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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64화 (64/200)

# 64

14화

갈지혁의 손에 녹색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변에 흐르던 것들이 손으로 집중됐다. 결을 이용한 장법을 휘두르려는 것이다.

“요행에 당한다면 당신이 부족해서 그럴 터. 받아보시죠.”

말을 마친 갈지혁이 수라독공을 운기한 채로 장법을 펼쳤다.

손바닥의 숫자가 순식간에 열 개로 변했다. 일 수에 열 번의 공격이 펼쳐진다. 적검은 검을 들어 올린 채로 검막을 펼쳤다. 방어를 한 후 바로 반격에 들어서려는 것이다. 독을 쓸 거라 생각했는데 장법을 날렸다.

적검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검막을 펼쳤고, 그 위로 갈지혁의 손이 쏟아졌다.

“우욱!”

한 번이 닿는 순간 이미 적검은 막아 낼 수 없음을 직감했다.

지금 갈지혁은 전력을 다해 장법을 펼쳤다. 압도적인 강함을 보이기 위해 평소와는 다른 모든 전력을 쏟아 부은 것이다.

두 번째 장법이 닿는 순간 검막이 깨졌다. 동시에 세 번째 장력부터 적검은 몸으로 받아 내야만 했다.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떴다.

퍼퍼퍽!

수차례의 공격. 그리고 갈지혁의 손이 멈추는 순간 적검은 이미 멀리 날아가 커다란 바위에 틀어박혀 피를 토해 냈다.

“크아악!”

등뼈가 박살이 난 듯하다. 적검은 그대로 앞으로 풀썩 하고 쓰러졌다.

풍도는 적검이 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몸을 감은 거미줄 탓도 있지만 문제는 다리를 칭칭 감고 있는 뱀 한 마리 탓이다. 갈지혁의 품에서 빠져 나온 사황이 그의 다리를 타고 이빨을 들이대고 있다.

움직이면 물릴지도 모른다.

분명 지독한 독이 있을 것이고, 풍도는 버티지 못할 게다.

갈지혁이 풍도를 힐끔 바라봤다.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거미줄로 제압한 그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다.

싸움은 끝났다. 적검은 일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풍도는 움직이지 못한다.

관중들은 아예 침묵에 잠겼다. 이런 싸움은 처음이다. 병기들끼리 부닥치거나, 폭풍 같은 공수가 오가는 싸움만을 봐오던 그들이다.

이건 싸움이 아니다. 너무나 일방적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갈지혁의 강함을 더욱 실감나게 느꼈다. 아니, 독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귀주성을 흔드는 두 무인이 단지 독이라는 것 하나에 우습게 무너져 버렸다.

갈지혁은 상처 하나 없이 싸움터를 빠져 나왔다. 풍도의 다리를 꽁꽁 묶고 있던 사황도 갈지혁의 뒤를 쫓았다.

사람들이 갈지혁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 쫙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주변에 붙으면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신이다.

이 자의 옆에 가면 죽는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연신 때린다.

“가자.”

갈지혁은 진검백 앞에 가서 말했다. 진검백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진다. 마치 저놈은 누구냐는 듯한 느낌이다. 개중 몇 명은 자신을 알아 본 듯 수군거리기까지 한다.

‘에라 모르겠다.’

화산파의 무인이지만 지금은 그저 진검백일 뿐이다.

진검백은 몸을 돌렸다.

* * *

불이 타 들어간다.

춥지 않은 여름밤이다. 하지만 갈지혁과 진검백 사이에서는 모닥불이 타고 있다. 간단히 식사를 하기 위해 만들었던 불인데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진검백은 불을 쑤시던 나무도 반으로 뚝 하고 꺾어 버렸다.

불 속에 나머지 나무를 던져 넣은 진검백은 앞에 있는 갈지혁을 바라봤다.

대부분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의 실력은 이 정도쯤 된다고 판단한 잣대가 있다. 그런데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적어도 어제 보았던 갈지혁은 조금 색달랐다.

꼭두각시의 독, 그리고 칠갑지주라는 거미의 거미줄.

‘그 독은 그렇다 쳐도 그 알 수 없는 얇은 줄은…….’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풍도의 몸을 파고들던 그 줄은 진검백조차 딱히 대응할 방도를 찾지 못할 것이었다.

갈지혁을 쳐다보던 진검백이 말했다.

“아직도 널 모르겠군. 도대체 어디가 네 한계냐?”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리야.”

“실력을 아직도 많이 숨기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뭐 마음대로 생각해.”

갈지혁은 확신한 대답을 하지 않고 말을 끝냈다. 진검백은 역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었다고 해도 이처럼 대답했을 게다.

무림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이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언제나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한 수를 준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림에서 사는 게 쉽지 않다. 하물며 갈지혁처럼 사방에 적을 둔 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적검…… 죽였냐?”

“아니. 그 정도에 죽는다면 이름에 맞지 않는 놈이겠지.”

그대로 혼절했지만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여태까지처럼 갈지혁은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이다.

속을 알 수 없다. 도대체 언제쯤 모든 것을 보여 줄지도 모르겠다.

갈지혁이 자리에 눕는 것을 보며 진검백은 자신의 옆에 놓여 있는 검을 힐끔 바라봤다. 갈지혁과 함께 하면 함께 할수록 검을 보는 횟수가 늘어난다.

왠지 모르게 커져 가는 갈지혁의 무게 탓이리라.

갈지혁은 잠에 빠졌지만 진검백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침묵에 잠겼다.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활활 타오르며 토해 내던 불빛도 사그라졌다.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했다.

