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2화
독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지독한 독기를 품은 놈만이 가능하다. 그 탓인지 독인들의 피는 바로 독이 된다.
‘지독한 피를 지녔군. 조심해야겠어.’
이 정도의 독이라면 사람을 녹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풍은 급히 몸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갈지혁이 독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 변변한 공격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손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이렇게 밀리기만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독을 조심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웅크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스윽, 스윽.
이풍의 손이 화려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붉게, 그리고 노랗게……
그 아름다운 모습에 진검백은 넋을 잃고야 말았다. 아름다움으로는 화산의 매화검법이 최고라고 생각했거늘 이제는 대답을 보류해야 될 듯싶다.
이풍이 어깨를 흔들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갈지혁의 몸도 급히 움직였다.
이풍이 펼친 장법은 딱히 어느 곳을 정하지 않고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폭음이 계속해서 들렸고, 그 안에서 갈지혁은 쉬지도 못하고 움직였다.
잠시 호흡을 고른 이풍은 그대로 갈지혁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놈! 잡았다!”
막 몸을 비트는 갈지혁의 뒤에서 나타난 이풍은 그대로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내리쳤다. 그대로 갈지혁의 등에는 두 개의 인장이 틀어박혔다.
그런데 비틀거리면서 떨어지던 갈지혁이 그대로 이풍의 손을 잡아 버렸다. 막 다음 공격을 하려던 그는 손이 잡히자 발로 갈지혁을 걷어찼다.
퍽.
맞긴 맞았거늘 이풍은 입술을 깨물었다.
갈지혁이 오히려 어깨를 앞으로 잡아당겨 공격을 막아 버린 것이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둘 모두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각자가 팔과 다리가 봉쇄되다시피 한 상황이다.
“이래선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이대로 가면 네가 불리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갈지혁의 소매에서 매섭게 하나의 생명체가 튀어 나왔다.
텁!
정확하게 목을 노렸지만 이풍은 용케 피해 냈다. 갈지혁의 소매를 유의 깊게 보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피할 수 없었을 게다.
튀어 나온 것은 사황이었다.
“배, 뱀?”
사황의 공격을 용케 피해 냈지만 그 탓에 이풍은 갈지혁을 잡고 있던 손을 놔야 했다. 갈지혁이 그대로 결을 찾아 손을 휘둘렀다.
퍼엉!
막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이풍은 그대로 갈지혁의 일장에 피를 토했다. 뒤로 열 걸음가량을 밀려난 그는 입으로 연신 기침과 함께 피를 뱉어 냈다.
“쿨럭 쿨럭!”
결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더군다나 일악천에게 배운 독장은 결코 그 위력이 약하지 않다. 이풍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망할, 뱀에게 눈을 빼앗기다니…….’
뱀의 등장에 당황해 잠시 갈지혁을 놓쳤다. 그리고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로 다가왔다.
이풍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비록 제대로 공격이 먹혀들긴 했지만 아직 싸움은 시작 단계일 뿐이다.
그때 갈지혁이 손에 하얀 가루를 놓더니 입으로 후 하고 불었다. 가루가 사방으로 마구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풍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 가루가 이곳까지 미치지 못함을 아는 탓이다.
그걸 갈지혁이 모를 리는 없다.
그런데 왜?
“무슨 꿍꿍이…….”
말을 하던 이풍은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예감은 적중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이풍은 주먹으로 다리를 쾅쾅 때려봤다. 하지만 마치 돌멩이가 된 것처럼 그의 다리는 굳은 채로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 가루가 이렇게 만든 것이리라. 그렇지만 분명 그 가루 안에 이풍은 들어 있지 않았다.
“왜 중독된 거지? 분명 거리 밖이었거늘…….”
“내가 아까 뿌렸던 걸 기억합니까?”
“아까 뿌렸던 것?”
“지금 뿌린 가루 말고 그 전에.”
이풍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구멍을 막고 버텨 낸 그 독을 말하는 모양이다.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독의 이야기는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애초부터 그건 중독되는 독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내가 지금 뿌린 이 가루와 만나 그 효용을 발휘합니다. 지금 당신이 있는 자리, 방금 뿌린 가루는 닿지 않았지만 그 전에 뿌린 것들은 이미 땅에 가득하니까.”
“허…… 이거 참, 당한 건가?”
이풍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까 전에 뿌렸던 것은 단순한 독이 아니었다. 그걸 독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몸의 구멍을 막았다. 그리고 지났기에 잊었다. 하지만 그 독들이 땅에 갈려 있다가 갈지혁의 손에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풍은 다시금 주먹으로 다리를 쾅쾅 쳤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런 감각도 일지 않는다.
하지만 이풍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로 무너질 정도로 이풍은 약하지 않다.
“오냐, 받았으니 보답은 해 줘야겠지? 황금귀 이풍이 어떠한 놈인지 보여 주마.”
이풍은 갈지혁의 어깨에 올라가서 눈을 빛내는 사황을 노려보며 말했다.
사황은 자신을 노려보는 이풍의 매서운 살기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뱀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다르다. 이풍 또한 그리 느꼈다.
‘영물이로군. 뱀 주제에…….’
아무리 지독한 독사라고 해도 이풍 정도 되는 고수와 마주한다면 비켜서기 마련이다. 상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를 인간보다는 동물이 오히려 잘 안다.
그들은 그것이 바로 생명과 직결되니까.
