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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80화 (80/200)

# 80

5화

녹의의 노인은 갈지혁을 한 번 확인하고는 말했다.

“너는 어리석은 녀석이 아닐 텐데…….”

“압니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당문은 평생 무림의 멸시를 받아야 합니다.”

“너의 마음은 안다. 하지만!”

노인의 눈이 갈지혁에게로 향했다.

젊다. 젊어도 아직 너무나 젊다. 실력은 모르겠지만 당문의 미래를 걸기엔 너무나 부족하다.

“……저 녀석은 아닌 듯싶다. 너무 어려.”

독왕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랬기에 말리는 것이다.

불가능한 길이다. 차라리 무림을 위해 무슨 일을 해 그나마 사천당문의 이름을 유지시키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벅차다.

그런 상태에서 무림과 싸우려 하다니…….

당려환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불가능합니다. 더 이상 끌게 된다면…… 사천당문의 미래는 없습니다.”

당려환의 말에 흑의의 노인의 얼굴빛이 변했다.

쉽게 흥분하는 그이거늘 오히려 지금은 차분하게 변한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말이다.

“당문의 미래가 없다…… 그럼 저놈에게 힘을 준다면 당문의 미래가 있다는 건가? 지금 네놈이…… 당문의 가주더냐!”

쾅!

흑의 노인의 발이 땅에 박혔다. 동시에 커다란 돌이 날아가 당려환의 얼굴을 때렸다.

퍼억.

피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공격도 피해 내지 못할 당려환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고 돌은 당려환의 이마를 터트렸다. 피가 흥건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의 노인은 화가 풀리지 않은 듯하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네놈은 당문의 가주다. 여태까지 어떻게 지켜온 당문이거늘…… 미래가 없다 말할 수 있느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드린 말입니다.”

말을 마친 당려환은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그 또한 이런 말을 하기 쉽지 않았을 게다.

당문을 누구보다 생각하는 그이니까.

“이놈의 이름은 갈지혁입니다.”

“갈지혁이라면…….”

녹의를 입은 노인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갈지혁이라는 이름, 들어 본 적이 있다.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깃발 하나를 들고 비무행을 펼치는 자가 틀림없다.

“우리가 비웃던 그놈?”

“그런 듯…… 하군.”

흑의의 노인 또한 갈지혁을 안다. 일전에 둘이서 갈지혁에 대해 전해 듣고 웃음을 터트렸던 적이 있다. 설마 그런 놈을 당려환이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젠장, 살다 살다 별 우스운 꼴 다 보는군.”

흑의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를 데리고 와서 당문의 미래 어쩌고 나불거린 꼴로밖에 안 보인다.

당려환은 영특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저도 우습게 봤습니다. 하지만 싸워 보고야 알았죠. 강합니다. 그리고 머리도 있습니다.”

“싸워 봤다고?”

“예, 그리고 제가 패했습니다.”

“네가?”

당려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려환이 패했다고 말하자 두 노인의 시선이 변할 수밖에 없다. 무림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설마 당려환을 꺾을 정도의 고수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허허, 믿어지지가 않는군.”

“개소리 아니냐?”

두 명의 노인 모두 믿기 어려운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의 나이 차만 봐도 거의 두 배가량이다. 그것도 천재라고 불렸던 당려환을 저렇게 어린 자가 이겼다는 건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설령 갈지혁에게 희망을 거는 게 아니라고 해도 좋습니다. 당문이 변해야 할 때는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거야 네 판단이다만…….”

녹의 노인은 말끝을 흐리면서 당려환을 바라봤다.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당려환 또한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잘 안다.

그 후에 일어날 폭풍을 막아 낼 힘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실패하면 죽는다.

구파일방의 눈에서 벗어나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알면서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다른 문파에 눌려서 지내야 한다. 독을 쓴다는 게 어찌 죄가 되는가.

그것 또한 나름대로의 무기인 것을.

“목숨 따위 버린 지 오랩니다.”

“네놈 목숨 하나만이 아냐. 잘못하면 당문이 사라져.”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 그리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제가 목숨을 걸려는 겁니다.”

“어차피 당문은 우리의 손을 떠났다. 이제는 너의 시대야. 네 판단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당려환이 포권을 취하는 것을 보며 흑의 노인은 혀를 찼다.

아직도 당려환의 모든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저런 새파란 젊은 놈에게 패했다는 말을 들으니 그의 실력까지 의심스럽다. 당려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이 흑의 노인이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흑의 노인이 손가락을 가볍게 퉁퉁 튕기다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입가를 슬쩍 비틀었다.

‘오냐, 실력 한번 보자.’

그토록 강하다고 말했으니……

노인은 튕기던 손가락 끝을 슬쩍 갈지혁에게로 향했다.

아무런 미동도 없다. 공기를 타고 날아간 독이 갈지혁을 중독시킬 게다. 만약 당려환이 말한 대로 갈지혁이 고수라면 그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흑의 노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갈지혁은 죽는다.

쉽게 하독했지만 극독이다.

설령 기대한 수준 정도라 해도 이 정도 독이면 꼼작도 하지 못할 게다.

갈지혁을 보고 있던 흑의 노인의 얼굴이 점점 변했다. 무슨 이상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나 멀쩡한 탓이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듯하다.

‘분명 하독을 했거늘…….’

실수를 했을 리는 없다. 독을 만진 것이 횟수로 구십 년이 넘는다. 그런 그가 그 정도의 실수를 할 리가 없다.

