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24화
그냥 음식을 사오라고 한 것이 아니다. 중원에서 남만으로 오는 시간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음식이라도 제 맛을 잃는 건 당연하다.
썩지 않기만 해도 다행이다.
그걸 모르는 지대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탁을 한 것은 이유가 있다. 특산품은 어느 지역에서만 판다.
그것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음식들의 종류를 보면 대충이나마 사내가 걸어온 행로를 알 수 있다.
그걸로 사내가 어떠한 일을 벌이고 왔는지 조사해 보려는 것이다.
지대익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단리문(段里雯)…… 알 수 없는 놈이야.”
사내의 이름은 단리문.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자신의 길만을 보고 걷는 자라는 것을 뺀다면.
* * *
약선문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인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그 속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일들이 약선문에는 밀려 있다.
그리고 수뇌부 몇 명만 아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인 하나가 고개를 파묻은 채로 상념에 잠겼다. 파란색 눈, 색목인이다.
여인이 바로 약선의 손녀인 운하연이다.
‘……이대로는 안 돼.’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수는 아주 미미했지만 문제는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을이 역병에 의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어 버렸다.
무림은 물론 나라에서조차 역병이 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넘기고 있지만 그럴 만큼 우스운 것이 아니다.
이 역병은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올 것이다.
물론 이 역병이 엄청나게 지독한 것도 문제다.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그게 아니다.
치료약이 없다. 이 병이 돌아도 결코 치료할 수가 없다. 걸리면 바로 죽어야 한다는 소리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이 역병은 피해갈 수 없다.
모두가 진지하게 이 역병에 대해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유독 약선문에서만 이 역병의 두려움을 알고 있다.
약선은 아직도 행방불명이다.
단화초를 찾으려고 떠난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거늘 이제는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약선이라도 있다면 의지가 될 게다. 그렇지만 지금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어떻게든 이 역병은 막아내야 한다. 설령 아무도 돕지 않는다 해도 운하연은 혼자서라도 이 지독한 역병과 싸울 게다.
다시는 병이라는 이름 앞에서 누군가를 잃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다.
어릴 적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아무리 그녀가 해결하려고 해도 이 역병을 치료할 방도가 없다는 거다.
약선은 치료약으로 단화초를 꼽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 어떠한 것으로도 이 역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약선이 그리 말했다면 그런 거다.
하늘 아래 의술의 제일이라 불리는 약선이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버리면서까지 단화초를 찾는 것은 그만큼 이 역병이 돌면서 일 파문이 엄청난 탓이다.
무림은 알아주지 못한다.
그저 약선문의 섣부른 걱정이라고 한다. 역병이 이는 마을을 봉쇄하고 그곳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리면 그만이다.
빠르게 대처만 하면 역병은 돌지 않는다. 비록 마을 몇 개는 사라지겠지만 그 정도로 그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스운 소리다.
보통 역병이었다면 분명 그랬을 게다. 그렇지만 이건 다소 특이하다. 전염성이 극히 심하고, 그 주변의 땅까지도 변해 버린다.
흡사 역병이라기보다는 독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그만큼 전염성이 있다는 소리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소리다.
운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빛난다. 이대로 앉아서 답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은 그녀에게 맞지 않는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좋다. 부닥친 후에야 실패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놓고 실패라는 말을 하는 것도 우습다.
운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
유일하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갈지혁이다. 그를 찾아갈 생각이다.
운하연 또한 알고 있다. 자신이 갈지혁을 귀찮게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영특한 그녀다. 그 정도도 모를 리는 없다. 그래도 이렇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운하연의 입장이다.
운하연은 옆에 놓여져 있는 짐을 들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약선문의 정문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운하연의 호위무사인 중년의 사내가 그녀를 발견하고 말했다.
“어디 가십니까?”
“갈지혁을 만나러요.”
“그러십니까? 잘 다녀…… 예? 누구요?”
그는 풍씨 성을 지닌 무인으로 갈지혁과 두어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자다. 풍씨 성을 지녔다는 것만 알려졌기에 약선문에서도 그를 풍객이라 불렀다.
풍객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기를 바랐다.
운하연이 지금 말한 자의 이름을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갈지혁을 만나러 간다고요.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아가씨 안 됩니다. 그놈은 위험해요.”
“걱정되면 따라오시든지요.”
“에…….”
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조만간 아내가 아이를 낳는 탓이다. 가뜩이나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때가 많아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그다.
태어날 아이가 보고 싶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내에게 잔소리 듣기가 싫었던 것이다. 운하연은 그런 풍객의 모습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바로 그녀인 탓이다.
운하연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을 돌려 계속해서 걸었다.
멀어져 가는 운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던 풍객은 입술을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젠장, 또 시끄럽겠어.”
이미 마음은 정했다.
