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7화
지독한 현기증에 다리가 풀릴 뻔 했다. 당장에 주저앉을 뻔 했지만 갈지혁은 이를 꽉 깨물었다. 미약하게나마
흘러 들어온 연명분의 독기가 몸을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아.’
그 동안 걸어온 길은 이보다 고통스러웠으면 고통스러웠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갈지혁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의 손바닥 위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를 바라봤다.
지금 당철민은 공격을 하고 있지 않다.
연명분의 안에 자신이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위험 탓도 있고, 독으로 승부하자고 한 갈지혁의 말 탓이기도 하다.
갈지혁은 피가 고여 있는 오른손에 왼손을 겹쳤다. 그는 손을 마주잡고 천천히 비비기 시작했다. 피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이 피범벅이 되어 버렸다. 갈지혁이 버티고 서 있자 놀란 듯이 서 있던 당철민은 그 모습에 섬뜩한 감정을 가져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 버렸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 순간 공포라는 감정을 느껴 버렸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저 손을 마주 잡은 채로 비볐을 뿐이다. 피를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에 공포라는 감정을 느낄 리도 없다. 그렇지만 분명 이것은 갈지혁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이다.
‘아니…… 싸움은 끝났어. 연명분에 중독 당했잖아. 괜히 긴장하는 게야. 괜히…… 나이를 먹으니 약해지는 모양이야.’
당철민은 그저 자신이 나이를 먹어서라고 생각했다.
갈지혁은 피범벅이 된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손에 내공이 집중되자 피가 물방울처럼 방울지기 시작했다.
갈지혁이 오른손을 튕기자 안에 있던 핏줄기들이 쏘아졌다.
“음?”
갈지혁을 예의주시하던 탓에 그의 손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쏘아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피라는 것도 당철민은 금방 알아차렸다.
무슨 생각인가 했지만 당철민은 그 핏방울들을 피해 냈다.
슉!
핏방울들이 당철민이 등지고 있던 벽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아니,
녹여 버렸다.
“…….”
놀란 것은 당철민만이 아니다. 녹의를 입고 있는 노인의 얼굴에도 확연하게 감정이 드러났다.
놀람, 그리고 경악이다.
이곳은 이 둘만을 위한 공간이다. 독을 사용하는 일이 잦은 것은 당연하다. 건물을 만든 것도 보통 돌로 만든 것이 아니다. 독에 녹지 않고, 내성이 강한 돌을 썼다.
여태까지 수많은 독을 이곳에서 실험해 봤지만 이렇게 벽을 뚫어 버린 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갈지혁의 가려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빛나는 눈이 섬뜩하다.
“너…… 인간이냐?”
당철민이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이유가 있다. 이러한 독성을 지닌 피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런 독성을 지닌 피를 지닌 자가 살아서 걸어 다닌다는 것이 그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서 있던 갈지혁이 걷기 시작했다.
연명분에 당하긴 했는데 움직이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피가 모두 말라 버려 죽었어야 옳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멀쩡하다. 다소 버거운 듯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녹의의 노인이 옆에 서 있는 당려환에게 물었다.
“저놈의 사문이 어디인지 아느냐?”
“……생각하는 바는 있습니다.”
“……독황독립문이냐?”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곳에서…… 저런 놈을 만들 힘을 가진 자가 아직도 있었던가.”
독황독립문은 분명 대단한 곳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언제나 중원에 진출하려고 하면서도 그러지 못한다. 힘이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탓이다.
남만의 환경은 분명 좋지 않다. 그렇지만 독인에게 있어서는 남만만 한 곳도 없다.
그들이 지닌 독은 중원의 것보다 훨씬 강하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들 남만인의 특성에 있다. 그들은 싸움을 좋아한다. 그에 반해 머리 쓰는 것은 무척이나 싫어하고, 또한 생각이 짧다.
대단한 독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은 그것들의 위력을 십 분지 일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랬기에 독황독립문은 언제나 중원에 나서지 못한다.
나와 봤자 언제나 패하고 돌아가는 것은 그들이었다.
단 한 번 일수만독 일악천이라는 괴물이 나타났을 때를 제하고. 오히려 그때는 승리하고도 물러섰으니 그 이유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녹의의 노인의 눈이 갈지혁에게로 박혔다.
독황독립문의 인물이라면 더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그들은 중원에서 가장 싫어하는 무리 중 하나다.
“굳이 저 놈에게 힘을 주려는 이유가 있느냐? 네 말대로 이대로 있으면 당문은 점점 약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이 어떤 걱정을 하는지는.”
오히려 갈지혁이 득이 아닌 화가 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럴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 정도는 당려환 또한 알고 있다.
“희망을 보았습니다. 저 놈에게서.”
“희망?”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어린애처럼 들떠 버렸습니다. 거기에 제 모든 것을 걸 생각을 해 버렸습니다.”
웃을 줄 알았다. 아니면 당장이라도 호통을 칠 줄 알았다. 그렇지만 녹의의 노인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가치가 있군. 네 목숨을 걸 만한.”
“그리 생각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지. 그렇지만 철민이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 게야. 싸움의 승패지. 그럼 누가 이기나 한 번 결과를 볼까.”
녹의의 노인은 눈을 돌려 갈지혁과 당철민을 바라봤다.
갈지혁이 손을 앞으로 천천히 밀자 알 수 없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기준으로 해서 무엇인가 미동하기 시작했다.
