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4화
무당파의 무진악은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현재 정파무림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당연히 자신들의 위에 무진악이 올라서는 것을 탐탁하게 여길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아무도 딱히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적어도 무진악은 무당파의 장문인이다.
무당파는 화산 다음으로 그 세력이 거대하다. 어차피 소림의 방장이 뜻을 전했으니 이토록 서 있는 걸 게다. 괜한 마찰은 자신들의 문파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진악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걸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당문과 제갈세가로군.”
“그 두 곳은 언제나 문제이지 않소.”
무진악의 말에 대답한 것은 오대세가의 하나인 하후가의 가주인 하후문이다. 그는 슬슬 희게 변해 가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무진악은 은연중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후문의 말대로다. 오대세가인 당문과 제갈세가는 언제나 골칫거리다. 특히 당문은 말만 오대세가지 실제로 그리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진악이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무림은 조용하오. 딱히 문젯거리는 없는 것 같소만. 할 이야기들 있으시오?”
아미파의 진현 사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이 매섭게 점창파의 장문인에게 쏟아졌다.
대충 상황을 눈치챘는지 점창파의 장문인은 헛기침을 했다.
장강수로채의 일 탓이다. 그때 점창파는 아미파가 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늦게나마 나섰다. 무슨 말을 하려던 진현 사태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무진악이 중재에 나섰다.
“그만, 그만. 대충 무슨 일인지 알고 있소. 하지만 결국은 도왔고, 모두 무사하지 않소. 이번은 사태께서 넘어갔으면 하오.”
“……무진악 장문인이 그리 말한다면 넘어가지요. 하지만 한 가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들 때문에 우리 아미파는 흘리지 않았어도 될 피를 흘렸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개입했더라면…….”
말꼬리를 줄이던 진현 사태는 더 이상 말도 하기 싫다는 듯 자리에 앉아 버렸다.
모두가 조용히 침묵했지만 개방의 방주만큼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은 채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현 무림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것이 바로 개방의 방주다.
거지의 본질은 자유라고 생각했다. 권력과 가까이 하면 그 본질이 변한다고 생각하는 그다. 그랬기에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점창파 장문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참지 못하고 그가 말했다.
“자네 왜 웃는 겐가?”
“아니 우습겠나? 아녀자들의 치마폭이나 들추려는 네놈의 행색이 가소로워서 웃는다.”
“뭐, 뭐야!”
“갈(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점창파의 장문인은 바로 내질러지는 무진악의 외침에 움찔해 버렸다. 개방의 방주 또한 다소 놀란 듯했지만 이내 태평을 되찾고는 씨익 웃기만 했다.
무진악이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우리가 싸우자고 모인 게 아니오! 감히 지금 이 자리가 어떠한 것이거늘
사소한 감정으로 싸우려고들 하시오!”
무진악의 말에 둘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개방 방주가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뒤로 집어던졌다.
“한 가지 말할 게 있네.”
“말해 보게. 시답지도 않은 농이나 할 거면 집어치우고.”
“최근 들어 병의 낌새가 보이네.”
“병?”
무진악은 반문했다.
갑작스럽게 병이라는 말에 알아듣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개
방의 방주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마을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야 할 정도야. 그 병의 기운이 얼마나 강한지 그 근방에 다가섰다가 중독되는 경우도 허다하다더군.”
“그렇군. 역병이라…….”
역병이 돈다는 말에 무진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역병이라면 조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아무리 무인들이 몸을 갈고 닦았다 해도 지금 개방 방주의 말을 들어 보니 그 강도가 결코 적지 않은 역병인 게 분명하다.
“조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자네가 역병이 돈 지역을 모두 조사해서 지도에 남겨 주게.”
“그러지.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다른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한다면 어처구니가 없을 게다. 그 넓은 무림에서 역병이 퍼진 마을 모두를 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가능하다.
무림 최고의 정보망을 지닌 개방의 방주라면.
고개를 끄덕이던 개방의 방주가 무엇인가 생각나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아, 전에 부탁한 그거 말일세. 그 갈지혁인가 뭔가 하는 놈이랑 당문이 연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말이야.”
“알아왔는가?”
“조사를 해 봤는데 영 모르겠어. 적어도 당문과 접촉을 할 시간은 놈에게 없었을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그 갈지혁이라는 놈의 과거 자체가 백지야. 중원에 있었다면 그 누군가라도 본 사람이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지.”
“흠…… 분명 당문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아마 아닐걸.”
개방 방주가 바로 대답했다. 무진악이 그를 힐끔 바라봤다. 그러자 방주는 말했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도 그렇지만 적어도 당문의 문주는 그리 멍청한 놈이 아니거든. 쉽사리 속내를 보일 리가 없지.”
“것도 그렇군. 갈지혁, 갈지혁이라…… 지금 갈지혁을 누가 관리하고 있지?”
무진악의 말에 구석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노인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당히 인상이 푸근해 보이는 노인이다. 그렇지만 그는 반백 년을 무림과 함께 한 고수다.
그리고 무진악 또한 쉽사리 대할 수 없는 유일한 상대기도 했다.
