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23화
사독문에 지대익과 함께 들어갔던 그 날이다.
처음에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무림에서 일수만독이라는 별호와 함께 전설처럼 알려진 자지만 그래 봤자 어렵지 않은 상대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만난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변했다.
바라보던 그 눈빛은 마치 사내의 생각을 모두 본 듯만 하다.
순간 움찔하고야 말았다. 그랬기에 당황했다. 저런 눈빛을 지닌 자가 아직도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일악천은 사독문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주의해야 할 명단에 끼지도 않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갈지혁의 행보다. 갈지혁은 지금 점점 일을 벌이며 무림을 돌아다니고 있다. 아마 그의 발이 향하는 마지막 장소에는 단화초가 있을 게다.
사내는 발로 땅을 연신 두드리며 흥얼거렸다.
괴기스럽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그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흥얼거린다.
사내는 흥얼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온 용무가 끝났다.
막 문 밖으로 걸어나가던 사내는 손을 뒤로 향했다. 그러자 줄에 묶여 대롱거리며 죽어 있던 소년의 몸이 천천히 모래로 변하면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독이다.
어떤 독인지는 모르지만 화골산의 일종일 게다. 너무나 은밀하게 하독되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사내는 한 줌의 모래로 변해 버린 아이의 유골에 가볍게 인사했다.
“다음 세상엔 강하게 태어나라 꼬마야. 큭큭.”
말을 마친 그가 문을 닫았다.
방 안은 다시금 어둠에 휩싸였다.
사내가 향하는 곳은 지대익의 거처였다.
비록 생각하는 건 다르지만 현재 그는 지대익의 수하처럼 들어가 있는 상태다. 지대익은 사내에게 필요한 것을 대주고, 사내는 지대익에게 머리를 준다.
서로 공생하는 관계인 것이다.
지대익의 거처에 이르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남만인들은 중원인들을 꺼린다.
그렇지만 유독 이 사내에게만큼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사내에게서 물씬 풍기는 탓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절대적인 강함은 무인으로서 절로 존경할 만하다.
사내는 거침이 없이 걸었다. 그의 발이 지대익이 있는 서재로 향했다.
드르륵.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서자 책 냄새가 물씬 풍긴다. 오래된 고서적들이 많은 탓에 책 냄새도 그다지 좋지는 않다.
책을 보던 지대익이 고개를 들어 사내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천천히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군그래.”
“바쁘신가 봅니다.”
“뭐, 나야 언제나 그렇지.”
지대익은 최근 들어 더욱 바쁘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 사내가 나타난 이후부터 바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일거리를 물어 온다. 할 것을 만들어오고 그것을 지대익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해져 있다.
그걸 안다. 그랬기에 지대익은 사내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경계하고도 있다.
그걸 사내도 알고는 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에게 무엇인가 받을 것이 있어 함께 하는 것뿐이다. 충성하는 마음, 위하는 마음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필요가 없었다면 만나지도 않았을 테고, 지금 이렇게 같이 있을 이유도 없다.
그건 시간 낭비니까.
“자네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면 분명 할 말이 있어서일 텐데…….”
“물론이죠.”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이 같은 반응에 지대익 또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궁금하다는 표정만 지어 보였다. 그만큼 사내를 잘 파악하고 있고, 사내 또한 속내를 감추려 하고 있지 않다는 소리다.
“그 일의 진행에 대해 듣고 싶은데요.”
“음…….”
지대익은 주변을 살폈다. 사내가 말한 그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지금 독을 이용해 중원을 지배하려는 속셈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역병처럼 서서히 퍼지겠지만 곧 중원 전역을 지배할 것이다.
오 년이다. 오 년 안에 중원의 모든 사람들은 독에 중독되어 버린다.
그때는 되돌릴 수 없다. 중원은 독황독립문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자네 말대로 일을 점점 크게 벌이는 중이야. 분명 실험은 성공이었지. 하지만 역시 크게 벌이려고 하니 그리 쉽지는 않더군.”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다. 적어도 지금 퍼지는 이것이 독이라는 것과 독황독립문 쪽에서 손을 쓰는 거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
그랬기에 지금 이렇게 진전이 지지부진한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대업이라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 아닌가.
남만인들이 중원으로 진출했던 적은 몇 번 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그들은 남만으로 쫓겨 돌아와야만 했다.
왜 언제나 이래야만 하는가.
남만은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물론 적응해 살아가고 있지만 중원의 좋은 땅들이 탐이 난다. 더 좋은 것들을 가질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도 그곳에 있다.
독황독립문은 분명 남만 제일의 독가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저 드넓은 중원으로 간다면…… 지금의 열 배 이상 강해질 수 있다. 중원이라는 곳은 그런 마력이 있으니까.
지대익은 말을 하면서 사내를 살폈다.
