췄던 배를 다시금 출발시켰다. 배가 천천히 원래 정해진 항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덜 떨고 있던 자들은 다시금 뱃전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위에 남은 사람은 장강수로채와 직접 검을 맞댄 사람들뿐이다. 점창파의 인물들은 다소 할 말이 없는 듯 어물거렸다. 비록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이미 싸움의 기세가 기운 후에나 나섰다.
사이가 나쁘다 하지만 같은 정파가 아닌가.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혜정 신니의 옆에 서 있던 수로왕의 딸인 진려희가 그녀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당연하지요. 저 시주 둘이 없었다면 저희는 시주를 지키지 못했을 겝니다.”
혜정 신니 또한 알고 있다. 아미파의 여승들 대부분이 죽었다. 그러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 싸움에서 가장 큰 몫을 한 것은 갈지혁과 진검백이다. 특히 갈지혁은 싸우지 않고 장강수로채를 물러나게 했다.
무림에서 그러한 힘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혜정 신니와 진려희는 갈지혁과 진검백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막 다가선 진려희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순간 갈지혁의 소매에서 무엇인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꺅!”
다가섰던 진려희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버렸다.
갈지혁의 소매에서 떨어진 것은 사황이었다. 사황은 소매에서 나오자마자 고개를 치켜들었다. 갈지혁이 몸을 굽히며 사황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미안하다. 답답했던 모양이구나.”
치이익!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마냥 사황은 바로 소리로 화답했다. 갈지혁과 구백룡이 싸우면서 격하게 움직인 탓에 옷 안에 있던 사황은 꽤나 어지러웠던 모양이다.
갈지혁은 친근하게 사황에게 말을 걸었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혜정 신니가 비록 무인이기는 했지만 그녀 또한 여인이다. 뱀을 보면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다.
놀랐던 진려희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고, 고마워요. 도와주셔서.”
갈지혁은 사황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치켜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진려희는 움찔해 버렸다. 얼굴을 모두 가린 갈지혁의 인상이 결코 좋게 보일 리가 없다. 더군다나 쉽게 다가가기 힘든 독을 쓰는 자다.
아무래도 진려희에게 갈지혁은 무섭게만 보였다. 그녀가 딱딱하게 굳어 있자 혜정 신니가 나섰다.
“갈 시주, 그리고 진 시주 두 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저번부터 계속해서 은혜만 입는 것 같습니다.”
“은혜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제멋대로 나선 것뿐이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제가 한 거야 뭐 있겠습니까. 이 친구가 다 했지.”
진검백은 갈지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싸움에서 갈지혁이 없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장강수로채는 수로왕의 딸인 진려희를 잡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수의 무인들을 쏟아 부었다. 아미파의 무인들로는 결코 상대할 수도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수였다.
만약 갈지혁이 독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쯤 진려희는 그들의 손에 잡혀서 장강으로 끌려가고 있을 게다.
갈지혁은 혜정 신니와 진려희는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사황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이 진려희에게는 왠지 모르게 애 같이 보였나 보다.
“풋.”
손가락으로 툭툭 사황의 머리를 두드리던 갈지혁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진려희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다.
갈지혁은 사황을 어깨에 올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너무 즐거워 보이셔서 저도 모르게…….”
갈지혁은 진려희를 힐끔 바라만 봤다. 그의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소 무서운 감정이 일긴 하지만 애와도 같은 모습에 진려희는 애써 용기를 얻어 말했다.
“어디로 가세요?”
“사천.”
“사천에 왜 가시는 거죠?”
“……그것까지 말해 줘야 하오?”
갈지혁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비록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진려희는 상대가 기분 나빠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수로왕의 딸이다.
수로왕은 무인이기도 했지만 또한 장사를 하는 상인이기도 했다. 상대의 기분을 모른다면 그건 장사하는 자의 기본이 못 된 것이다. 말투에서 진려희는 갈지혁이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진려희가 말했다.
“실례가 된 듯하네요.”
“…….”
배가 빠른 속도로 강을 가로질렀다. 순풍을 탔는지 배의 속도는 아까보다도 더욱 빠른 듯했다.
물살도 배가 움직이는 방향에 맞춰 흐르기도 했지만 선장이 최대한 빨리 몰라고 명령을 내린 탓이다. 또다시 장강수로채의 수적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다.
갈지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넓게 펼쳐진 강을 바라봤다.
그런 갈지혁의 뒤에서 진려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선 채로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진검백은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한참을 지나도 그녀가 꿈적도 하지 않자 참다못한 갈지혁이 말했다.
“그만 들어가시오.”
“은혜를 갚고 싶어서요.”
“갚을 이유도 없다고 말했소. 난 당신을 위해 싸운 게 아니니까.”
갈지혁의 차가운 말에도 불구하고 진려희는 동요하지 않았다. 아직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여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심기가 깊다.
“당신이 절 위해 싸운 게 아니라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잖아요? 그러니 그 보답은 해야겠죠.”
“정말 지독하게 말 안 듣는 아가씨군.”
갈지혁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대놓고 중얼거리는 말을 못들을 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려희는 되려 웃으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도 매일 그렇게 말하셨죠. 당신도 그런 것 같지만 저도 한 고집하거든요.”
갈지혁은 당돌하게 말하는 진려희를 마주 바라봤다. 갈지혁이 노려보자 진려희는 찔끔하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보이려 노력했다.
그때였다.
“사천이오!”
선장의 외침에 갈지혁은 고개를 돌려 멀리를 바라봤다. 거대한 선착장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사천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그리던 사천이다. 섬서에서는 그저 강한 무인들과 싸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사천에서 할 일은 그보다 훨씬 많다. 무엇보다 사천에는 사천당문이 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사천은 갈지혁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도착이군.”
진검백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또한 하루 정도의 배 여행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 듯했다.
뱃전에 기대어 앉아 있던 진검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제야 간신히 보이기 시작한 사천을 바라보는 두 사내를 향해 혜정이 말했다.
“시주, 아미파에서 한 번 두 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사천에서 일이 끝나시면 아미파를 한 번 찾아주시지요. 이 혜정이 초대했다고 하고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날지 잘 모르겠군요.”
진검백은 갈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갈지혁의 입에서 예상외의 말이 튀어 나왔다.
“조만간 찾아뵙지요.”
“정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기에 혜정 신니는 다소 놀란 듯했다. 말은 그리했지만 쉽사리 갈지혁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아마 거절할 거라 생각했거늘 갈지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승낙했다.
혜정 신니는 쉽게 갈지혁이 수락해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아는 진검백은 오히려 불안했다.
‘무슨 꿍꿍이야?’
분명 혜정 신니의 초대를 받아서 가려고 하는 건 아닐 게다. 아미파에 갈지혁이 간다면 사고를 칠 게 분명하다.
진검백은 묻고 싶었지만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갈지혁은 계속해서 멀리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땅을 바라봤다.
사천이다.
드디어 사천에 도착했다.
* * *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산다. 그들은 제각기 생각이 다르며 살아온 환경도 다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다른 성격을 지닌다.
개중에 유독 튀는 성격을 지닌 사람이 있다.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행동을 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기인이사라고 부른다.
특히 그런 기인이사들이 넘치고 넘친 곳이 바로 무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