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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55화 (55/200)

# 55

5화

“상관없어. 어차피 죽음을 각오하고 걷는 길이니까. 그만한 각오도 없다면 독왕이 될 수는 없지.”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검백은 갈지혁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말대로 정말로 독왕이 되기 위해 무림에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다시금 독황독립문의 마수가 중원으로 뻗치게 하기 위한 디딤돌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만약의 상황에는 베어야 할지도 모른다. 갈지혁을.

비록 긴밀한 사이라고 보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진검백은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정파 무림을 생각한다면 화산파의 장문인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지만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아직, 잠시만 더 지켜보자.’

잠시 고민하던 진검백은 마침내 답을 내렸다.

어차피 옆에 있는 이상 갈지혁은 쉽사리 이상한 행동을 하지 못할 게다.

이렇게 돌아가기엔 아직 갈지혁의 행보가 너무나 궁금하다.

그때 계속해서 누워 있는 척을 하던 이풍이 기척을 냈다.

“흠흠!”

진검백은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이풍을 이용해 살렸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얼마나 쓰러져 있던 거지?”

“다섯 시진 정도 되셨습니다. 독에 중독이 되셔서…….”

“그래? 꽤 길군.”

담담한 척 말하지만 이풍은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무던 애를 쓰고 있는 입장이다.

그는 갈지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일악천의 제자로군. 호랑이의 밑에서 강아지는 나오지 않는다 하더니…….”

“감사합니다.”

갈지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풍으로서는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악천에게 패했고, 제자인 갈지혁에게 패했다. 하여간 일악천과 관련된 것은 이풍에게는 언제나 악몽처럼 다가온다.

“좋아, 인정하지. 난 너한테 졌어.”

“그랬지요.”

“쳇! 이야기나 들어! 난 일악천과 만나 이야기를 했다. 아까 말했듯이 그가 너를 도와달라고 하더군. 말한 대로 너를 실험해 봤고, 통과야. 날 이긴 놈에게 답은 내려졌지.”

다소 씁쓸하다는 듯한 어조다.

마음을 정한 이상 이풍은 일악천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재력 쪽으로 아끼지 않고 갈지혁을 돕겠다던 그 약속을 말이다.

“내가 도와주지. 무림에서 나만큼 돈이 많은 놈은 없어. 너에게 내 재력을 주지. 일악천과 한 약속, 네가 무슨 짓을 하던 상관하지 않을 게다. 그 말은 네놈이 죽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알겠느냐?”

진검백은 갈지혁을 바라봤다. 지금 갈지혁은 엄청난 조력자를 얻는 것이다.

황금귀 이풍이라면 무공도 그렇지만 재력에 한해서는 무림 최고다.

혹시나 갈지혁이 정파 무림에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이 마당에 재력까지 생긴다면 그야말로 호랑이가 날개를 다는 격이 아닌가.

가만히 있던 갈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그것이 갈지혁에게 해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 필요 없다면 손을 벌리지 않으면 그만이다.

더군다나 일악천이 준비한 것이다. 생각이 있고, 필요한 것이기에 갈지혁에게 주고자 하는 것일 게다.

일악천의 안배라면 무조건 따르리라.

이풍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허리에서 뼈가 비명을 질러댔다. 오랫동안 침상에 몸을 맡긴 채로 불편한 자리를 한 탓이다.

이리저리 허리를 비튼 이풍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야 살 것 같군.”

* * *

마차 한 대가 커다란 대로를 가로질렀다.

한눈에 봐도 그 마차의 주인은 대단한 돈을 가졌을 게 분명했다. 마차를 끌고 있는 네 마리의 말 모두 흑마였다. 그 네 마리는 모두 윤기가 좌르르 흘렀고, 다리에는 힘이 넘쳤다. 땅을 박차는 순간순간이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그뿐만이 아니다. 말도 그렇지만 마차 또한 그렇다. 화려하지 않게 치장되어 있지만 한눈에 봐도 최고급의 재료들만 사용해 만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지만 마차 안은 그다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마차 안에는 세 명이 앉아 있다.

황금귀 이풍, 갈지혁과 진검백이다.

이 마차는 황금귀 이풍의 것이다. 그는 태평하게 눈을 감은 채로 졸고 있었다.

그의 남루한 행색에 어울리지 않지만 이 마차는 이풍의 것이다.

그 누가 이러한 남루한 노인이 무림 최고의 갑부인 황금귀라고 생각하겠는가. 진검백은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이풍을 보며 이런 자가 황금귀라는 사실이 믿기가 어려웠다.

그는 이풍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갈지혁은 잠에 빠지지 않았다. 마차가 크게 흔들리지도 않아 자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음에도 갈지혁은 자지 않았다.

‘허기야 평소에도 잠을 아끼는 놈이니…….’

갈지혁을 만난 지 다소 시간이 흘렀지만 단 한 번도 그가 오랫동안 숙면을 취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진검백의 시선을 느꼈는지 밖을 보고 있던 갈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아니다. 그냥 네놈 얼굴이 갑자기 궁금해서 말이야.”

“궁금할 것도 없군. 그것도 남자 얼굴이.”

갈지혁이 물어오자 진검백은 가볍게 받아 넘겼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갈지혁 또한 대꾸하고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들은 황금귀의 거처로 가고 있다. 벌써 마차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한 지사 일이 지났다.

황금귀의 거처는 사천에 있다.

황금산장(黃金山莊)!

그곳에는 금이 있다. 천하를 흔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런 황금산장의 주인이 바로 황금귀 이풍이다.