어느 날 지대익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사내다. 몇 년을 함께 했지만 아는 것이라고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그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는 거다. 자신의 신상에 관해서 사내는 말하지 않는다.
물론 지대익이 사내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의 뒤를 캐봤지만 나오는 게 없다. 아무런 과거가 없기에 오히려 더 문제다.
여태까지 살아왔다면 그에 따른 걸어온 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게 없다. 고향도, 그가 가르쳐 준 이름도 진짜인지 모르겠다.
위험한 자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위험하다는 건 한편으로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위험한 향기가 나지만 그만큼 매혹적인 것을 사내는 안고 나타났다.
중원 제패가 바로 그것이다.
꿈이었지만 해 보고자 도전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사내가 나타나면서 꿈은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럴 수 있는 계획을 사내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한 놈이다. 그랬기에 지대익 또한 같이 하면서도 이 사내를 경계하고 있다. 처음엔 나이가 어려 이래저래 얕봤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태까지 이만한 상대를 본 적이 없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만약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오히려 잡아먹으려 아가리를 들이 밀 게다.
지대익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사내에게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있다.
분명 사내는 지대익을 돕고 있다. 문제는 그러면서 도대체 사내에게 가는 이득이라는 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아무런 것도 없는데 움직일 리가 없다.
“자네는…… 무엇을 보고 걷는가?”
“하핫! 재미있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난 자네를 알아. 결코 생각 없이 움직이지는 않지. 원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
사내는 지대익을 바라봤다.
유쾌한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그 눈동자는 너무나 검다. 어느 정도 감정을 읽어 보려 해도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침묵하던 사내가 이내 말했다.
“모르셔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죠. 어차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기에 만나는 것 아닙니까. 더 이상 저에 대해 알려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웃으면서 말하지만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의 저음이다.
지대익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말해 상대하고 싶지 않은 놈이다. 같은 편으로 있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해서 적으로 둔다는 건 더 꺼림칙하다.
지대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자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겠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왕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제 뒷조사를 하는 것도 그만두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테니까.”
“허허, 그것도 알고 있었는가?”
지대익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만 속은 결코 웃고 있지 않다. 사내가 지대익의 행동을 알고 있다.
분명 사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떠났던 자들이 남긴 흔적을 본 모양이다.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방금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라는 자신이 있는 탓이다.
이 사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그 날부터 그랬다. 왠지 모르게 이 자가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기분이 든다. 언제나 자신보다 한 발 앞에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사내의 말대로다. 아직 지대익에게는 그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자든 상관없다. 꿈을 이루기 필요한 자라면 옆에 두는 것이 당연하다. 설령 그것이 얼마나 큰 위험을 안고 있든 간에 말이다.
“자네 말대로 될 것 같아. 아직 중원에서는 우리 움직임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어.”
“잘됐군요. 그리고 갈지혁은?”
“아직도 무림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듯하더군.”
“놈의 행보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비록 한 놈이지만 이번 일에 가장 큰 변수가 될 수 있는 놈이니까요.”
“알겠네.”
말은 그리 했지만 지대익의 생각은 달랐다.
분명 갈지혁은 중요하다. 그의 행보의 끝에 단화초가 있을 확률이 높은 탓이다. 그렇지만 갈지혁 하나가 이 상황에서 어떠한 변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한 명에 불과하다. 조금 강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지대익의 눈에는 아직 멀었다. 지대익은 사내가 유독 갈지혁의 일에는 집착을 보인다는 걸 알고 있다. 분명 갈지혁과 연관된 무엇인가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단화초와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지대익은 갈지혁을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지금 갈지혁이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어떤 일을 벌일지는 더더욱 모른다.
반면 사내는 갈지혁의 행보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그가 사천으로 가면 그곳으로 정보망을 최대한 집중시켰다.
이유가 있다. 지대익이 모르는 이유가.
“잠시 남만을 떠나야 될 것 같습니다.”
“또 말인가?”
“이번에는 꽤 길 것 같습니다.”
사내는 자주 중원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남만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지대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발걸음을 막을 권한 따위 지대익에게는 없다.
가고 싶으면 가면 그만이다. 떠나고 싶으면 오늘이라도 이곳을 떠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 둘의 사이는 그런 것이다.
“반 년 이면 될 겁니다. 그동안 제가 전부터 했던 모든 걸 해내셔야 합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없네. 걱정 말게.”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내는 몸을 돌려 서재에서 나가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 지대익이 갑자기 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보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원의 특산 음식들이나 사다주게. 어차피 얼마 후면 지겹게 먹어야겠지만 슬슬 입맛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중원의 주인이 된다면 그곳의 음식도 입에 맞아야지.”
“……뭐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그리 하죠.”
사내는 멈췄던 발을 다시금 움직여 서재를 벗어났다. 사내가 사라지자 그제야 지대익은 의자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