그래서 아무리 지독한 독을 지닌 독사라고 해도 이풍은 싸우지 않고 물러서게 할 자신이 있다. 그런데 사황은 아니다. 설령 이풍보다 몇 갑절은 강한 상대가 나타난다 해도, 자신의 목숨이 막 사라질 것을 알아도 사황은 고개를 쳐 들게다.
그것이 사황이다.
“사독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
갈지혁은 고개만 끄덕였다.
사황은 갈지혁의 등 뒤로 모습을 감췄다. 언제든지 공격을 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다.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갈지혁은 이풍을 바라보며 옆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기회를 엿보는 듯하다.
“끙. 하여간 일악천…….”
이풍은 중얼거리며 그대로 발을 내디뎠다.
독에 중독당했다.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한 이풍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유 있게 있을 정도는 아니다. 일 각 이상을 버티는 것은 무리다.
그랬기에 이풍은 속전속결을 노렸다.
그의 몸이 수많은 변화를 보였다. 일보에 다섯 개의 변화. 그리고 갈지혁에게까지 다가서는 데 드는 발걸음의 수는 무려 열 걸음이다.
도합 오십 개의 변화를 보이며 이풍의 손이 갈지혁에게 쏟아졌다.
갈지혁 또한 질세라 수투를 낀 손을 움직였다.
얇은 실 같은 것이 수투에서 쏟아져 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것이지만 이풍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망갈사(網蝎絲)!’
전갈의 껍데기를 이용해 만든 실이다. 너무나 얇아 그것이 출수된다 해도 눈으로 판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림에서 알아주는 이풍조차 간신히 알아차릴 정도니 말해 무엇하랴.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실이 아니라는 거다.
망갈사를 만드는 껍데기는 전갈의 꼬리 부분의 것을 주로 쓴다. 그리고 전갈은 꼬리에 독이 있다. 수많은 독이 묻히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가득한 실인 셈이다.
독뿐만이 아니라 망갈사는 날카롭기까지 하다. 사람 몸 하나 정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물론 무림에는 망갈사라는 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남만에서 사용되고, 또한 쉽사리 손을 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점차 망갈사는 남만에서조차 잊혀져 가는 암기다.
너무나 얇고, 손목의 간단한 움직임만으로도 큰 변화가 생긴다.
그랬기에 그만큼 잘못 사용하면 바로 실이 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자신에게 돌아와 쉽사리 쓸 수 없는 물건인 것이다.
쓸 줄도 모르는 놈이 망갈사에 손을 댔다면 열에 아홉 이상은 그대로 즉사다.
날린 실이 꼬이거나 얽히며 손을 쓴 사람에게 돌아온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아니다.
우선 망갈사를 쓰는 기본부터가 잡혔다.
‘괜히 몸을 움직였던 것이 아니었군. 노옴!’
갈지혁이 그저 기회를 엿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망갈사의 기본은 바로 바람이다. 독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망갈사 또한 그렇다.
바람을 등져야 한다. 바람과 마주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 망갈사다.
기본적이지만 쉽게 망각하는 것의 하나다.
너무나 급한 상황이라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된다.
망갈사를 뿌려 내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풍은 손을 휘둘렀다.
얇은 것이 망갈사의 약점이다. 피하는 것보다 오히려 받아쳐 돌려보내는 것이 좋은 판단이다.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방심하고 있다면 필히 죽는다. 일악천에게는 다소 미안하긴 하지만 애초부터 이 정도에 죽을 놈이라면 자신의 손으로 죽이려고 했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 일악천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
비록 남만의 독황독립문의 인물이지만 이풍은 일악천을 인정한다.
어떻게 보면 이풍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이 일악천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인물의 제자라면 기대하는 만큼의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면……
‘…… 차라리 내가 부숴주지.’
이풍의 손이 앞으로 나가면서 폭풍 같은 바람이 일었다. 예상대로 망갈사는 급히 방향을 갈지혁에게로 틀어졌다.
이것 또한 망갈사가 남만에서 지워지게 된 이유의 하나다. 이런 식으로 반격을 당하면 피하기가 까다롭다.
물론 망각사를 모른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반격이긴 하다.
망갈사가 단숨에 갈지혁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만 같았다. 방향을 급선회한 망갈사는 갈지혁의 주변에 마구 흩날렸다.
빈틈이 없다. 무당파의 창시자인 장삼봉이던 누구던 결코 뚫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갈지혁은 오른손에 낀 수투로 왼손을 쭈욱 그었다. 살갗이 찢어지면서 피가 배어나왔다. 그리고 갈지혁은 그대로 왼손을 흔들었다.
수라독공까지 운기한 후의 갈지혁의 피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상을 불허하는 극독이다. 갈지혁의 손에서 떨어져 내린 피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마치 얇은 바늘처럼 된 핏줄기들이 쏟아졌다.
갈지혁을 노리던 망갈사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방으로 날아간 갈지혁의 핏줄기들이 망갈사라는 실을 녹여 버렸다. 중간을 끊으니 날아오는 힘을 잃고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버린 것은 당연하다.
이풍은 되려 날아드는 갈지혁의 피에 어깨와 다리에 적중당했다.
치익 하면서 닿은 부분의 살이 타기 시작했다.
“크…….”
갈지혁의 피는 쇠보다도 단단한 이풍의 몸까지도 녹였다.
이풍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예상치도 못한 수법으로 갈지혁이 망갈사를 막아 냈다. 자신의 피로 중간을 끊어 버려 힘을 잃게 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날아드는 핏줄기에 이풍마저도 당하고야 말았다.
망갈사를 막아 냈고, 이풍의 다리도 묶었다.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