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9화
“뭐해. 어서 나오라고.”
밖에서 진검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알겠다. 기다려.”
갈지혁은 깃발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비록 깃발의 모습은 조금 바랬지만 이 다섯 글자의 의미조차 변한 건 아니다.
갈지혁은 깃발을 어깨에 둘러멨다.
이풍이 높은 단상에 앉았다.
그는 요즘 밀렸던 손님들을 맞느라 혼이 쏙 빠질 정도다. 그 모든 일이 대충 정리됐다. 그런데 오늘 이풍은 특별히 누군가를 맞기로 한 것이다.
며칠 전 황금산장으로 돌아올 때 만났던 좌대운과의 시간이다. 장난기가 동한 이풍이 다시 업무에서 손을 떼기 전에 마지막으로 장난을 치려는 모양이다.
이풍은 단상에 앉아 길게 하품을 했다. 꽤나 지루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좌대운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넓죽 엎드렸다. 좌대운의 입장에서는 이풍과 이렇게 일대일로 대면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몇 마디의 말이라도 해서 가문의 도움이 된다면 그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이풍이 자신을 만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좌대운이 나름대로 돈을 지녔다 하지만 황금귀 이풍의 앞에서는 용암 앞의 반딧불에 불과하다.
“뵈, 뵙게 되어 영광…….”
좌대운은 말조차 끝맺지 못했다. 그만큼 황금귀 이풍을 만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풍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좌대운을 보면서 소리를 죽여 웃었다. 얼마 전 자신과 친구라고 떠들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좌대운은 이풍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그때의 이풍의 행색이 초라했던 것도 있지만 그때 봤던 그 초라한 거지가 황금귀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 탓이다.
“좌대운인가? 내가 이풍일세.”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대면을 하게 될 줄은…….”
“날 어디서 본 적 없는가?”
좌대운은 그제야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이풍을 바라봤다. 이풍이 그리 말하니 어디선가 본 듯도 하다. 그리고 인연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좌대운은 맞장구쳤다.
“어디선가 뵌 것 같긴 합니다만 잘은 기억이 안 납니다.”
“난 기억이 나는데 자네는 모르겠는가?”
“에…….”
형식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풍이 자신을 안다고 하자 좌대운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풍이 자신을 봤다고 한다. 그런데 이풍 같은 거물을 좌대운이 어떤 자리에서 봤단 말인가.
머리를 긁적거리는 좌대운을 보며 이풍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게.”
말을 마친 이풍이 단상 뒤에 있는 천 뒤로 몸을 감췄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깔끔했던 방금과는 달리 지금은 꾀죄죄한 모습이다. 그건 처음 좌대운과 만났을 때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본 좌대운의 눈이 커졌다.
아까는 몰랐지만 지금 행색을 보니 누군지 알겠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설마 길거리에서 본 거지가 황금귀 이풍일 거라고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그에게 자신이 이풍과 나름대로 안면이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종종 만나 술을 기울이기도 한다고 했다.
얼마나 웃었겠는가.
비웃었을 게다. 당장에 구멍이라도 있으면 몸을 감추고 싶다.
“이제 알겠는가?”
좌대운은 할 말을 찾지 못했고 그런 모습을 이풍은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만 봤다.
황금산장을 벗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갈지혁의 뒤에 누군가가 또 따라붙었다. 독황독립문의 인물들이리라.
진검백 또한 알면서도 침묵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막연히 수상한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갈지혁은 독황독립문의 무인이다. 그의 진심을 진검백이 알 리가 없다. 따라붙은 자들이 독황독립문의 문도들이라면…….
갈지혁은 걸쳐 맨 깃발을 다시금 바로 했다.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오간다. 아마 자신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독황독립문에 알려질 게다. 그리고 그건 지대익의 귀로 들어갈 것이다.
‘지운경…… 네놈도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느냐.’
친구라 생각했다.
남만의 외로웠던 시절을 함께 해 줬기에 믿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진심을 이야기하던 친구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어머니까지 베려 한 그 순간부터 지운경은 지기에서 원수로 변했다. 어떻게든 이 빚을 갚을 생각이다.
지금 자신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갈지혁은 왠지 모르게 발에 힘이 들어갔다.
독황독립문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아직 모르지만 분명 때를 노리고 있을 게다. 무림의 일이 점점 복잡하게 흘러간다. 물론 그것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지금 무림은 너무 평안했다.
그만큼 긴장도 풀어지고 나태해졌다.
서로를 헐뜯는 것에 바쁜 무림이다. 그런 자들이 과연 독황독립문의 야욕을 막아 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독황독립문의 지위 체제가 엄격하다. 그리고 모든 힘이 지대익이라는 한 점에 집중됐다. 그의 명령 하나면 수많은 독인들이 목숨을 걸고 검의 폭풍 속으로 뛰어들 거다.
독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리고 무인들은 죽을 게다.
그대로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독황독립문이 설치고 다니는 걸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어이, 서둘러 가자고.”
