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4화
“계집이나 어린놈은 독에 금방 당하지. 역시 건강한 놈이 좋겠군.”
그랬다. 단리문은 이 독을 실험할 만한 자를 찾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건장해 보이는 사내 앞에 섰다. 줄에 매달려 정신을 잃고 있다.
혈도를 제압당한 탓이다. 남만인으로 전신이 근육으로 꿈틀거린다. 아마도 단리문에게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이름 꽤나 날렸을 게다.
단리문은 독을 쓰려다 생각을 바꿨다.
그의 손이 제압당한 혈도를 쳤다.
눈을 감고 있던 남만인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의 입에서 약한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으으…….”
눈을 뜬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앞에 있는 단리문을 보면서 그 날의 일을 떠올린 듯하다. 정신을 차린 남만인이 고함을 질렀다.
“네, 네놈!”
“왜? 이렇게 만나니 새삼 반가운가?”
“당장에 이 줄을 풀지 못해! 너의 그 잘난 면상을 으깨주고야 말겠다!”
“여전히 말이 많아.”
단리문은 슬쩍 웃는 듯하더니 병을 막고 있던 것을 뽑아냈다. 그는 남만인 앞에서 병을 살살 흔들었다.
“이게 뭔지 알아?”
“날 가지고 장난치는 거냐! 당장 이 줄을…….”
“널 지옥으로 안내해 줄 친구.”
남만 사내의 말을 듣지도 않고 단리문은 독을 그의 몸에 뿌렸다. 처음엔 당황했던 남만인이었지만 이내 자신의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순간적으로 놀라 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서다.
“가, 감히 날 가지고 놀아!”
그때 단리문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셋, 둘…… 하나.”
말을 마친 단리문은 자신의 손목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사내는 화가 솟구쳐 재차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심장이 멈추어 버린 것도 사내는 몰랐다.
죽은지도 모르게 사내는 그리 죽어 버렸다.
촤르르륵……
사내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으로 그 독기가 퍼지며 덩달아 매달려 있던 자들도 녹아내렸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단리문이다. 그를 제외한 모든 자들이 녹아 내려 버린 것이다.
단리문 또한 얼굴색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니 완벽하게 막아 낸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그의 표정은 밝았다.
“좋아, 좋아. 이거란 말이지. 이 정도라면…… 중원을 시끄럽게 만드는 데 충분하지.”
하지만 그뿐이다. 진정 단리문이 원하는 것은 이 독이 아니다.
‘단화초…… 단화초만 찾으면 돼.’
갈지혁의 행보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단리문이다. 갈지혁이 단리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어서 가.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어서.’
지금 갈지혁은 사천당문에 있다. 무슨 일을 벌어지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슨 일을 벌이던 상관도 없다.
단리문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갈지혁이 무슨 짓을 하던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쓸 만한 게 아니다.
단화초만 있으면 그만이다. 단화초의 위치를 알지 않았다면 죽여도 예전에 죽였을 놈이다. 물론 갈지혁이 아니고 단화초의 위치를 아는 자가 하나 더 있다.
일수만독 일악천이다.
하지만 단리문은 일악천에게서는 아무런 것도 캐려고 하지 않았다.
입을 열게 할 자신도 없으려니와, 그는 단리문이라고 해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고수다. 잘못하면 손이나 다리 하나 정도는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싸울 필요는 없다.
천천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갈지혁이 단화초를 찾아가기를. 그리고 찾는 그 날이 단리문의 소망에 한 걸음 다가가는 날이기도 하다.
‘자꾸 시간을 끌면 널 죽여 버릴지도 몰라.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
큭큭 웃으며 단리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에는 독기가 가득하다. 더 이상은 단리문이라고 해도 버텼다가는 위험할지도 모른다.
무서운 독이다.
* * *
당문에서는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 한 군데 있다.
그곳은 베일에 싸인 곳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또 왜 그렇게 출입을 막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곳에는 굉장한 자가 있다는 거다.
성역을 함부로 들어서는 자는 극형에 처해진다. 그리고 애초에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당문 문도가 없다고 해야 옳다. 그 주변만 다가와도 지독한 독기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다.
궁금함을 참는 것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까지 걸 정도는 아니다.
성역의 주변은 땅까지도 독에 중독됐다고 봐도 될 정도다. 그곳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독인의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사천당문에서 그 성역을 드나들 수 있을 만한 실력자는 열 명이 넘지 않는다는 소리인 것이다.
그곳으로 네 명의 무인들이 걷고 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성역에 그들은 용무가 있는 듯하다.
당문 문주인 당려환과 일노, 갈지혁과 진검백이다.
당려환은 갈지혁에게 성역에 가자고 했고, 진검백은 그저 쫓아왔을 뿐이다.
성역은 당문 내에서도 격리되다시피 한 공간이다.
펼쳐 놓은 진법 탓에 그 성역의 공간이 너무나 분명하다. 한 발 내디딜 뿐인데 독기가 확 인다.
