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12화
아까 전 봤던 그 독이 생각난다. 청우를 단숨에 무너트린 그 독. 과연 갈지혁은 얼마만큼의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는 독들은 전부 어떠한 것인가.
알 수 없다. 그건 갈지혁만 알 수 있는 문제다.
진검백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갈지혁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 *
적검(赤劍).
붉은색 검신을 지닌 검을 지니고 다니는 무인이다. 그는 언제나 피를 몰고 다닌다. 심지어 그의 검이 붉은 이유가 그만큼 많은 자들을 벤 탓이라고도 말할 정도다.
적검은 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손에 자비를 두지 않기로 유명하다. 무림에서 그만큼 성격이 급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게다.
그에 반해 풍도(風刀)는 무림에서 부드러운 성격으로 유명하다.
온화한 미소와 할 때는 반드시 하고야 마는 결단력 때문에 무림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한다.
완전히 다른 성격처럼 둘의 사이는 좋지 않다.
하지만 사실 그 둘은 어렸을 적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지기다. 언제나 함께 했고, 꿈도 같았다. 둘 모두 무림에 나가기를 원해 결국은 마을을 떠났다.
어린 나이의 일이다. 그렇지만 그 둘은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 버렸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흐른 후 그 둘은 다시 만났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결국 둘은 이십 년 만에 만난 그 날 서로의 병기를 꺼내 들었다. 도와 검이 몰아쳤다. 둘 모두 예상보다 강한 상대의 실력에 놀라 버렸다. 싸움은 길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일이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됐다.
그 질긴 연을 끊기 위해 마지막으로 둘은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만났다. 마지막 대결을 펼치기 위해서. 이번만큼은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을 게다.
답은 곧 내려진다.
먼저 온 적검이 높은 바위에 선 채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마을에서 약 반 시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적검은 왔지만 아직 풍도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적검은 주변에 있는 무인들을 보면서 눈을 찌푸렸다. 둘의 대결이 이야깃거리가 되면서 싸울 때마다 그 광경을 보러 오는 자들이 날마다 늘어 왔다.
마지막 싸움이라고 한 탓인지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관중들이 있다.
무림이 너무 조용한 탓이다. 자그마한 일에도 많은 무림인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몇십 년이나 지속된 적검과 풍도의 관계가 마침내 결정된다고 하니 무림인들 또한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물론 단순히 둘의 대결이 궁금해서 무림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분명 흥밋거리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렇게 먼 곳까지 걸음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무인들도 많다.
이렇게 많은 자들이 모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둘 모두 활동하는 지역이 귀주성이다. 둘은 귀주성 일대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손꼽히는 무인들이다.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귀주성 근방의 무림이 변한다.
다혈질적이고 불같은 적검이냐, 아니면 포용하면서 감싸 안으려는 풍도냐.
적검은 자신의 애병을 쓰다듬었다. 붉은 검신이 요사스럽게 빛난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죽을지도 모르는 싸움을 해야 하는데 이토록 기분이 유쾌한 건 좋은 징조다. 이런 날 질 리가 없다.
막 눈을 감은 채로 검날을 손으로 쓰다듬던 적검이 눈을 부릅떴다.
“오! 풍도다!”
누군가의 외침이 귓가에 들리기도 전에 적검은 이미 그가 왔음을 알아차렸다.
질긴 인연이다. 이제는 끊어야 할 때도 됐다.
그리고 그 악연의 종지부를 찍은 후 웃게 되는 건 바로 자신이리라.
적검은 고개를 들어 앞쪽에 나타난 사내를 바라봤다. 벌써 오십 줄에 들어선 지 오래다. 적검과 달리 풍도는 흰색의 검소한 옷을 단정하게 차려 입었다.
붉은색의 요란한 옷을 입은 적검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풍도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쓱 둘러보고는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무림 동도 분께서 이 같이 소생들에게 관심을 보이시니 감사하기 한량없소이다.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저와 이 친구의 싸움에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으면 하외다. 답을 내려야 할 때가 된 듯하니. 안 그런가 적검?”
“네 놈이 그리 말 안 해도 나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다. 더 이상 네놈 면상을 보는 것도 지겨워 못 버티겠다. 오늘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죽는 거다. 그 전까지 내 검은 멈추지 않을 게야.”
이제 나이가 먹어 거의 노년에 접어들기 시작한 풍도는 등 뒤에 있는 도를 꺼냈다. 그다지 특별 난 것이 보이지 않는 도다. 그렇지만 풍도라고 하면 도에 일가견이 있는 고수다.
바람 같이 매섭고 빠른 도법을 펼친다 하여 풍도라는 별호도 얻었다. 이제는 이름을 지웠다. 오로지 풍도라는 무인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오냐. 내가 오늘은 네 도를 반드시 꺾고야 말 게다.”
붉은 검이 살기 가득한 빛을 토해 냈다.
둘은 크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눈빛만 봐도 서로가 어떻게 지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적검이 검을 빼 들기가 무섭게 움직였다.
창창!
검이 기기묘묘하게 꺾이며 풍도를 노렸지만 그의 도가 가볍게 적검의 검을 받았다. 검을 뒤로 밀치면서 풍도가 외쳤다.
“적운십이로(赤雲十二路)!”