비록 아내에게 또다시 구박을 받겠지만 이대로 운하연을 혼자 보낼 수도 없다.
풍객은 이미 문 밖으로 나가버린 운하연을 쫓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문 앞에서 뒤로 몸을 돌린 그는 고개를 꾸벅하며 말했다.
“미안해! 한 번만 봐줘.”
말을 마친 풍객은 그대로 문 밖으로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그의 외침을 들었을 리가 없다. 아마 약선문에 돌아오는 그 날 적지 않게 바가지를 긁힐 것이 분명하다.
알면서도 쫓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얼마 차이도 나지 않았기에 풍객은 단숨에 운하연을 따라 잡았다. 그가 옆에 서자 운하연은 놀란 눈으로 풍객을 바라봤다.
“아저씨, 곧 아기가 태어나잖아요? 돌아가요. 저 혼자라도 되니까.”
“안 됩니다. 그런 위험한 놈을 만나러 가는데 아가씨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풍객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습지만 풍객은 운하연보다 약하다. 어릴 적부터 운하연을 지켜오던 호위무사지만 이제는 그녀보다 한참은 아래다. 그걸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옆에서 지켜줘야만 하는 기분이 드는 건 호위해야 할 상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마치 딸 같기 때문일 게다.
너무 오랫동안 지켜왔다. 함께 한 시간도 너무 길다.
여인에 대한 사랑이 아닌 딸에 대한 부성애(父性愛) 같은 것이다.
“돌아오면 큰일 날 텐데요…….”
풍객의 아내를 잘 아는 운하연은 그녀가 어떻게 할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말에 풍객은 찔끔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그녀도 이해해 줄 겁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풍객은 급히 말을 돌리기 위해 말했다.
“그나저나 그럼 어디로 가실 겁니까?”
운하연은 앞만 보며 걷다가 대답했다.
“사천이요.”
“사천? 그놈 섬서에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사천으로 향했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한 곳에 있지 못하는 놈입니다.”
그의 말에 운하연은 웃었다. 그리 말하고 있는 사내를 잘 아는 탓이다.
“아저씨도 마찬가지잖아요. 진짜 성이 풍씨가 아니라 바람 같이 떠도는 걸 좋아해 일부러 풍씨라고 말한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로.”
“거참…….”
풍객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앞서서 걸어가는 운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처음 운하연을 봤을 때 그녀는 철없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지금은 아니다. 목숨의 소중함을 알고,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려는 그런 여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커져 버린 등만큼 많은 것을 짊어지고 걷는 그녀다.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풍객으로서는 감격에 젖을 수밖에 없다.
‘커졌어. 너무 커졌어.’
처음 꼬마 여자아이였던 운하연을 봤을 때는 이런 감정에 젖을 줄 몰랐다. 언제까지 애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그녀가 지금은 너무나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서 있다.
곧 태어날 자식이 남아이든 여아이든 반드시 이름에 연(淵) 자를 넣을 것이다.
운하연처럼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큰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말이다.
“아저씨 빨리 와요.”
너무 뒤처지는 풍객이 답답했는지 운하연이 소리쳤다.
그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언제든 쫓아가지요.”
* * *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라 해도 밤이 되면 그 더위가 한풀 지치기 마련이다.
사람의 힘을 축 빠지게 했던 더위도, 살랑거리며 부는 밤바람에 그 힘을 잃곤 한다.
사천당문의 밤도 그렇게 평화롭다.
밤이 깊었거늘 갈지혁은 자지 않고 깨어서 주변을 돌고 있다. 그의 앞으로 사황이 빠르게 지나갔다.
“녀석도.”
갈지혁은 신이 나서 마구 돌아다니는 사황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언제 봐도 귀여운 녀석이다. 뱀에게 귀엽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갈지혁에게 사황은 그렇다.
지금 갈지혁은 사천당문에 있다.
손님으로 지금 사천당문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부근은 당문 내에서도 정해진 사람을 제하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그런 곳이다.
갈지혁이라는 존재와 무엇인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은 탓에 당려환이 취한 조치다.
불만은 없다. 당려환의 마음을 갈지혁 또한 모르는 바는 아니다.
지금 진검백은 잠에 빠져 있을 게다. 잠이 오지 않아 이렇게 사황과 함께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갈지혁은 이리저리 마구 움직이는 사황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바람이 불었다.
여름의 지독한 더위를 말끔하게 씻어 주는 상쾌한 바람이. 어차피 더위에 익숙해 여름이 힘들지는 않지만 이 미풍은 왠지 모르게 개운하다.
갈지혁은 전방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이 많다. 얼마 시간이 지나면 황금귀 이풍에게서 연락이 올 게다. 그는 갈지혁이 부탁한 것들을 준비할 것이고, 그때부터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