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58화 (58/200)

# 58

8화

그때 갈지혁은 이자에게 밀렸다. 제대로 실력을 모두 발휘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사내 또한 마찬가지다.

갈지혁과 이 사내는 단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갈지혁이 사독문에 있을 때 지대익과 함께 왔던 정체불명의 이십 대 사내가 바로 이 자다. 만약 이자가 없었다면 지대익 또한 무림에 손을 뻗칠 생각을 그리 쉽게 하지 못했을 게다.

“재미있게 노는군. 어디로 튈 줄 모르는 공 같아.”

갈지혁은 상당히 재미있는 장난감이다.

여태까지 가지고 놀던 그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즐길 수 있을 장난감이 될 게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강한 바람과 함께 휘날리던 주변의 나뭇잎들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신과도 같은 힘으로 보였다.

주변의 모든 생물들이 힘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사내가 손을 내리며 싱긋 웃었다.

너무나 순수해 보이는 미소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지독한 무서움이 감춰져 있다.

“갈지혁 넌 죽어. 단화초의 위치를 뱉는 그 날이…… 네놈이 죽는 날이야.”

말하지 않으려 들겠지만 결국 갈지혁은 단화초가 있는 곳으로 향할 게다.

그 위치만 파악된다면 갈지혁을 살려 둘 이유는 없다.

죽이고 싶은데 죽일 수 없는 건 갈지혁이 처음이다.

사내는 근질거리는 손을 애써 자제하며 걷기 시작했다.

* * *

황금의 품 안에서 갈지혁과 이풍이 마주했다.

사방이 번쩍인다. 황금의 냄새가 코를 마구 자극한다. 이풍이 옆에 있는 황금 더미 위에 털썩 앉았다. 그는 가볍게 손으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앉아.”

갈지혁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풍의 품안에서 연초가 빠져 나왔다. 그가 연초를 물었다. 하얀 연기가 허공을 채웠다.

“생각이 있겠지. 말해 봐. 진검백은 화산파의 인물……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다 말할 수는 없을 테지.”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봐.”

“현실에서 독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이풍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고민을 하거나 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만큼 독왕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네 놈은? 가능하다고 생각하겠지.”

“저 또한 처음에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십 년을 잡았지요. 하지만 알았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갈지혁의 말은 너무나 예상 밖의 것이었다. 이풍은 눈을 크게 떴다. 예상을 어긋난 것도 그렇지만 저렇게 포기가 빠른 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모한 것도 문제지만 그토록 일악천이 칭찬하던 고집스러운 모습이 없다.

일악천은 사람을 잘못 봤다.

‘인물이 아니야. 일악천은 그릇을 잘못 봤어.’

이풍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독문에 갇혀 갈지혁만을 생각하던 일악천이 가엽기까지하다. 그때 갈지혁이 말을 이었다.

“너무 길게 잡았습니다. 오 년입니다. 오 년 안에 독왕이 되지 못하면…… 그 이후로는 불가능합니다.”

“……잡았던 시간이 길었다는 거군.”

“무림은 절 십 년이나 놔두지 않을 겁니다.”

“오 년이라는 시간을 잡은 이유는?”

“아직 제대로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곧 답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이풍이 갈지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순간 실망이 일었지만 오해였던 모양이다. 확실히 일악천에게 그토록 믿음을 줬다는 건 뭔가를 보였기 때문이리라.

“나에게 부탁할 것도 있을 게다. 말해 보거라.”

갈지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품안에 있는 서찰을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이풍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놈, 벌써부터 준비를 한 게냐?”

“진검백이 있어서 서찰로 제 뜻을 보이려 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말로 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이풍은 갈지혁의 말을 들으면서 서찰을 펼쳤다. 서찰 안에는 갈지혁이 요구하는 여러 가지가 적혀 있다. 이것저것 살피던 이풍은 절로 한숨을 흘렸다.

완전히 약초꾼이나 되야 할 것 같은 탓이다.

“좋아. 일악천과 약속한 것이 있으니 모두 들어주지. 하지만 네 말대로야. 오 년 안에 끝내. 네 말대로 시간이 지나 불가능하다면 오 년 후에는 도망치는 게 나을 게다.”

“고맙습니다. 그럼 전 황금귀만 믿겠습니다.”

“고마울 것도 없고 믿지도 마라. 어차피 약속이라서 들어주는 것뿐이고, 장사치인 날 믿어 봤자 네놈에게 좋을 것 하나 없다. 그럼 썩 물러가거라. 나 또한 이래저래 준비할 것이 있으니.”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위로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할 말은 했고, 또 이풍에게서 얻을 것도 이미 전했다. 남은 것은 갈지혁의 행동이다.

그냥 독왕이 되겠다고 노력해서는 독왕이 될 수 없다. 주변의 상황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독황독립문이 변수다.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지만 일악천에게 들은 바대로라면 분명 조만간 무림에 손을 뻗치려 들 게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단화초, 그리고 그걸 아는 건 갈지혁뿐이다.

막 거처로 돌아가는 갈지혁의 눈에 진검백이 보였다. 그가 벽에 기댄 채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여어. 이야기는 잘 끝냈나?”

“그래.”

진검백 또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갈지혁이 이풍을 만나고 왔을 거라는 것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리고 그렇게 은밀하게 만난 것이 진검백 자신이 알게 하는 것이 꺼림칙해서라는 것도 안다.

막 위로 올라서던 갈지혁이 몸을 돌렸다.

“왜 아무런 말도 없냐.”