도신이 순식간에 수십 개로 변하면서 적검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적검은 그러한 풍도의 공격에 전혀 당황스럽지 않다는 듯이 가볍게 검을 들어 대꾸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변화와 함께 쏟아지는 도였지만 적검은 가볍게 막아 냈다. 너무나 풍도에게 익숙한 탓에 가능한 일이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 상념에 잠겼다.
‘내가 월등하게 강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적검은 자신이 강해지면서 풍운 또한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적검 자신은 그를 꺾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또 아닌 듯하다.
손에 와 닿는 묵직한 느낌과 현묘한 변화였다. 이 정도라면 어느 정도 예상은 간다. 쉽사리 상대했다가는 단숨에 풍도의 도에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역시 적검인가. 검이 더 날카로워졌군.’
반면 풍도 또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진 적검의 검에 놀랐다. 그 또한 적검이 강해질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둘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 든 채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만 보던 진검백이 갈지혁에게 말했다.
“이런 구경이 재미라도 있냐?”
“재미로 보는 건 아니지. 할 일이 있으니까.”
“도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이만큼 큰 무대가 만들어졌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지.”
갈지혁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갈지혁은 엄청난 일을 벌이려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지만 위험한 놈이다.
“적검과 풍도…… 둘을 내가 꺾으면?”
“뭐? 너 지금 설마…….”
“아직은 아니야.”
갈지혁은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적검과 풍도는 싸우지 않고 약점을 찾기 위해 서로를 탐색했다. 진검백은 갈지혁을 바라봤다. 분명 이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이만큼 큰 무대에 질 좋은 관중들은 쉽사리 얻을 수 없다. 이름을 계속해서 얻으려는 갈지혁에게 분명 좋은 자리다.
누가 듣는다면 웃을지도 모른다. 귀주성의 패자라고 해도 되는 두 명의 무인을 나이도 어린 갈지혁이 꺾는다 어쩐다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우습겠지만 진검백은 아니다. 그는 갈지혁의 진면목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위험한 놈…… 이상한 짓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만.”
그건 단순히 희망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갈지혁이 벌이는 일이라면 분명 쉽사리 넘어가기 어려운 것일 게다. 그래도 말릴 수는 없다.
갈지혁은 말린다 해서 그것을 들을 인물이 아니니까.
적검과 풍도는 서로의 무공을 마구잡이로 쏟아 냈다. 하지만 둘 모두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 둘의 실력이 너무나 엇비슷한 탓에 그 누구도 한쪽에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들이 펼치는 무공은 하나하나 모두 위협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처 하나 나지 않고 피해 내는 것이 둘의 무공이 얼마나 빼어난 지를 보이고 있다.
풍도의 도는 빠르면서도 정교했다. 도라기보다는 검에 가까운 능력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도의 묵직함 또한 잃지 않았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의 도 앞에서 적검 또한 붉은색의 기운을 연신 터트렸다. 너무나 날카로운 그 공격에 풍도의 도는 종종 방향을 잃곤 했다.
“적검과 풍도…….”
갈지혁이 중얼거렸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눈은 그 둘의 싸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귀주성을 대표하는 무인들답게 둘의 실력은 무림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것이다.
둘의 대결을 보고 있던 진검백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칠천룡의 인물들이 그곳에 있다. 그들 또한 이 싸움을 보기 위해 아까 전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또한 갈지혁과 진검백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청우는 눈을 부릅뜨고 갈지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갈지혁에게 청우는 관심 밖의 대상이다. 나머지 칠천룡이라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갈지혁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건 적검과 풍도 또한 그렇다.
그 둘이 강하긴 하지만 갈지혁은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 정도의 자들도 제압하지 못하고 어찌 무림과 싸울 독왕을 꿈꾸겠는가. 갈지혁은 품 안에서 수투를 꺼내 손에 씌웠다.
진검백이 옆에서 힐끔 바라봤지만 갈지혁은 그저 가볍게 어깨만 돌렸다.
어차피 진검백 또한 갈지혁의 생각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다.
어느새 싸움터였던 돌이 가득한 공간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둘의 기운이 부닥치면서 엄청난 파장이 일기 시작했다.
마침내 적검과 풍도의 병기가 마주치면서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는 형상이 되어 버렸다. 둘은 내공까지 쥐어짜면서 힘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갈지혁이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때라고 판단 한 걸 게다.
하지만 아무도 앞으로 걸어나가는 갈지혁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둘의 공간 속에 끼어들기 전까지는.
태연하게 걷던 갈지혁이 지척에 이르자 적검과 풍도는 슬쩍 곁눈질을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긴장을 푸는 쪽은 밀리게 된다. 그랬기에 둘은 갈지혁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 또한 갑작스러운 갈지혁의 등장에 웅성이기 시작했다.
적검이 쥐어짜는 목소리로 말했다.
“냉큼 물러서라. 우리의 싸움에 끼어들면…… 용서치 않겠다 했다.”
“지금 안 멈추면 둘 다 죽을 텐데?”
갈지혁의 말에 풍도는 식은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슬쩍 봐도 어려 보이는 자다. 그런 자가 적검과 풍도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적검과 풍도는 서로를 바라봤다. 둘 모두 갈지혁 정도 되는 자의 등장에 흔들릴 생각은 없다. 그들은 갈지혁을 모른다. 그저 철모르는 애송이로만 보인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저자가 그 독을 쓰면서 섬서를 시끄럽게 한다는 그놈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적검과 풍도 또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 둘 또한 갈지혁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독을 쓴다 했다. 이런 상태에서 독에 당한다면…… 속수무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