성역에 이르자 당려환이 진검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있게. 독기가 강해 자넨 무리야.”
“괜찮습니다.”
“안 된대도. 독인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하고 중독되어 버려.”
당려환은 따라 들어오려는 진검백에게 딱 잘라 말했다.
성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성역 안에 진검백이 들어선다면 독에 중독되어 버릴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버틸 수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자네 걱정을 하는 게 아냐. 이곳에서 자네가 설령 죽기라도 한다면 화산파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놈 이 정도로 죽을 놈이 아니니까.”
당려환은 갈지혁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갈지혁이 그리 말했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갈지혁 정도 되는 독인이라면 지금 이 안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호언장담을 하는 걸 보면 진검백이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소리다.
예상보다 진검백을 높게 치는 것이 아닌가 했지만 갈지혁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는 탓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확신을 하고 있다는 거다.
더 말리려던 당려환은 입을 다물었다.
화산파의 무인이지만 굳이 성역의 정체를 숨길 생각은 없다. 애초에 이곳을 성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탓이기도 하다.
많은 당문 무인들은 독에 의해 접근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을 성역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수뇌부들은 그곳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다지 성역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알아서 하게 그럼.”
말을 마친 당려환이 먼저 진법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뒤를 세 명의 무인이 따랐다. 일노는 익숙하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와 걷기 시작했고 갈지혁 또한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뿐이다.
진검백은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켁켁, 냄새 한 번 지독하군.”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싫어. 이런 냄새가 익숙해질 정도면 몸에서도 썩은 내가 날걸. 여자한테 인기 없는 남자는 질색이다.”
진검백은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장난기 어린 말에 갈지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말만 그렇지 진검백은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내다.
그는 걸어가는 갈지혁을 쫓았다.
진법 안은 초라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고 그저 건물 한 채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건물에서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대부분은 모르지만 그건 악취가 아니라 독향이다.
아마 이곳에 용무가 있는 듯하다. 당려환은 건물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컬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저입니다.”
“들어와.”
목소리는 두 개였다. 안에는 최소한 두 명의 인물이 있다는 소리다. 당려환에게 자연스러운 하대를 하는 것을 보면 나이 차이도 적지 않을 게다.
당려환이 문을 열고는 고개를 돌려 갈지혁에게 말했다.
“들어와.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곳까지 왔는데 따라 들어가죠.”
진검백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차피 이곳에 남아서 할 것도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궁금하기도 하다.
네 명의 무인은 안으로 들어가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앞에는 두 명의 노인이 있다.
머리가 온통 희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적어도 팔십 이상은 되어 보인다. 아마도 사천당문의 원로 정도 되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도 아닌 듯한 게 아무리 원로라 해도 가주가 왔음에도 이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당려환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듯이 자신이 하던 일에 몰두했다.
갈지혁은 둘이 대단한 고수임을 알아차렸다.
‘당려환보다 강해.’
사천당문에서 가장 강한 것은 당연히 당려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지극히 달랐다. 그 둘의 차이는 옷에서 가장 컸다. 한 명은 수수한 녹색 경장을 입은 반면 한 명은 온통 검은색의 칙칙한 옷을 걸쳤다.
녹색 경장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웬일이냐?”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힘을 빌려 주십시오.”
“네가 웬일로 우리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당려환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혼자 헤쳐 나가려는 자다. 그리고 이 둘의 힘을 빌릴 정도로 큰 일이 여태까지 없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나 힘을 빌려달라고 한다. 분명히 큰일을 벌이거나 막아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일 게다.
힘을 빌려 달라는 말에 두 노인은 당려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그 두 노인은 갈지혁과 진검백에 대해 물어왔다.
“저 둘은 누구냐?”
흑색 옷을 입은 노인이 바로 말을 이었다.
“한 놈은 우리와 같은 과고, 나머지 한 놈은…… 화산파의 냄새가 나는군. 그래.”
흑색 옷을 입은 노인은 갈지혁과 진검백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다. 갈지혁이야 그렇다 쳐도 진검백의 정체까지 알아낸 것은 놀랍기만 하다.
“이런 녀석들을 데리고 도와달라고 할 일이 뭐가 있지?”
흑의를 입은 노인은 틱틱거리며 말했다. 아마도 이곳에 화산파의 무인이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제 가주 생명을 걸고 한 가지 일을 해 볼 생각입니다.”
“가주 생명을 걸어? 그만한 일이라는 건가?”
녹의를 걸친 노인이 반문하자 당려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려환이 갈지혁을 바라본 후 말했다.
“저 놈을 독왕으로 만들 겁니다.”
“뭐?”
“푸, 푸하핫!”
녹의의 노인은 당황한 듯했고, 흑의의 노인은 참지 않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큼 당려환의 말이 당황스럽고 우스웠던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려환은 얼굴 표정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그만!”
녹의의 노인은 옆에서 웃고 있는 흑의의 노인에게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의 노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결코 재미있어서 웃은 게 아니다.
당려환의 말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던 탓에 웃었던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