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24화
잠이 확 깼는지 그는 노인을 밀치면서 말했다.
“썩 꺼져! 미친놈하고 이야기할 시간 없으니까!”
“죽고 싶나 3호?”
노인을 쫓아내려는 사내의 몸이 움찔했다. 3호라는 말 탓이다. 그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알고 있다. 내 정체를.’
계속해서 우겨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 봤자라는 걸 안다. 자신을 3호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말은 곧 흑적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도망쳐?’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고개를 수그리며 사라졌다. 몰랐는데 지금에야 알게 됐다.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노인의 간격 안에 있다는 걸. 3호라고 불린 사내의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제길! 고수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
괜한 움직임은 생명만 단축한다. 3호라고 불린 사내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만약 은원(恩怨)관계로 인해 죽이러 온 거라면 굳이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게다. 무슨 용무가 있어 온 것이 분명하다.
사내가 말했다.
“용무가 있으십니까?”
“살수들에게 용무가 있으면 뭐겠는가.”
흑적파는 살수단체다.
물론 그 세력이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이 근방에서는 적수가 없다.
사내는 급히 고민했다. 이 노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살수라는 것 자체가 영특한 머리가 없으면 힘들다. 무조건 부닥치는 것이 살수는 아니다. 어떻게 흔적을 없이 죽이느냐……. 머리가 없다면 힘든 일이다.
지금 그는 고민을 하고 있다. 이 노인을 자신의 주인에게 데려다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왠지 모르게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 노인이다. 결코 강해 보이지 않거늘 은연중에 풍기는 기도는 절대고수다. 만약 살행에 나서 이런 자를 만난다면…… 반드시 피한다.
싸워서 결코 좋을 게 없는 자다.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내려졌다.
“따라오십시오.”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던 물건 두 개를 동시에 잡아당겼다.
그르릉!
땅의 일부가 갈리면서 그곳으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관을 설치한 모양이다.
사내가 손으로 통로를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나 혼자?”
“난 가게를 봐야 합니다.”
“손님 하나 없잖아. 오랫동안 나 말고 다른 손님이 오기나 했나?”
노인의 말에 사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말대로 손님의 발걸음이 끊긴 지 오래다. 그래도 3호의 임무는 이곳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손님이 아니라도 이곳은 청부를 받는 중간 지점으로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 없다.
“무섭다면 돌아가시죠. 전 때려 죽여도 여기를 벗어날 생각은 없습니다.”
“좋아. 규칙이라면.”
말을 마친 노인은 몸을 돌려 아래로 홀로 걷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지만 노인은 어렵지 않게 걸었다.
그만큼 무공 수준이 있는 탓이다.
어두운 길, 그리고 살수 단체. 암습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결코 발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어디서 공격을 해와도 막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인 셈이다.
실제로 그 길에는 몇 몇의 살수들이 숨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옳다. 빈틈이 없는 상대의 모습에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렇게 노인은 비밀 통로를 통해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선 노인의 눈에 책상에 앉은 채로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가 비쳤다. 나이는 대략 사십 중반 정도로 보였다.
너무나 평범하게 생겨 살수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내가 근방을 휘어잡고 있는 흑적파의 두목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용무는?”
“살수들에게 부탁할 게 뻔하지. 너나 위에 있는 놈이나 질문하는 게 똑같군그래.”
“죽여달라는 건가?”
“죽일 수 있다면.”
흑적파의 두목은 빤히 노인을 쳐다봤다.
계속 바라보던 사내는 중얼거리듯이 내뱉었다.
“특급이군.”
노인을 봤을 때 분명 무림의 고수였다. 그런 그가 청부를 했다. 무슨 일인지 듣지 않아도 특으로 분류해도 될 정도로 큰일임이 분명하다.
“보수는 이거면 되겠지.”
노인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던졌다.
종이를 펴본 사내의 얼굴에 슬쩍 당황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특급이라고 해도 너무나 많은 금액이 적혀 있다.
“황제라도 죽여달라는 거요?”
사내의 입에서 절로 존댓말이 터져 나왔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 대신 노인은 품속에 있는 서찰 한 장을 더 꺼냈다. 종이를 건네받은 사내는 그 내용을 읽어 내렸다.
다 읽고 나니 사내는 의문이 생겼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듯한 일이다. 꽤나 높은 고관대작을 죽이거나, 무림 고수를 죽여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죽이라고 하는 것은 젊은 사내 하나뿐이다.
그런 일 치고 너무 보수가 크다.
그저 돈 벌었다고 좋아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분명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특이사항은 없소?”
“있지. 독을 써. 분명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만도 않을 걸. 단신으로 구양세가를 무너트린 놈이니까.”
“구양세가? 설마 갈지혁?”
사내는 구양세가를 무너트렸다는 말에 갈지혁이라는 이름을 말했다.
비록 섬서에서 활동했던 갈지혁이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던 탓이다. 더군다나 살수라는 것 자체가 정보가 생명이다. 그런 소문을 모를 리가 없다.
사내는 생각에 잠겼다.
포기하기엔 너무 돈이 많다. 그리고 어차피 정면대결이 아닌 암습으로 승부는 갈라질 것이다. 상대가 그 누구라 해도 피할 생각은 없다.
“일곱. 그 정도면 되겠소?”
“네 선택에 맡기지.”
“일곱이면 이미 특급으로 분류된 거요. 그것도 상(上)!”
“성공할 거라 생각하는가?”