“애초부터 네가 나에게 모든 걸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거든.”

벽에서 몸을 떼며 진검백이 갈지혁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진검백은 갈지혁의 코앞까지 다가와서 그를 바라봤다. 갈지혁 또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진검백을 마주했다. 그렇게 둘은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진검백이 말했다.

“네가 인륜에 어긋나는 짓을 하기 전까지는 난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한 말을 어겼을 때 난 너를 죽일 거고.”

진검백은 죽인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그리고 갈지혁 또한 그 말에 특별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황금귀 이풍, 대단한 재력가지. 분명 너에게 큰 힘이 되 줄 거야. 하지만 재력으로 네가 독왕이 될 수는 없어.”

“알아. 재력으로 독왕이 될 수 있었다면 그게 독인들의 꿈이었을 리도 없지. 도움을 받을 뿐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독왕이 될 수 없으니까.”

진검백이 허리에 찬 검을 가볍게 꺼내 들었다. 그의 검이 갈지혁의 목에 와 닿았다. 차가운 한기가 갈지혁의 목을 시리게 했다. 갈지혁은 말없이 검날을 바라봤다.

조금만 힘을 주면 갈지혁은 죽을 게다. 그만큼 검은 그의 목에 바짝 붙어 있다.

“기억해. 나의 검이 지금은 너와 함께 있지만, 해서 안 될 짓을 한다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날 벨 수 있을까?”

“어렵겠지. 하지만 그 이유는 네가 강해서가 아니야. 널 베려면 너와 함께했던 추억까지 함께 베야 하니까. 뭐, 추억이라고 할 것도 없나?”

말을 마친 진검백은 다시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검을 넣은 진검백이 물었다.

“이제 슬슬 다음 행로를 정해야겠지?”

갈지혁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였다. 새로운 힘이 생기면서 선택의 폭이 더 넓어졌다.

고민을 하던 갈지혁이 마침내 답을 내렸다.

“사천당문.”

“사천당문으로 간다고?”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당문의 독이 보고 싶어서 말이야.”

“미친…… 혼자 가면 죽어.”

“너도 있잖아? 혼자는 아니지.”

“젠장, 그래서 더 싫다는 거다.”

진검백은 말을 툭 내뱉었다. 그 모습에 갈지혁은 입꼬리만 슬쩍 들어 웃고는 이내 말했다.

“꼭 싸우러 간다는 건 아니야. 단지…… 가 보고 싶을 뿐이야. 중원 제일의 독가인 사천당문에.”

“농담이 아냐. 사천당문이라면 여태까지 네가 상대한 문파들과는 격이 달라. 대체 네놈은 목숨이 몇 개냐?”

“하나. 그래서 나 또한 이러는 거다. 목숨이 여럿이었다면 이렇게 걸지도 않지. 그만한 가치가 없을 테니까.”

갈지혁은 진지했다.

어차피 진검백 또한 갈지혁이 가자고 한 이상 그리 될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단지 사천당문 전체와 싸우려 드는 게 아닌지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좋아, 가자. 사천당문이라면 너라면 몰라도 난 죽이지 않겠지. 화산파의 무인이니까.”

진검백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행로를 정하자 결단은 빨랐다.

이튿날 당장 이풍을 찾아간 갈지혁이 자신의 행로에 대해 말한 것이다.

“사천당문이라…… 비록 그곳이 독에 대한 많은 자부심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중원 무림 최고의 독가(毒家)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하지만 사천당문의 독을 보고 싶습니다.”

“하여간 독인이라는 부류는 말려도 들어먹을 족속들이 아니지.”

이풍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하지만 그 또한 갈지혁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지 너무 나서다가 오히려 화를 볼까 걱정스러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다.

“잘 처신해. 네 말대로 오 년이야. 왜 오 년이라고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조차 줄일 행동은 하지 말도록. 그래, 언제 떠날 생각이냐?”

“지금입니다.”

“그래. 네놈답군. 가는 길에 전에 봤던 우승상이라는 총관을 만나고 가라.

그가 너에게 여비를 줄 게다. 다른 거 뭐 필요한 거 있느냐?”

갈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이풍이 말했다.

“놈, 마차를 빌려 달라든지 여러 가지 있지 않느냐.”

“이 두 손과 제 품 안에서 자고 있는 녀석. 그리고 깃발 이 세 개로 시작했습니다. 몸이 편해지면…… 무뎌집니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그리해라.”

이풍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갈지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음을 먹었다면 빨리 움직여라. 나 또한 밀린 일이나 처리해야겠군.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우리 황금산장의 지부에 연락해라. 각지에 퍼져 있으니 돈 걱정은 없어도 될 거다.”

“감사합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전에도 말했지. 난 장사치야. 날 믿지 마. 고마울 것도 없어. 일악천과 내기를 했고 져서 들어주는 것뿐이니. 그럼 이만 난 나가보지. 오늘은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이풍이 나가자 갈지혁만 홀로 앉아 주변을 살폈다.

이풍의 거처는 황금귀라는 별호에 어울리지 않게 소박한 편이다. 분명 고급스러운 것들로 방안이 가득하지만 단정한 분위기다.

잠시 앉아 있던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사천당문으로 가야 된다.

진검백이 기다리고 있을 게다. 갈지혁은 걸어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돈이 되는 수많은 것들은 쳐다도 보지 않고 갈지혁은 초라해 보이는 깃발 하나를 어깨에 걸쳐 멨다.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깃발이다.

깃발은 갈지혁의 행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처음 때보다 많이 색이 바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