자신을 부르는 진검백을 힐끔 바라본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독황독립문은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사천당문이라…… 중원 제일의 독가? 훗, 기대되는데.’
* * *
“망할 놈의 걸인!”
진검백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고함을 질렀다.
날씨가 꽤나 덥다. 찌는 듯한 더위가 이제는 짜증만 치밀게 한다. 더군다나 지금 진검백은 방금 만난 걸인 탓에 더욱 화가 난 상태다.
“기껏 동냥까지 해 주면서 물었는데…….”
산이나 인가가 없는 곳만 전전한 지 꽤 된 탓에 이제는 몸이 축 늘어진다.
그러던 중 걸인 하나를 만났고, 근방에 큰일이 있어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이 있다는 걸 들었다. 무슨 일인지까지는 모른다 했지만 꽤나 많은 사람이 모인다 했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그곳이라고 하니 진검백이 방향을 그리 돌린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정작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갈지혁은 멀쩡했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그만큼 더 귀찮고 짜증이 날 만도 하련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다.
남만에서 자라 더위에 익숙한 탓이다.
이 정도 더위는 남만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겨울보다는 이런 더운 여름이 좋다.
사황 또한 마찬가지다. 사황은 이제 갈지혁이 품이 아닌 땅을 기며 오히려 더운 날씨를 만끽하는 듯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진검백은 혀를 찼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갈지혁이 이 같은 더위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안다. 독황독립문이 남만에 있으니 이만한 더위쯤이야
우스울 게다.
진검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칠 듯이 쏘아대는 태양이 짜증이 일게끔 만들지만 그래도 멈추어 있을 틈이 없다.
근방에 사람들이 모인다 했다. 그것도 무인이라고 하니 무슨 일인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어떤 일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는 없지만 우선 가 볼 생각이다.
비록 갈지혁과 함께 다니고 있지만 화산의 무인이다. 무림이 돌아가는 일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진검백은 땅을 기고 있는 사황을 바라봤다.
용케 자신을 쳐다보는 줄 알았는지 쉬릭 쉬릭 소리를 내며 기던 사황도 진검백을 바라봤다. 신기한 놈이다. 말은 못하지만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다.
막 사황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진검백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차 자국인데?”
“멀지 않았다는 소리군.”
땅에 약하긴 하지만 마차 자국들과 말발굽들이 보인다. 근방에 마을이 있기에 이런 흔적이 남는 게다.
“어서 가자고.”
진검백은 신이 난 듯 말했다.
갈지혁과 진검백이 들어선 마을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을 근방에 이르러 사황을 품속에 넣은 갈지혁은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지나가던 걸인에게 들었던 거지만 상상했던 것 보다 무인들의 수가 어마어마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꽤나 중요한 일인 듯하다.
무인들이라고 해서 단순히 검을 들고 설치는 자들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이 마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인들 중 일부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다.
이런 자들이 이름조차 없는 마을에 같이 있다는 건 분명 일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왜, 아는 사람이냐.”
“무명검(無命劍) 설무형이다. 꽤 유명한 자인데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말을 마친 진검백은 주변을 계속해서 둘러봤다.
무명검 설무형을 제하고도 무림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고수들이 수두룩하게 눈에 보인다. 이런 작은 마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진검백의 어깨를 갈지혁이 툭 쳤다. 진검백이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계속 이렇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냐?”
“아아, 식사나 하러 가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식사한 후에 알아보고.”
진검백은 관심을 끊고 갈지혁과 함께 근처 객잔을 찾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인근 객잔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런 대규모의 인원이 들이닥쳤는데 마을에 있는 작은 객잔 두 개로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탓에 갈지혁과 진검백은 객잔에 들어서지 못하고 밖을 서성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런 마을에 갑작스레 이렇게 무인이 모일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근에 딱히 무인들이 모일 만한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문파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돈이 될 만한 것도 있지 않다.
그런데 이 같은 사람이 모였다면 분명 이유가 있다.
서성이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행보를 걱정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진검백을 불렀다.
“이야, 이게 누구야? 진검백 아닌가?”
갈지혁과 마주 선 채로 있던 진검백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그는 눈을 찌푸렸다.
대놓고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말을 걸어온 젊은 사내 또한 만면에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눈에 봐도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아 보였다.
사내는 청색의 옷을 입고 있고 머리는 단정하게 틀어 올렸다. 단박에 깔끔하다는 느낌이 확 풍긴다. 갈지혁과는 정 반대되는 인상을 지닌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옆에 몇 명의 인물이 서 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두 명씩 있다. 그 넷 모두 비슷한 나이 대로 보였고, 외모 또한 빼어났다.
“웬일이냐 네가?”
“너야말로 이곳에 웬일이냐?”
“지나가던 길에 들린 것뿐이야. 그나저나 무당에 있어야 할 네가 이곳에 있는 게 더 이상한데?”
“하하! 나야 일이 있어서 왔지. 누구처럼 빈둥거릴 시간은 없거든. 안 그래 낙화검?”
사내는 낙화검이라는 별호에 힘을 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