당철민의 꽉 다문 입술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 또한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탓에 놀라 버렸다.
피비린내가 날 뿐이다. 그런데 그 안에 독의 기운이 섞였던 모양이다.
“크, 큭”
당철민은 어깨를 움켜쥐었다. 독에 당했거늘 어깨가 이상하다. 그리고 고통이 점점 타고 몸 전체를 감돌기 시작했다.
어깨를 감싸 쥐고 있던 손이 이상한 것을 감지했다. 어깨의 근육이 마구 뒤틀리면서 살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에 섞인 그 미세한 독기에 온몸의 피가 견디지 못하고 마구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살점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어깨가 터져 버릴 게다.
“이, 이 독은 뭐냐…….”
“이름은 없습니다. 그저 제 피에 불과하니까요.”
“이름도 없는 독에…… 내가 당한다는 건가?”
어깨의 살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만약 무인이 아닌 사람이 이 장면을 봤다면 당장에라도 징그럽다고 도망쳤을 게다.
어깨가 터지는 것이 다는 아니다. 아마도 어깨를 시작으로 온몸이 터져 버릴 것이다.
방심한 것은 아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갈지혁의 독은 훨씬 강했다.
상식적으로 독인의 피라 해도 이 정도의 위력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지금 당철민 자신이 당했고, 그러한 피를 지닌 자가 눈 앞에 있으니까.
‘온몸의 피가 독…… 그것도 당문십독을 훨씬 웃도는 독…… 이놈…… 이 놈은……!’
어떤 말로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런 경지에 독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도 없다. 단 하나 이러한 자를 표현할 말이 있긴 하다.
모든 독인이 꿈꾸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바로 그것.
“독왕…….”
가벼운 중얼거림이지만 그게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 크다.
독왕.
왕이라는 호칭은 어떠한 분야에서 최고일 때나 칭해지는 말이다. 즉, 독왕이라는 건 독을 사용하는 무인 중 최고라는 소리다. 문제는 독왕이라는 말 자체가 무림에서 지니는 의미가 다른 것과는 여실히 다르다는 것이다.
검왕, 도왕 같은 경우 무림 제일의 고수들이라고 추켜세운다. 그에 반해 독왕이라는 이름을 가지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무림은 그자를 죽이려 든다.
큰 차이다.
양지와 음지다.
한쪽은 중원의 명예와 권력을 진다. 다른 한쪽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독이라는 것을 사술이라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걸 아는 당철민이다. 그가 쉽게 그런 말을 내뱉었을 리가 없다. 정말로 그는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 버린 것이다. 그 말이 어떠한 파장을 일으킬 것인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근육이 마구 비틀린다. 당장이라도 살이 비집고 나오면서 터져 버릴 것만 같다.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다. 독에 대한 내성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어떠한 독에 당한다 한들 집중만 한다면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 당철민은 볼품없는 모습으로 식은땀만 줄줄 쏟아 냈다.
녹의의 노인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탄식했다.
“독왕…… 독왕이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당철민이 그러한 말을 내뱉었다. 다소 성격이 급한 것이 흠이긴 하지만 생각은 있는 자다.
그가 그리 말했다. 콧대가 그토록 높은 당철민이 자신도 모르게 독왕이라고 중얼거렸다. 지금 그의 모습에서 생명이 위태롭다는 걸 알았지만 녹의의 노인은 손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저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은 갈지혁뿐일 게다.
그리고 갈지혁은 당철민을 죽일 생각이 없을 게 분명하다.
진검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흉하게 변해 버린 당철민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눈이 향하는 곳은 갈지혁이다.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두려워서? 아니다. 그런 감정에 흔들릴 거라면 애초부터 검을 놓았을 게다.
진검백은 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본연의 기운을 쏟아 내려고 했다. 간신히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싸워 보고 싶은 감정을 겨우 멈춘 것이다.
몸에서 일던 기이한 내공이 잠잠해졌다.
만약 누군가가 진검백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면 놀라운 것을 알아냈을 게다. 하지만 진검백이 변한 것은 찰나였고, 그것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눈이 갈지혁과 당철민의 싸움으로 향한 탓이다.
진검백은 땀이 가득한 손을 움켜쥐었다. 갈지혁과 함께는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싸우게 될 것이다.
그건 아마 갈지혁 또한 알고 있을 게다. 그냥 본다면 진검백의 필패다. 하지만…… 진검백은 자신이 질 거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자신의 실력의 일부분밖에 보이지 않은 상태다.
당철민의 중얼거리는 듯했던 독왕이라는 말은 갈지혁에게도 왠지 모를 흥분으로 다가왔다.
‘독왕…….’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스스로의 입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입으로 말이다.
한 걸음 나아간 기분이다. 지금 당장은 연명분의 독기에 다소 어지럽기는 하지만 이미 싸움은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철민은 갈지혁의 피에 중독됐다. 해독할 방법이 없다.
그 이유는 갈지혁의 피 자체가 하나의 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만 가지 독이 섞이며 갈지혁의 피는 세상에서 다시없는 독이 되어 버렸다.
조금만 다르게 사용한다면 그 위력이 완전히 변해 버린다.
수만 가지 독이 섞였으니 해독을 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합성독이지만 결코 그것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극독이 바로 갈지혁의 피인 게다.