갈지혁의 건너편에서 앉은 채로 그를 응시하던 진검백도 슬슬 자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어제 갈지혁은 적검과 풍도를 꺾었다. 소문이 날 게 분명하다. 적검과 풍도의 싸움을 보기 위해 왔던 많은 무인들이 갈지혁을 봤다.

그리고 그의 무위를 봤다.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아마 삽시간에 그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 나갈 게다.

갈지혁은 애초에 원했던 목적을 이뤘다.

섬서에서는 나름대로 이름이 나 있지만 사천에서 갈지혁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귀주성을 양분한다고 해도 되는 적검과 풍도를 우습게 이긴 갈지혁이다.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질 게 분명하다.

막 잠에 들려던 진검백이 번쩍 눈을 뜨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숨기려고 하지 않는 걸 보면 살수같이 악한 목적을 가지고 오는 자는 아닐 게 분명하다.

“냄새가 나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진검백은 숫자를 파악했다. 얼추 다섯 명 정도 되어 보이지만 살기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주변을 맴도는 듯하던 그 일행들은 이내 진검백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검은색 옷으로 몸을 감쌌고, 그 수는 여섯이었다.

나이 든 노인 하나에 중년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가 둘, 그리고 젊은 사내 둘과 여인 하나였다.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그들은 진검백을 보자 처음엔 적의를 띠었다. 그러자 오히려 앉아 있던 진검백이 피식 웃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자들은 자신이 아니라 저들이 아닌가.

적의를 보여도 이쪽에서 보여야 옳다.

갈지혁은 아직도 눈을 감고 있지만 깨어 있을 게 분명하다. 아마도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는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게다.

검은색 무복의 인물들을 바라보던 진검백은 이내 그들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사천당문입니까?”

“그러는 자네는?”

“화산파의 진검백이라고 합니다.”

“화산파였군그래.”

진검백의 예상대로 그들은 사천당문의 무인들이었던 것이다.

화산파라는 말에 노인은 안심한 듯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진검백이라는 이름을 자신이 알고 있음도 알아차렸다.

“화산파의 진검백이 왜 여기에 있지?”

“일이 있어서 말이지요.”

진검백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노인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부터 해서 그 뒤를 따르는 자들 또한 녹록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사천당문 내에서 꽤나 높은 배분을 지닌 자일 게다.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독의 무서움을 가장 잘 아는 진검백이다. 독을 우습게 보지 않는다.

“저 친구도 화산파인가?”

잠을 자는 척하는 갈지혁을 가리키며 노인이 묻자 진검백은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파의 무인이라고 생각하기에 갈지혁의 행색이 너무나 특이하다.

“아, 늦었군. 내 이름이 당풍이네.”

“당문 문주의 외숙부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그러네. 꽤나 당문에 대해 아는 듯 해 보이는군.”

“아닙니다. 그저 당풍이라는 존함을 귀동냥으로 들은 듯해서 그렇습니다.”

“저 놈이 당삼경, 당무, 이 젊은 두 놈이 당적성과 당환이네. 그리고 저 유일한 여자애가 내 손녀딸인 당희경이네.”

당문 문주의 외숙부인 당풍은 뒤에 있는 자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그러자 진검백이 그들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이며 말했다.

“제 이름은 진검백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낙화검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호를 지니고 있지요. 그리고 저기 누워 있는 친구가…….”

“갈지혁.”

누워 있던 갈지혁이 입을 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모두의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가려진 얼굴이지만 눈은 빛났다.

사천당문이라는 말을 들은 탓이다.

“갈지혁? 섬서의 그 갈지혁?”

당풍은 독의 길을 걷는 사람답게 갈지혁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무림을 시끄럽게 하는 자다. 그것도 독으로 말이다. 독가인 사천당문의 당풍이 그런 갈지혁을 모를 리가 없다.

“맞습니다.”

“허, 자네가 정말 그 갈지혁인가? 독왕대로행이라는 깃발을 들고 비무행을 펼친다기에 정신이 어떻게 된 자인가 했는데 이리 보게 될 줄은 몰랐군그래.”

“정신은 멀쩡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가능?”

당풍은 갈지혁의 당당한 말투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같은 독의 길을 걷는 입장이다. 갈지혁의 말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낄 수 있다는 소리다.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소리다.

독왕이라니…… 무림이 놔두지 않는다.

그게 가능했다면 사천당문에서 여태까지 왜 단 한 명의 독왕도 배출해 내지 못했겠는가. 거대한 뒷배경이 있는 사천당문도 불가능했다. 겨우 한 명이 독왕이라고 떠들어 봤자 그건 시답잖은 일에 불과하다.

당풍은 갈지혁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멍청한 것일까 아니면 그토록 외고집을 지닌 것일까.

괴이해 보이는 사내가 갈지혁이라는 말에 세 명의 젊은 무인들은 눈을 빛냈다. 당문에서 갈지혁에 대한 이야기는 화젯거리다.

그에 대해서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그들끼리 이미 갈지혁이라는 존재가 어떠한 자인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다. 그걸 알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장난이었다면 굳이 이런 길을 걷지도 않습니다. 당신도 독의 길을 걸으니 아실 텐데요.”

“알지. 너무 잘. 그래서…… 네놈이 이상하다는 거다.”

걸어 봤자 결과는 뻔하다. 아무리 독을 잘 쓴다 해도 결국에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현재 독을 쓰는 독인들의 공통된 미래다.

그걸 갈지혁은 무시하려고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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