그는 천재다. 무공도 그렇지만 적어도 상술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이풍의 손을 거치면 한낱 돌멩이라도 결국은 금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만큼 이풍은 능력이 있다.

황금산장은 그런 이풍의 모든 것이다. 이미 몇 대 전부터 어마어마한 돈을 지녔던 황금산장이지만 이풍이 주인이 되면서 이제는 무림 최고의 재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풍의 말에 따라 갈지혁과 진검백은 행로를 바꾸었다. 그들은 다른 문파를 찾아가는 걸 뒤로 하고 황금산장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만 하면 되니 여행은 너무나 편했다. 진검백은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편해서 좋긴 하지만 오히려 이런 건 무인에게 독이 된다. 나름대로 항상 긴장을 하지 않는다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무림이다.

무림에 몸담은 이상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

진검백은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아름답다. 세상 최고의 미인이 온다 한들 이만큼 아름다우랴.

검은색과 붉은색이 절묘하게 조화된 검집에는 매화꽃이 만발한다. 한 손에 꽉 쥐어 잡히는 손잡이, 그리고 푸른빛을 토해 내는 검신.

검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앉아 있던 진검백이 정신을 차린 것은 앞에서 자고 있던 이풍이 깨면서였다.

늘어지게 자고 있던 그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착했군.”

그제야 진검백은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어 주변의 관경을 살폈다.

산이다, 산이 보인다.

황금산장은 산 위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산에 있다면 그만큼 불리한 것이 많다.

특히 물건을 파고 사는 입장에서는 너무나 안 좋은 위치다. 그런 이유 탓에 수많은 분타들이 무림 곳곳에 퍼져 물건들을 관리하고 있다.

“저 산이야.”

“그렇군요.”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보고 이풍이 말했다. 진검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꺼냈던 검을 허리에 찼다. 슬슬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갈지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 또한 소매를 툭툭 흔들면서 사황에게 가벼운 신호를 보냈다. 귀찮다는 듯이 사황이 목과 옷 사이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저놈 또 고개를 내미는구먼. 내 마차에 짐승은 안 되는데 말이야.”

이풍이 이죽거렸다. 아무래도 사황 덕분에 패배를 다시금 경험하게 되었으니 심통이 이는 모양이다.

갈지혁은 말없이 사황의 머리를 쿡쿡 눌렀다.

사황은 다시금 옷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리고 마차가 멈추어 섰다.

“내리지. 이곳부터는 마차로 움직이지 못하거든.”

아무리 뛰어난 말이라고 해도 마차를 끌고 이러한 산을 헤집고 다니는 건 힘들다. 만약 가능하다 해도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게다. 차라리 직접 움직이는 것이 낫다.

셋은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이풍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손을 휘휘 저으며 대꾸한 이풍은 그대로 산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뒤를 갈지혁과 진검백이 쫓았다.

돈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있다 했다. 산을 올라가는 내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진검백은 저들의 목적지가 대부분 황금산장일 거라고 판단했다.

꽤나 산세가 험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는 것은 오직 황금산장 때문이다. 그곳과 거래를 트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재물을 얻을지 모르는 기회를 만든다.

그 누구도 이풍을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그가 지금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황금산장의 주인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행색이 남루했고, 별 볼 일 없어 보였다. 오히려 황금산장에 구걸이나 하러 가는 거지로 보기 딱 십상이다.

“좀 쉬고 가지.”

이풍이 나무 아래로 가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셋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다. 이 정도의 산행에 지치거나 할 턱이 없다.

이풍은 단순히 오랜만에 찾아온 이곳의 경치를 감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바로 옆에 있는 나무에서 쉬고 있던 부유해 보이는 자가 말했다.

“이런 젠장 비렁뱅이 새끼가…… 냄새 나니 썩 꺼지지 못할까!”

셋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손에 든 부채를 연신 흔들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면 이풍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풍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상대를 바라봤다.

그 또한 이곳에 온 자라면 무엇이 목적인지 알고 있다. 물론 몰라서겠지만 황금산장에 무엇인가 바라고 온 자가 주인인 이풍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이풍이 히죽 웃었다.

“어이구, 이 양반 보시게. 냄새가 나긴 뭐가 난단 말이오. 이래 봬도 두어 달 전에 씻었는데…….”

“……지금 네놈이 그 더러운 혀로 날 놀리는 게냐?”

사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거한이 눈을 부라리며 앞에 나섰다. 둘 모두 검은 색 옷을 입었고 도를 들었다. 산만한 덩치의 두 사내가 매섭게 눈을 부라리니 무섭기도 하련만 셋에게 그 모습은 오히려 우습기만 했다.

덩치는 크지만 그들은 셋 모두에게 오 초 이상을 받아 내기 힘든 자들이다. 그런 자를 믿고 나서는 사내가 우습기만 하다.

갈지혁은 원래 귀찮은 일에는 간섭 안 하는 편이라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반면 진검백은 재미있겠다는 듯 눈을 빛냈다.

이풍은 장난기가 도졌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자, 장난이라니요. 이놈이 나이를 먹다 보니 말이 좀 헛 나와서 헤헤…… 행색을 보아하니 꽤나 대단하신 분 같은데 뉘신지요.”

“어흠! 본인은 사천 길흠에 살고 있는 좌대운이다. 너 같은 비렁뱅이와는 다른 사람이지. 오늘 또한 황금산장의 주인과 약속이 있어 온 것이다. 흠흠.”

“황금귀와 약속! 대단하신 분이군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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