“물론.”
“좋아.”
노인은 몸을 돌렸다. 더 이상 길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사내가 말했다.
“오늘밤이오. 당장 수하들을 보내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늘 갈지혁은 죽게 될 것이다.
물론 어떻게 될지는 시간이 말해 줄 게다.
노인은 문을 열고 나가며 어두운 앞을 응시했다. 이래저래 많은 상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방금 전 사내가 한 말을 되뇌며 노인은 걷기 시작했다.
‘일곱이라…….’
분명 흑적파에서 최고의 살수 일곱을 보낼 것이다. 그만한 액수였고, 갈지혁이라는 말에 잠시 망설이는 걸 보면 얕보는 것도 아니다. 특급 살수 일곱이라면 분명 흑적파의 모든 것이리라.
노인은 바로 황금귀 이풍이다.
그가 갈지혁을 죽여달라고 청부를 한 것이다.
‘한 번 지켜보지.’
갈지혁에게 일종의 시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 보고 싶다.
일악천은 이풍에게 말했다.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의지가 있다고. 반드시 독왕이 될 놈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독왕?
“큭, 크흐흐. 미친놈. 독왕이라니……. 아직도 나이를 헛먹었어.”
이풍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겉으로 내뱉었다. 물론 누가 듣는다 해도 크게 상관없는 말이다. 그는 일악천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아직도 독왕이라는 꿈을 꾸는 그가 애석하면서도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평소라면 웃어 넘겼을 것을 그 말을 하는 일악천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했다. 자신도 모르게 오기가 생겼다.
웃기지 말라며 화를 냈고, 그러면서 내기를 하게 됐다. 애초부터 일악천은 이풍에게 갈지혁을 도와주기를 청했다.
이풍은 자신을 만족시켜준다면 모든 것을 쏟아 붓겠다고 말했고 일악천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나 태연한 그 모습에 이풍은 기분이 나쁘기까지 했다. 그가 이미 내기에 이긴 듯한 모습을 보였던 탓이다.
그렇지만 신이 났다.
오랜만에 찾아간 사독문이었다. 근 이십 년 만에 만난 지기거늘 죽어 있던 눈빛이 완전하게 변했다. 그것은 전부 갈지혁이라는 놈 덕분이리라.
일악천은 잃어버린 삶의 목적을 찾은 듯했다.
그곳에서 일악천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아직도 독왕이라는 꿈을 꾸는 멍청한 놈을 지켜보고 싶다. 설령 그것이 발악이라고 생각될지라도.
‘보여 줘라. 너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그 가능성을 보여 준다면 이풍은 모든 것을 쏟아 줄 것이다. 설령 그 탓에 목숨이 위험해 질지라도 상관없다.
* * *
객잔 주변에 은밀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흑적파의 살수들이다. 그들이 어느새 객잔 근처를 빙 둘러쌌다. 각각 모습이 보이지 않게 은폐를 하고 있지만 목적지는 분명하다.
객잔에 있는 갈지혁을 죽이러 온 것이다.
그들은 능숙한 살수다. 딱히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대충 상대의 생각을 안다. 그만큼 오래 같이 일을 했고, 능력들도 있다. 흑적파의 특급 살수들이다.
일곱은 거의 동시에 객잔에 달라붙었다. 이미 갈지혁이 머무는 방의 위치에 대해서도 안지 오래다.
기회를 틈타 일곱이 바로 안으로 뛰어 들어가 각종 암기들을 터트릴 것이다. 안다고 해도 막을 수 없다.
이 일곱 살수 중 우두머리 격인 사내는 손에 든 둥그런 것을 만지작거렸다. 흑적파에서도 정말 귀하게 여기는 암기다.
실제로 실전에서 쓴 적은 단 한 번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로 귀한 암기지만 오늘 갈지혁을 죽이기 위해 가져왔다.
그만큼 보수가 큰 탓이다.
이 암기는 사방으로 수백 개의 침을 터트린다. 방 안에서 이 암기가 터진다면 결코 피할 곳이 없다. 그리고 설령 목숨을 건진다 해도 바로 쏟아져 들어오는 일곱 살수의 암기와 무기들을 막아 내는 건 불가능하다.
‘어려운 일이 아냐. 쉬운 일이지.’
만약 수백 개의 침을 쏟아 내는 구룡침(九龍針)이 없었다면 모를까 이것이 손에 있는 이상 이미 성공은 확실하다.
‘은밀하게. 그리고 확실히.’
속으로 중얼거리던 사내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다른 여섯 모두의 눈이 그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가 명령만 내린다면 바로 안으로 뛰어 들어갈 기세다.
구룡침을 터트리기 전에는 결코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괜히 앞에 들어갔다가 구룡침의 제물이 될지도 모르는 탓이다.
그는 호흡을 서서히 죽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다. 사내의 눈이 말했다. 지금 움직인다고.
그리고,
쉬익!
공중으로 솟구친 그의 발이 정확하게 창문의 중간을 걷어찼다.
쾅!
문이 열렸고, 떨어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에서 구룡침이 떠났다. 방 안으로 정확하게 구룡침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면서 사내는 떨어져 내렸다.
거의 동시에 안에서 구룡침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에 발이 닫기가 무섭게 아래에서 기다리던 여섯은 공중으로 솟구치며 방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좋아! 성공이야.’
구룡침은 완벽했다. 그리고 수하들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한 호흡을 가다듬은 사내 또한 몸을 날려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선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