분명 독은 하독됐고, 갈지혁은 그것에 당했다. 그런데도 저토록 멀쩡하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노인이 모를 리가 없다.

‘너무 얕봤나? 그렇다면…….’

흑의 노인은 다른 독을 하독하려는 듯이 소매 끝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갈지혁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장난치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장난?”

당려환은 흑의 노인을 바라봤다. 장난이라는 말에 절로 그에게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평소 그가 어떠한 자인지 알만도 하다.

반면 흑의 노인은 다른 의미로 장난이라는 말에 화가 났다. 자신의 공격을 우습게 봤다고 생각한 탓이다.

노인은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네놈 꽤나 독에 내성이 강한 모양이구나. 삼즉분시혈(三則分屍穴)을 하독했음에도 그리 멀쩡한 것을 보니 말이야.”

“자네 삼즉분시혈을 썼는가?”

녹의 노인의 말에 흑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녹의 노인은 다소 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멀쩡한 갈지혁을 보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기에 삼즉분시혈을 맨몸으로 당하고 저리 태평하다는 말인가.

대충 상황을 짐작한 당려환이 말했다.

“저놈은 맨 몸으로 당문십독의 하나를 받았습니다. 삼즉분시혈로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할 겁니다.”

“당문십독!”

흑의 노인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문십독을 맨몸으로 받았다는 말에 놀라 버린 것이다. 그건 불가능하다. 설령 아무리 독에 대한 내성이 좋다 해도 온몸을 녹여 버리는 당문십독을 견뎌 낸다니……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진짜입니다. 제 눈으로 봤으니까요.”

“……그래서 네가 패했군.”

“그렇습니다. 당문십독도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제가 이길 방도는 없었으니까요.”

녹의의 노인은 갈지혁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소문으로만 들었을 때는 그저 겁 없는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당문십독을 몸으로 받고 삼즉분시혈을 아무런 피해 없이 몸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건 분명 웃을 만한 일이 아니다.

흑의 노인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녹의 노인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또 시작이다. 저놈의 지긋지긋한 승부욕은.

아마도 흑의 노인은 갈지혁에게 싸움을 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갈지혁은 받아들여야만 한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네놈…… 그리 강하다면 나와 싸워 보자.”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넌 아닐지 몰라도 난 그래야겠다. 싫다면 가만히 있어도 좋고. 내 독에 당하고도 서 있을 수 있다면 말이야.”

흑의 노인은 옆에 있는 나무 막대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 막대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당철민이라고 한다. 당문 전전대 가주의 호법이지.”

흑의 노인은 자신의 이름을 당철민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의 정체에 대해 말했다. 전전대 가주의 호법이라면 백 세가 넘은 건 확실하다.

그만큼 둘의 나이 차는 꽤나 심각했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대답대신 당려환을 바라봤다.

그가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괜한 싸움을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갈지혁의 마음이다. 그렇지만 당려환 또한 당철민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갈지혁 또한 피할 마음은 없다.

죽일 생각 같은 건 없지만 싸움을 거는 상대에게까지 웃고만 있을 수는 없다.

갈지혁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당철민은 씨익 웃었다.

싸워 보고 싶은데 쉽게 그리됐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나무 몽둥이에 내공을 주입했다. 막대기가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나와.”

갈지혁은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또한 언제든 독을 하독할 수 있는 준비를 끝마친 상태다. 하얗게 빛나는 몽둥이를 보며 갈지혁은 상대가 엄청난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쉽게 저 몽둥이에 부닥치면 갈지혁이라고 해도 무사하기는 힘들다. 그랬기에 그는 우선 그 몽둥이를 제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바로 칠갑지주의 거미줄이 해 줄 것이다.

갈지혁은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언제든 그의 손에서는 칠갑지주의 거미줄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당철민이다.

슈슉!

막대기가 갈지혁의 머리통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떨어져 내렸다.

갈지혁은 칠갑지주의 거미줄을 쓰기도 전에 급히 몸을 피해야만 했다. 아슬아슬하게 막대기는 갈지혁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저 싸움을 지켜만 보던 진검백은 놀라 버렸다.

지금 이 공간은 독으로 가득하다. 그랬기에 진검백은 계속해서 호흡을 주의하기에 바빴다. 말없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만 보던 것은 그 탓이다.

그런데 갈지혁과 싸우게 된 당철민이라는 자는 대단한 실력자다.

단숨에 갈지혁과의 거리를 좁힌 것도 그렇고, 머리통을 깰 듯이 떨어져 내린 몽둥이가 그랬다.

허기야 전전대 당문의 가주의 호법이었다면 절정고수의 반열에 오른 건 분명하다.

갈지혁이 옆으로 피해 내자 몽둥이는 바로 그의 몸을 쫓았다. 갈지혁은 피했고, 몽둥이는 계속해서 그를 잡기 위해 따라 움직였다.

특별한 무공도 아니다. 아무런 형식도 없는 마구잡이 휘두르기 같아 보였지만 연신 갈지혁을 물러나게 하고 있다.

쉑! 쉐엑!

몽둥이가 갈지혁의 명치를 노리고 움직였다.

그때 뒤로만 물러서던 갈지혁이 갑작스럽게 몽둥이를 향해 자신의 손을 휘둘렀다. 내공에 감싸인 몽둥이에 손을 내던진 것이다.

당철민은 갈지혁의 행동에 순간 혀를 찼다. 더 이상 밀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탓에 섣불리 움직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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