“아아, 화산파였군.”
“그렇소.”
“잘되어가고 있습니까?”
“내 수제자를 옆에 붙여놨지.”
그러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개방의 방주가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낙화검을 수제자라 칭한 것은 아니겠지요?”
“왜 틀렸겠소. 바로 그놈이오.”
낙화검이라는 말에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문파의 장문인이나, 세가의 가주들은 얼굴을 찡그렸다. 낙화검 진검백이 어떠한 인물인지 아는 탓이다.
그 놈은 낙오자다. 인생의 실패자다.
검을 놓은 자를 어찌 무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무진악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장문인, 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을 거요. 두고 보시오. 나중이 되면 알게 될 테니.”
자신 있다는 듯 말했지만 아무도 화산파 장문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이들은 이미 진검백이 어느 정도의 그릇인지 판단을 내린 상태다.
화산파의 매화검수지만 이미 그건 옛날이야기다. 이제는 그저 타락공자일 뿐이다.
말을 마친 화산파의 장문인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슬쩍 입꼬리가 비틀린다.
‘협과 의도 없는 놈들이…….’
그들이 진검백을 무시하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런 장문인들이 그에겐 더 우스웠다.
진짜 진검백을 모르는 것이다. 만약 진정한 진검백을 알았다면 지금 이리 말할 수 없으리라.
무진악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고, 다른 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힘을 가지기 위해 아등바등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화산파의 장문인은 조소 섞인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귀 같다. 먹이 하나를 두고 열 명이 넘는 자들이 달려든다.
한심하다. 한심하다 못해 검을 들어 혼쭐을 내주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렇지만 참았다. 지금 이 자리는 그의 맘대로 행동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문득 진검백이 생각났다. 이러한 것이 싫어 스스로의 실력을 완전히 감추어 버린 천재가.
‘놈은 천재야. 다시 나타날 수 없을 정도의. 놈은…… 화산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게야.’
그는 자신했다.
* * *
황금귀 이풍은 정신을 추슬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침상에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있다. 잠이 깬 지는 조금 시간이 지났지만 쉽사리 눈을 뜰 수가 없다.
그와 같은 방에 갈지혁과 진검백이 있다.
그 둘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성큼 끼어들기도 뭐하고, 일악천에 이어 갈지혁에게 패한 것도 내심 마음에 걸린다.
사황 때문에 밀린 거지만 이풍은 자신이 졌다고 생각했다. 인정은 하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사실이다. 채 서른도 되지 못한 자에게 패했다는 건 어디를 가나 웃음거리가 될 것은 분명하다.
‘끙, 일어나긴 해야 하는데…….’
너무 오래 누워 있었는지 허리까지도 욱신거린다.
어떻게 일어나면 덜 창피할지 그는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진검백이 갈지혁에게 연신 캐묻고 있다.
“남만이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설마 갈지혁이 남만에서 왔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독이라면 의당 생각하는 것이 사천당문이다. 그리고 또 그보다 훨씬 더 독에 대해 유명한 문파가 하나 있다.
독황독립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지혁을 독황독립문과 전혀 연관시키지 못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외향이다.
독황독립문은 남만에 있는 문파다. 그랬기에 중원인인 갈지혁이 설마 그곳의 인물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갈지혁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진검백이 아는 독황독립문의 인물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독을 쓰는 이상 확실히 상대를 죽인다. 무조건 죽이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일수만독의 제자였군. 허기야 그의 제자라면 네놈의 그 강함도 이해가 되긴 하지. 정말 내가 들은 게 사실이라면 일수만독은 괴물이니까.”
“네가 얼마나 스승님을 아는지 몰라도 내가 아는 한 그분은 무림 제일의 고수다.”
갈지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갈지혁이 그리 말하는 것을 보며 진검백은 일악천이 어떠한 인물일지 대충 감을 잡기 시작했다. 저 고집불통인 놈이 저토록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게다. 그만큼 갈지혁이 일악천을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
진검백이 말없이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독황독립문의 인물에, 일악천의 제자다.
“……왜 왔냐?”
“무슨 말이냐?”
“무림에 왜 왔냐고.”
“전에도 말했을 텐데.”
갈지혁은 손가락으로 벽에 세워 놓은 깃발을 가리켰다.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바로 그것이다.
“독왕이 되기 위해.”
“네가 중원인이라고 해도 무리야. 그런데…… 독황독립문의 인물이라는 게 밝혀지면 넌 죽어.”
갈지혁이 정말로 순순하게 독왕이 되고자 한다 해도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죽음은 당연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만큼 중원에서 독황독립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더군다나 일수만독 일악천이라면 더더욱!
그의 손에 죽은 정파 무림인의 수는 몇백을 넘어서 몇천에 다다른다. 그가 휘두른 일수에 중원 무림은 몇십 년을 퇴보했다. 일악천의 독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지금도 일악천이라는 이름을 입으로 꺼내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다시피 할 정도이니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런 일악천의 제자다.
알려지면 일악천에게 원한이 있는 자부터 정파 무림의 칼이 갈지혁에게 쏟아질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